고구려를 위하여 2 김병호 씀 하서출판사 고구려를 위하여 필사의 탈출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길은 험하기만 했다. 주강을 건너자 천연의 원시림이 나타났다. 태고의 자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원시림을 뚫고 전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주로 나무와 덤불이 엉클어져 있지 않은 개울물을 따라갔다. 낮에는 해를 보고 북쪽을 향해 걸었고, 밤에는 북극성의 위치를 살피며 다음날 가야 할 길을 가늠했다. 아소미네와 뜰지마사는 쌀을 쪄서 빻아 만든 미숫가루를 짊어지고 갔다. 대충 한 달분의 식량이었다. 도중에 날짐승이나 들짐승을 만나면 활이나 석궁으로 쏘아 잡아서 육물을 섭취해 원기를 회복했다. 그들은 고구려 유민들이 유배되어 맨 처음 정착해서 살았던 익주 동남쪽 산남으로 가려고 했다. 산남에서 7년씩이나 살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무주-)로 나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듯싶었다. 그러나 20일이면 닿으리라던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한 달이 넘게 산하를 헤맸지만 암만 가도 산남은 나타나지 앉았다 "아소미네님,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닐까요? "글쎄 말이다. 아무래도 이상하구나" 그러나 알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방향을 잘못 잡아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이 산남에서 주강 남쪽으로 이동해 온 것이 벌써 40년이 넘었는데 마을의 원로들에게서 들은 설명만으로 먼길을 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더군다나 8년 지난 후 주위의 풍물이 변해 버린 산하에는 식별할 수 있는 표식물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쉬지 않고 부지런히 앞만 보고 전진해 갔다뒷날 알려진 바로는, 한번 길을 잘못 든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무주 쪽이 아니고 내륙 더 깊숙이 곡주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을지마사가 처음으로 사람이 사는 곳을 발견한 것은 주강을 출발한 지 거진 두 달이 다 되어서였다. 어쩌면 마을이 두 달을 걸어야 도착할 만한 거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다만 원시림 속의 가시덤불을 헤치고 오느라 시일이 훨씬 더 걸렸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들로서는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는 것이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그들은 골짜기 사이에 20여채의 떡갈나무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을 향해 산을 서둘러 내려갔다. 마을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앞서 가던 을지마사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던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마을을 유심히 살피는 것이었다. 뒤따라 내려오던 아소미네가 을지마사 곁으로 다가섰다. "뭣이 보여? "아니 , 아무래도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사람이 사는 마을 같지 않아요." "그래?" 을지마사는 손을 들어 마을 뒤편의 아름드리 물푸레나무 밑을 가리켰다. 그제야 아소미네의 눈도 취등그레졌다. 그곳에 무슨 동물 비슷한 것 한떼가 웅크리고 있었다. 아소미네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저게 뭐지?" "글쎄요. 사람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하고..." 아소미네의 시야에 들어온 것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피물이 온몸에 하알고, 빨갛고, 파란색의 줄무의를 하고 큰 눈망울을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머리를 치렁치렁 산발을해서 아무리 보아도 사람은 아니고, 귀신이 아니면 처음 보는 이상한 동물들이었다. 그런데 그 한떼의 이상한 동물들도 이쪽의 출현을 알아챈 듯싶었다. 한동안 자기네들끼리 웅성거리더니 부산하게 몸을 움직여 아소미네와 을지마사가 있는 앞산 중턱으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손에 긴 창을 들고 있었다. 아소미네는 문득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발가벗은 전라의 그 이상한 동물 떼 30여 명이 아소미네를 향해 산을 기어오르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난데없는 북소리가 온 산을 울렸기 때문이었다. 등 등 둥... 북소리는 소름이 끼쳤다. 그렇다. 저 북소리는 적이 있고, 그적을 향해 전의를 북돋우는 살벌함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우선 몸을 피하자 "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내려왔던 산을 되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아소미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주강 남쪽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아소미네와 산속에서 짐승을 쫓으며 수렵 생활을 하는 추격자의 산 타는 솜씨는 비교가 안 되었다 더군다나 오십이 넘은 아소미네는 체력이 달려 걸음이 재빠르지 못했다. 결국 아소미네는 추격자들에게 겹겹이 포위되고 말았다. 아소미네가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 쉬자 돌창을 꼬나든 추격자들이 주위를 빙 둘러쌌다. 가까이서 보니 온몸에 흰색과 검은색으로 줄무의 모양의 색칠을 하고 있었지만 살색이 검붉고, 코도 있고, 눈도 있고, 또 두 다리로 서서 걷는 것이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소미네는 말을 걸어 보았다 "다, 당신들은 누구요?" 그러나 그들은 아소미네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지 손가락으로 아소미네를 가리키며 짐승 같은 소리를 질러 댔다. 도대체 옷을 입고, 살색이 하얀 아소미네가 그들에게는 무엇으로 비쳤을까? 그들은 순식간에 아소미네를 덮치더니 연방 괴성을 질러 대며 아소미네를 꽁꽁 묶었다 그리고 묶인 손과 발 사이로 긴 통나무대를 끼워 넣더니 두 명의 사내가 각각 통나무대 한쪽을 어깨에 들쳐 메고 산을 내려갔다. 아소미네는 옴짝달싹 못하고 당하고 말았다. '아, 이젠 꼼짝없이 죽었구나?' 멧돼지처럼 통나무대에 거꾸로 매달려 산을 내려가는 아소미네는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자기를 마치 사냥을 해서 잡은 짐승처럼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추격자들이 자기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것임이 분명했다. 추격자들이 아소미네를 통나무에 매달고 마을에 들어서자 일대 큰 소란이 벌어졌다. 온 마을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꾸역꾸역 기어 나와 갑자기 괴성을 질러 대며 법석을 떨었다. 발가벗은 몸에 나뭇잎으로 겨우 성기만 가린 노인네, 여자, 아이들이 마을 공터 흙바닥에 내팽개쳐진 아소미네를 에워싸고 빙글빙글 돌면서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그들은 이상한 음조로 합창을 하면서 발로 땅을 차며 아소미네의 주위를 돌고 또 돌았다. 아소미네는 반쯤 얼이 빠져 꺼져가는 그의 망막 속에 얼핏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광란의 춤이끝나자 손에 칼을 들고는 북소리 장단에 맞추어 아소미네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몇 놈의 전사들이었다. 북소리는 여전히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고 있었다. 다섯 놈의 전사가 드디어 아소미네에게 바짝 붙더니, 칼날을 아소미네의 목을 향해 겨냥했다. 그들의 살기 띤 눈초리가 칼 끝으로 모아졌다 단번에 칼끝이 아소미네의 목줄기에 깊숙이 박혀 버릴 절대절명의 순간, 그때 숨죽이고 있던 북소리가 다시 정적을 깼다. 등 등 등... 다섯 놈의 전사들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여전히 칼을 움켜쥔 그들의 손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어둠을 사르는 모닥불 빛을 받은 다섯 놈의 눈알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등, 등, 등... 다시 북소리가 울렸다. 한발짝 뒤로 물러섰던 다섯 놈의 전사들은 다시 칼끝을 아소미네의 목줄기를 향해 꼬나 세웠다. 그들은 마치 망나니가 시퍼렇게 날이 선 장도칼을 허공에 치켜들고, 북소리에 맞춰 죄수의 주위를 빙글빙글 몇 바쥐를 돌면서 한식 경이나 춤을 추듯이, 그래서 죄수는 극도의 공포에 쉽싸이고 마침내 목을 내려칠 때쯤 되면 넋을 잃어버리듯이. 그 다섯 놈의 전사도 그렇게 아소미네의 목에 비수를 꽃기 전에 아소미네의 넋을 빼앗고 있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이고 같은 동작이 반복되었다 전사들의 칼끝이 아소미네의 목줄을 따려는 순간에는 으레 둘러선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소미네의 넋은 이미 이 세상것이 아니었다. 이미 구천을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또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뭉클한 촉감을 느끼며 아소미네의 넋이 되돌아왔다 그러나 아소미네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영겁의 어둠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둠을 몰아내려는 듯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좀체 말을 듣지 않았다. 도대체 을지마사는 어디로 가고 자기 혼자만 이런 곳에 와 있는 것인가. 그때 아소미네의 몸에 와 닿는 촉감이 보다 분명해졌다 그것은 분명 움직이는 물체였다. 누굴까? "을지마사" 침묵 속에서 대답이 없었다. 아소미네는 다시 한 번 불러 보았다 "을지 마사" 그때 상대편의 말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 왔다. "솰라 솰라." 응? 그러면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은 을지마사가 아니었단 말인가? 떠올리기조차 소름끼치는 야만인 전사들이었단 말인가. 아소미네는 다시 한 번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정신이 아물거리며, 몸뚱어리가 땅속으로 아스라이 꺼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소미네가 주변 상황을 가늠할 수가 있었던 것은 다음날 미명이었다 여명의 빛살이 새어들어 오면서 그의 시야가 보다 분명해졌다 사방이 흙벽인 것을 보면 자신이 지금 깊은 우물 속에들어 있는 듯했다. 바로 지척간에 중년 사내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중년의 사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에 문신도 없었다. 아소미네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 사내도 아소미네에게 불안한 눈빛을 보내 왔다. "당신은 누구지요?" "솰라 솰라." "나는 고구려 사람 아소미네요." "솰라 솰라 " 아소미네는 안 되겠다 싶어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당신은 누구인가?' 라고 한문을 써 보였다. 글자를 본 중년 남자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마침내 중년 남자는 한자를 써서 자기는 당나라 사람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아소미네와 그 윙이란 당나라 사람은 서로 의사 전달을 할 수 있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되어 이곳에 붙잡혀 있소? "교지(왕국에 사신으로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와족. 운남성, 귀주성, 태국, 버마 등지에 살고 있는 남방계 민족)에게 붙들렸소." "교지 왕국은 뭣이고 또 와족은 무엇이오? "교지 왕국은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5천 리 지경에 있소." 당나라 시대에 교지 왕국은 지금의 베트남 북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또 와족은 남쪽 섬에서 메콩강을 따라 북상을 해서 높은 지대에서 살고 있던 원시인들이었다. 그러니까 주강 중류에 정착해 있던 아소미네의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와 교지 왕국의 중간쯤인 지대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이 그곳에서 2천 리쯤 남쪽으로 더 내려갔더라면 교지 왕국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을지마사는 당인 웡에게서 대충 설명을 들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그럼, 이제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거요?" 아소미네가 묻는 말에 웡은 흙바닥에다 글씨를 썼다가 지우기를 여러 번 했다. 그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교지 왕국으로 가는 자기 일행은 모두 12명이었는데, 도중에 길을 잃어 와족을 만났다. 모두들 싸웠지만 당해낼 수가 없어 살해당하고 자기는 비탈진 곳에서 미끄러져 그만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런데 옛날부터 와족에게는 만월이 되면 사람의 목을 베어 젯상에 올려놓고 제사지내는 인신공양(풍속이 있는데 아마도 우리들은 그날 밤 희생의 제물로 사용되어질 것이다. 또 듣기에는 목을 벤 후 심장을 꺼내 씹고, 골을 파 먹는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건 자세히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위에서 뭔가 뚝 떨어졌다 당나라 사람 월은 흠칫 놀라 손을 멈췄다. 땅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나무열매 몇 개와 죽은 메추라기 2마리였다. 아소미네가 위를 쳐다보니 얼굴에 문신을 한 와족 전사 두 놈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느물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던져 준 나무열매와 메추라기 2마리는 아소미네와 당나라 사람 웡의 아침 식사였던 모양이었다. 아소미네는 메추라기를 생살로 뜯어 먹을 수도 없었고 또 무엇을 먹을 만한 경황도 아니었다, "그런데 만월이 언제요?" "아직 이틀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아소미네와 그 당나라 사람 웡은 사형 날짜를 받아 놓고 시간이 다가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20자도 넘는 함정 속에서 밖으로 빠져 나가는 일은 꿈도 꾸어볼 수 가 없었다 그나저나 함께 달아난 을지마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젊은 혈기에 대항하다가 살해당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도망을 쳤거나 둘중의 하나일 것이다. 아소미네는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온종일 흙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햇살이 토굴 속을 비껴 가고 또 한나절이 지나서야 어둠이 내렸다. 토굴에서 올려다보이는 손바닥만한 밤하늘에 별들이 돋았다. 그러고 나서도 얼마나 지났을까 삼경(밤12시)이 조금 지났을 무렵, 어둠 속에서 긴 줄 같은 것이 토굴 밑으로 살금살금 내려오고 있었다. 아소미네가 문득 숨을 죽이고 어둠 속을 응시했다 분명 긴 줄이 내려오고 있었다, 가만 숨을 죽이고 있었더니 줄이 아래위로 춤을 추며 흔들리는 것이었다. 아소미네는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줄끝을 꽉 붙잡았다. 위에서 사람의 무게를 감지했던지 누군가가 줄을 끌어당겼다. 아소미네는 혼신의 힘을 다해 줄을 붙잡고 어렵사리 토벽을 기어올라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쉿."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을지마사였라 을지마사는 와족 전사들이 아소미네를 붙잡는 동안 용케 도망쳐 숨어 있다가가까운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온종일 마을의 동정을 엿보았다. 그리고 아소미네를 구출하기 위해 칡덩굴을 모아다가 동아줄을 만든 다음 야밤에 마을로 내려왔던 것이다. 뒤이어 동아줄을 타고 당나라 사람 웡도 밖으로 기어 나왔다. 한가지 다행스러웠던 것은 와족은 그때까지 개를 기를 줄을 몰랐다 마을은 다시 태고적으로 돌아간 듯 정적에 잠겨 있었다. 아소미네와 당나라 사람 월이 무사히 토굴 밖으로 나오자 세사람은 무작정 풀숲을 더듬어 산을 타 넘었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몇 개의 산을 타 넘는 새 어느덧 동녘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그들은 산꼭대기에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아침 안개가 걷히자 바로 산 아래로 큰강이 유유히 흐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단 와족 마을 전사들의 추격권을 벗어났다 싶으니 마음의 여유가 생긴 당나라 사람 웡이 다시 굴바닥에다 글을 썼다 "저건 필시 금사강, 양자강의 지류로써 사천성 부근 일거요." "금사강?" "저 강은 흘러내리면서 여러 개의 물줄기와 합쳐져 장강에 이르게 되는데 나중에 동쪽 바다로 흘러가지요." 사실 당시의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중국에 대해서 별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중국에 와서 오랜 세월을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았던 것이다. 그날 아침나절 내내 아소미네 일행 세 사람은 금사강 가를 오르내렸다. 점심때가 지나서야 강나루 마을 하나를 발견했다. 다행스럽게도 중국인 마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천신만고끝에 안심할 수 있는 장소에 도달할 수 있었다. 중국인 웡은 당나라 관리여서 마을 사람들의 접대가 융숭했다 그리고 또 웡은 아소미 네와 을지마사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해서 불편이 없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주었다. 그날 밤 마을의 촌장집에서 술상이 차려지고, 토주잔이 한 순배 돌고 난 후 당인 월이 그간에 궁금했던 것을 물어 왔다. "당신네들은 누구며 또 어디로 가는 길이오?" "우리는 고구려 사람이오." "고구려 사람? "그렇소, 고구려에서 왔소. 그런데 당신은 고구려에 대해서 알고 있소? 아소미네는 본색이 드러날까 봐 대수롭지 않게 묻는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혹시나 당나라 사람 웡에게서 새로운 소식이나 들을까 해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고구려? 알지요. 지금 대진국의 옛 나라가 고구려 아니었소?" 아소미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 난데없이 대진국이 또 무슨 나라란 말인가. 자모나 나라에게서 들은 적도 없는 이름이었다. 그럼 혹시 자모의 고구려 광복군이 바다를 건너가서 당나라와 신라군을 몰아내고 새로 세운 나라는 아닐까. "사형, 죄송합니다만 나는 변방 구석에 처박혀 살고 있어서 그간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어두웠습니다. 그 대진국을 세운 사람은 누구며, 백성들은 또 누구입니까? "아하! 형씨가 한참 어둡구려. 대진국을 세운 사람은 고구려 장군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이고, 백성들이야 당연히 옛 고구려 사람들이 아니겠소." 순간 아소미네의 가슴속에서는 희비의 감정이 교차했다 우선 고구려 민족이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세웠다니 벅찬 감격에 온몸이 떨렸다 그런데 나라를 세운 사람은 자모가 아니었다 그럼 주강을 떠나간 자모와 1만 명의 병사들은 도대체 어디로 증발해버린 것일까. 아무튼 당나라 사람 월은 조정의 관리여서 그런지 아는 것이 꾀 많았다 그래서 아소미네는 내친 김에 70여 년 전에 붙들려 온 고구려 포로들의 뒷소식을 물었다 물론 당나라 사람 웡도 아소미네와 을지마사가 고구려 포로의 후예라는 것쯤은 진작부터눈치 채고 있었다. "고구려 포로들 말이지오? 제1진은 강회, 산남, 경서로 보냈는데, 그 가운데서 산남으로 보낸 고구려 포로들이 변고를 일으켰소." 아소미네는 바짝 긴장한 탓인지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러나 짐짓 능청을 떠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변고가 있었습니까?" "고구려의 유명한 장수 자소라는 사람이 당나라 조정에서 주는 벼슬도 싫다 하고 포로들을 뒤따라 내려갔는데 , 그만 모반을 해서 3만이 넘는 당군을 전멸시켰소. 그런데 당나라에 적대적인 그들이 당군과 싸운 후 남쪽 어디론가 종적을 감춰 버렸소. 그래서 지금 당나라 조정에서는 후환이 있을 것을 염려해서 그들의 행방을 찾자고 의논하고 있는 중이오 아소미네가 듣고 보니 겁나는 얘기였다. 만약 당나라에서 은 군사를 동원해서 주강 남쪽에서 숨어 살고 있는 고구려 유민들을 찾아내고 공격을 해오면 어찌 될 것인가. 아소미네는 가슴이 벌벌 떨려 왔지만 그렇다고 내색할 수가 없었다. "그럼 다른 곳으로 간 사람들은 또 없었습니까?" "있지요. 당시 고구려의 포로가 20만 명이나 되어 이곳 저곳에 분산시켰다고 들었소. 내가 듣기로는 경서와 농우로 끌고 간포로들은 말썽 없이 잘 살고 있다고 합디다." "그럼..." 아소미네가 말을 더듬거리자 웡은 술상 너머로 아소미네를 빤히 바라다보았다 "그럼... 포로 중 고구려로 되돌아간 사람은 없었습니까? "왜요? 있지요.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고구려 영토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안동도호부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검모잠, 걸걸중상, 안승 등의 무리가 고구려 백성들을 충돌질해 어찌나 끈질기게 당군에게 저항하던지 당군이 배겨날 수가 없었소." "그래서요?" "당나라에서는 붙잡아 왔던 보장왕과 백성들 일부를 되돌려 보내 고구려 백성들을 무마시키려고 했소. 그런데 그것이 그만..... .." 원은 이 대목에서 술 한잔을 들이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당나라의 실책이었습니다. 보장왕이 독립운동을 하는 그들과 결탁해 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당나라에서는 보장왕을 다시 잡아들여 공주로 귀양보내 버리고 백성들은 농우와 하남의 불모지에다 버렸지요. 보장왕은 결국 귀양지에서 죽었습니다" 아소미네, 을지마사, 웡은 그날 밤이 이슥해서까지 술을 마시고, 다음날 새벽에 길을 떠났다. 아소미네도 마을에 더 이상 눌러 있을 필요가 없었지만, 교지국으로 가는 사신 중 유일한 생존자인 원도 시급히 돌아가서 그간의 사고 경위를 조정에 보고해야만 했다. 새벽의 금사강 일대는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양자강의 상류인 금사강은 고지대인 청해성, 운남성, 사천성의 급경사를 벅차게 흘러내려 물살이 빨랐다. 그래서 금사강 중간쯤에 이르자 황톳빛 물살이 용틀임을 하며 한점 가랑잎 같은 나룻배를 붙잡아 소용돌이 속으로 빨아들였다가는 다시 들어올려 저만치 내팽개쳤다 나룻배는 마치 춤을 추듯 떠내려가며 건너편 강안으로 다가서고 있었지만, 자욱하게 덮인 안개 때문에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사공 두 사람이 부지런히 노를 젓는 소리만이 들렸다 아마도 사공의 눈이 더 밝은 모양이었다. 잠시후 사공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손님들 다 왔습니다" 뱃전을 붙잡고 토악질을 해대던 아소미네 일행이 몸을 추스려 북쪽 강안에 내려섰을 때는 기진맥진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일행은 언덕에 올라 잠시 속을 가라앉힌 후 뱃사공이 일러준 길을 따라 북상했다 당시 남만으로 통하는 길은 말이 길이지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분간이 안 되는 조그만 오솔길에 불과했다 윙길을 따라 길을 나선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여러 날 후 촉 땅 성도에 도착했고, 다시 한중을 지났다. 한중을 벗어나자 너른 평야지대가 계속되었다. 때가 여름철이어서 들녘 이곳 저곳에서는 사람들이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사꾼들 대부분은 차림새가 남루하고, 사흘에 죽 한 그룻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당나라도 이러다가는..." 웡도 보기가 딱했던지 혼잣말을 하면서 한숨을 지었다. 국운점차 기울어 가고 있다는 것을 그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당황제 현종은 당나라 왕실에서는 제법 똑똑한 인물이었다. 선왕인 중종이 자기의 생모인 측천무후에게 강제 퇴위를 당하고, 15년이 지난 다음에야 가까스로 임금자리를 되찾았으나 그는 여자복이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었다. 임금으로 복귀한지 5년도 안 되어 권력에 눈이 먼 위후(와 여동생인 안락공주가 서로 짜고 만두 속에 독을 넣는 바람에 비명에 갔 다. 이에 격분한 현종은 궁궐로 쳐들어가 위후와 안락공주를 잡아죽인 다음, 역시 측천무후에게 강제 퇴위당한 예종을 내세웠다. 그 2년 후에는 스스로 왕이 되어 얼마 동안은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러나 말년에 사랑하던 아내 무혜비 가 죽자 한동안 마음을 잡지 못하더니, 친자식 수왕의 부인인 천하 절색 양귀비 가로채 총애하기에 이르렀다. 양귀비의 사치가 극에 달하자 이로 인해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긴 현종은 밤낮으로 양귀비만 끼고 살 았다. 그의 오라버니 양국충을 데려다 재상을 삼고, 양귀비가 좋아하는 안녹산을 병마절도사로 임명했다. 조정에는 자연 간신이 들끓었다 그런데도 현종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양귀비의 비위를 맞추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일국의 왕이란 자가 이꼴이었으니 정치가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과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아사지경에 이르렀고, 더러는 유랑민이 되기도 했다. 성도를 출발한 아소미네 일행은 한 달여 만에야 장안성의 주작문에 들어섰다. 피폐한 농촌과는 달리 장안성은 겉보기에 웅장했고, 성밑은 지나다니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때마침 큰 성문이 열리면서 한떼의 군마가 주작문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병사들의 수효는 한 3만 명쯤, 모두 다 붉은색 전포를 입고 칼과 창과 활로 무장하고 있었다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라서 적이 놀랐다. "아소미네님 ! 저게 뭐지요? "아마도 당나라 군사들일 게다." "그럼 옛날에 자모 대장도 저런 모습을 하고 싸우러 갔나요? "그렇지 . 그러나 고구려의 군복은 붉은색이 아니라 검은색이란다." 자모가 출정하고 난 후로는 군대를 양성하지 않았으니 전후 세대인 을지마사가 군대라는 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 을지마사는 길 한옆에 비켜서서 반쯤 넋이 빠진 채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무장한 군인들의 행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그 군대가 바로 산남에서 행방이 묘연해져 버린 고구려 유민들을 수색하고, 이어서 교지 (베트남북부 지방)의 정벌을 목표로 떠나는 길이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기이하게도 장안성에 들어선 순간 자기네들을 토벌하러 가는 당나라 군대와 맞닥뜨린 것이다. 그러나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창검을 높이 치켜들고 지나가는 당나라 군대가 어디로 가는지를 몰랐다. 당시 군대의 이동은 1급비밀에 속한 사항이었기 때문에 길거리에 나와 구경을 하고 있는 당나라 사람들조차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군사들은 30일 후면 익주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익주로부터 주강까지, 주강을 넘어서 교지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뒤져서 고구려 유민들을 찾아낼 것이다. 고구려 유민들로서는 일대환란이 닥칠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당시 그들은 단 한 명의 군사도 훈련시켜 놓지 않은 무방비 상태였다 자소가 죽고, 자모가 군사들을 이끌고 고구려로 떠난 후 40년이 지나도록 이제나 저제나 오직 자모의 복군이 돌아올 날만 기다리며 살아온 터였다. 만약 당나라 군사들이 주강 남쪽에 웅거하고 있는 고구려 유민들을 찾는 날이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 무방비 상태에 있는 고구려 유민들을 몰살할 것이 분명했다. 억세고 사나운 당나라 병사들의 창칼이 남녀노소를 가리겠는가. 장안성에 도착해서 웡의 집에 머문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었다 웡은 도착한 다음날로 조정에 나가 와족에게 당한 경위를 고하고 난 후, 틈나는 대로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를 데리고 장안구경을 시켜 주었다. 평생을 주강의 오지에서만 살아온 아소미네와 을지마사의 눈에 비친 주작로 양편에 즐비하게 들어선 고루거각들은 마치 딴세상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저잣거리에는 세계각처에서 온 진귀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도 가지각색이었다. 거리 한모퉁이에서 휘장을 쳐놓고 창극을 하는가 하면, 서역에서 왔다는 코가 크고눈이 파란 사람들이 낙타떼를 몰고 지나갔다. 을지마사는 온종일 장안거리를 쓸고 다니며 온통 신기한 구경거리에 정신을 못차렸다 하루는 아소미네가 웡이 퇴청하기를 기다렸다가 자기의 결심을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우리 마을로 다시 돌아가야 할까 봅니다" 사실 아소미네가 장안까지 먼길을 온 것은 주강 남쪽에 붙박혀 있는 고구려 유민들의 앞날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막상 장안에 와서 보니 이렇듯 넓고 넓은 세상천지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더욱 막연해졌다. 그래서 차라리 주강의 마을로 되돌아갈까 하고 마음을 굳히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웡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오늘에사 옛 고구려에 대한 자세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소," 아소미네의 귀가 번쩍 뜨였다. "옛 고구려에 대한 소식이라구요?" 아소미네에게 그보다 더 반가운 말은 없었다 "그렇소. 고구려 땅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서 말이오." "고구려의 뒤를 이어 새로 건국했다는 발해라는 나라 말입니까?" "맞소.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옛 고구려 땅에 가까운 영주라는 곳으로 붙잡혀간 고구려 포로들은 차츰 세력이 커지더니 이미 40년 전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이 주모자가 되어 큰 반란을 일으켰지요. 그들은 당나라 관청의 우두머리인 영주도독을 죽이고 옛 고구려 백성들과 말갈 사람들까지 거느리고 동쪽으로 진군했습니다." "그래서요?" 아소미네는 고구려가 망한 후 과연 그 같은 장엄한 민족 드라마가 있었으리라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소식을 접한 당나라 조정이 발칵 뒤집혔소. 그래서 당장 이해고에게 대군을 주어 걸걸중상 무리들을 단번에 깔아뭉개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걸걸중상 등 고구려 독립군들의 대항은 만만치 않았소." 순간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피가 용솟음치는 듯했다 그러나 웡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천문령 전투(요서성 창무 서북방)에서 당군은 고구려 독립군에게 전멸하다시피 하였소. 당장 이해고는 겨우 목숨만을 건져도망쳐 왔으니까요. 그 직후 대조영이 동모산(길림성 돈화 동쪽)에서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진국이라고 불렀습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아소미네가 열에 뜬 눈길로 웡을 바라다 보았다. 그때 웡이 아소미네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아소미네 공, 혹시 산남의 고구려 유민이 아니시오?" 아소미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렇게 된 바에야 웡에게 더 이상 본색을 숨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웡 공, 나는 산남으로 끌려갔던 고구려 포로의 자식이오." "내 진즉 감은 잡고 있었소. 그런데 지금 산남의 고구려 유민들은 어디로 도망가서 살고 있소? 아소미네는 난감했다. 자기가 입을 잘못 놀리는 날이면 고구려 유민들의 거처가 탄로날 것이고, 그로 인해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소 시절, 조진의 당나라 군사 3만 명을 전멸시켰기 때문에 당나라 조정에서는 자나깨나 고구려 유민들을 찾아내서 잡아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웡도 중국 사람이었다.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를 자기집으로 데려다가 후한 대접을 하고, 산남의 고구려 포로라는 것을 벌써 눈치 챘으면서도 관대히 베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소미네로서는 웡의 물음에 어물쩍 넘어갈 도리밖에 없었다. "무주 남쪽으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까마득히 먼곳에서 살고 있소. 그러나 그곳의 지명이 무엇인지는 우리도 모르오." 아소미네의 말을 듣고 난 웡이 고개를 끄덕였다. "딴은 그렇겠지요. 그쪽은 애초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무인지경이었으니까.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소."이상한 일이라니? 그럼 당나라 조정에서도 주강 남쪽으로 달아나 숨어 살고 있는 고구려 유민들에 대해 어떤 정보라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월의 이야기는 아소미네의 우려를 빗나갔다. "40여 년 전, 그러니까 측천무후가 다스리던 때였소, 강남 동도 복주 근해에 폭풍을 만나 침몰했으리라고 여겨지는 수많은 선박들의 잔해와 시체들이 떠밀려온 일이 있었소." 불길한 생각이 아소미네의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뭐라구?"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체들이 하나같이 고구려 군복을 입고있었단 말이오." 아소미네의 입에서 저절로 탄식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그러면 그들이 바로 자모의 고구려 광복군들이었단 말인가 그들이 고구려 땅에 닿지도 못하고, 도중에 폭풍을 만나 바다 위에서 모두 죽어 버렸다니. 주강 남쪽의 고구려 유민들이 지난 40년 동안 돌아올 날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자모의 원정군이... 그리고 나라가 산 망부석이 되어 매일같이 먼 지평선을 바라다보며 기다렸던 그 무수한 시간들이 끝내 이롤 수 없는 비원으로 끝났단 말인가. 주강 남쪽의 고구려 유민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불안한 생각에 빠져들었고, 이제는 반쯤 체념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만, 아소미네는 막상 웡에게서 그 소리를 듣자 가슴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웡은 그러한 아소미네의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또 한차례 당나라 조정이 발칵 뒤집혔소, 이미 망해 버린 고구려가 군대를 내어 당나라를 침략할 리도 없고, 또 하필이면 중국 남쪽 해안으로 건너왔을 까닭도 없지 않소? 조정에서는 한동안 이 일을 두고 갑론을박하다가 조진의 당군을 전멸시키고 무주 남쪽에서 행방을 감춘 고구려 유민의 짓으로 판단을 내려 정벌군을 대대적으로 일으키려고 하였소." "고, 고구려 유민들을 토벌하려고요? 자모의 고구려 원정군이 떠난 후 고구려 유민들은 주강 남쪽의 오지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아무것도 모르고 살고 있었다. 한데 바깥 세상에서는 자기네들과 연루된 사건이 계속 벌어지고 있썼다. "그렇소. 마침내 당나라 대군이 마악 출정을 하려던 때 갑자기 돌궐의 힐리가한이 침략해 오는 바람에 군대를 그 쪽으로 돌려 버린 것이오." 그러나 웡도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인지라 한 가지 사실만은 아소미네에게 철저히 숨겼다. 바로 달포 전에 당장 예약수가 산남의 고구려 유민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출정했다는 사실이었다. 아소미네와 을지마사가 장안성 주작문을 들어설 때 마주친 바로 그 군사들이었다. 웡은 다시금 은근 슬쩍 물었다. "그럼 형씨들이 출발한 곳은 어디지요?" "아시다시피 도중에 길을 잃어 기억에 없습니다." 아소미네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밤이 이슥해져서야 월은 자기의 침소로 돌아갔다.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잠자리에 누웠지만 이내 잠들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제야고구려 패망 이후 변해 버린 주변 정세를 알 수 있었고, 당나라로 끌려온 포로들의 그 후의 실상을 윤곽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면 필시 이곳 장안에도 무엇인가 그 흔적이 있을 것이었다 고구려 포로들이 슬픈 유산처럼 남긴 그 흔적이 말이다. 고구려 류랑극달 다음날 아침 밥을 먹기가 무섭게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장안 거리로 나섰다. 전날처럼 그저 눈요기나 하면서 돌아다닌 것이 아니고, 지나가는 사람 얼굴 하나, 말소리 한마디도 놓칠세라 유심히 살피며 다녔다. 점심때가 지나서 두 사람이 저잣거리에 들어섰을 때였다 두 사람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그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마침 길 한모퉁이에다 쳐놓은 휘장 주위에 웬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여 넋을 놓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휘장을 쳐놓은 가설 무대에서 한무리의 여인네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머리에는 고깔을 썼으며 제법 화사한 옷을 입고 있었다 "등등짝짝..." 여인네들은 휘장 곁에서 몇 명의 남자가 불어 대는 퍼리, 장고, 징소리의 장단에 맞춰 발을 두어 걸음 앞으로 내딛다가 다시 한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넓은 소매를 하늘로 치켜올리며 빙그르도는 동작을 반복했다. 삐 삐 등등짝짝... 아직 젊은 을지마사는 대뜸 처녀들이 춤을 추는 광경에 정신이 팔렸다. 처녀들은 을지마사가 어렸을 적부터 설날이나, 단호날 그리고 추석날에 마을에서 보아 왔던 것과 똑같은 춤을 추고있었던 것이다. 마을에서 보았던 것보다는 의복이나 춤솜씨가 아주 세련되어서인지 을지마사의 눈에는 황홀하게 비쳤다. 이들은 고구려의 유랑극단이었다. 당나라 서울 장안에는 세계곳곳에서 이와 같은 유랑극단이나 마술사들이 모여들었다. 거란이나 선비족도 있었고 돌궐, 토번 등의 악극단도 있었다. 또 20만 명이나 되는 고구려 포로들이 일시에 당나라로 붙들려 오는 바람에 고구려의 풍속이나 음악, 춤 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특히 고구려의 춤은 당나라의 궁중이나 상류사회에서 꾀 인기를 끌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아소미네와 을지마사가 장안으로 오기 30년 전 측천무후 연간 아첨 잘하기로 소문난 양재사라는 사람이 아첨 덕에 재상이 되었다 어느 날 사례소경 벼슬에 있던 장동휴라는 사람이 공경들을 불러 연회를 열어 즐기다 술이 거나해지자 양재사를 희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재사의 얼굴은 고구려 사람들과 비슷하구먼?" 이 말을 들은 양재사는 혼연히 기뻐하며 곧 종이를 잘라 두건을 만들어 쓰고, 자포(당나라 때 5품 이상 높은 관리의 의복)를 뒤집어 입고서 고구려 춤을 추어 대니 좌중이 크게 웃었다. 그날 을지마사는 평상시와 분명 다른 데가 있었다. 그도 피가 끓는 젊음은 주체할 수 없었던지 구경꾼들 틈에 끼여들어 춤추는 고구려 처녀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을지마사는 이미 그중 한처녀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처녀의 나이는 이제 열일곱이나 열여덟 살쯤 되었을까. 앳띤 얼굴에 가냘픈 몸매였다. 시종 긴 속눈썹을 내리간 그 처녀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깊은 우수가 서려 있는 듯했다 을지마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무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한참 춤을 추고 있는 그녀는 을지마사에게 눈길 한번 주는 일이 없었다. 아니 춤이 다 끝나도록 을지마사는 커녕 주위에 모여 있는 구경꾼들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대체 그녀는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무슨 상념에 잠겨 있는 것일까. 머나먼 이국땅으로 끌려와 갖은 고난을 겪었을 자기 부모들과 또 남의 땅에서 태어나 외톨이로 고독하게 성장한 인고의 세월들을 반추하고 있는 것일까. 을지마사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과 내리간 시선에서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전해져 왔다. 그렇다. 을지마사는 자기가 그녀의 가슴속을 풀어 헤쳐 서리서리 쌓여 있는 그녀의 한을 어루만져 녹여 주고 싶다는 안타까움이 차츰 움터 왔다. 어쩌면 자신이 그녀의 고달프고 허무한 삶속에 깊숙이 들어가 무엇인가 넘치는 것으로 꽉 채워줄 수 있을것만 같은 울렁거림이었다. 어느덧 북소리, 피리소리, 징소리가 멎자 고구려 처녀들의 춤사위도 막을 내리고 무대 뒤로 사라져 갔다. 이어서 건장한 사내 두 명이 무대 위로 올라와서 구경꾼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 었다. "에... 이 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고구려 봉래산(금강산) 신선암 밑에서 캐어온 불로장생초로서 , 옛날 진시황이 동남동녀 3천명을 보내..." 불로장생약 선전이었다. 그러나 을지마사는 약선전 따위는 거들떠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을지마사는 처녀들이 사라진 장막 뒤쪽을 향해 구경꾼들 사이를 비집고 나갔다. 을지마사가 장막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두어 명의 남자가 있고, 또 열대여섯 명의 고구려 처녀들이 모여 있었다. 을지마사는 방금 전에 무대 위에서 본 그 가냘프게 생긴 처녀가 한쪽 구석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불시에 나타난 침입자에 놀란 시선들이 일제히 을지마사에게 쏠렸다. 그러나 을지마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똑바로 그 처녀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막상 떨려 왔다. "처녀 ! 나도 고구려 사람... 을지마사요." 처녀는 그제서야 내리간 눈을 들어 을지마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그윽한 시선은 잠간 을지마사를 스쳤을 뿐 다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처녀! 나는... 나는 당신을 만나 보고 싶어 찾아왔소." 고개를 숙인 채 처녀는 발부리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귓불이 차츰 붉게 물들어 오는 것을 보면 그녀도 을지마사를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웬 떠꺼머리 총각이 자기 앞에 떡 버티고 서서,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말을 꺼내자 부끄러움에 그녀는 잠자코 있었던 것이다. 을지마사는 긴장으로 목젖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처녀! 나는 당신을...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을지마사는 그녀에 대한 자기의 감정을 솔직히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더듬거리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투박한 남자의 주먹이 을지마사의 멱살을 움켜 쥐었다 그러고는 을지마사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거머쥔 그 사내는 눈알을 뛰룩뛰룩 굴리며 을지 마사에게 고함을 질렀다 "솰라 솰라..." 을지마사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말이었다. 그러나 을지마사도 뚝심으로 버텄다 그 불한당 같은 중국 사내는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고개를 돌려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두 놈이 더 달려오더니 을지마사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장막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을지마사는 사내들에게 에워싸여 발버둥쳤지만 한꺼번에 여러 놈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이내 을지마사의 윗저고리가 터져 소매가 나불거리고, 얻어맞은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을지마사도 마을에서는 힘깨나 쓰는 젊은이였지만 불한당 같은 사내들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을지마사는 장막 밖으로 끌려가면서도 애타게 소리쳤다. "처녀, 처녀 ? 그때 가냘픈 몸매의 처녀가 고개를 들고 을지마사를 바라다 보았으나 을지마사의 몸은 순식간에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상태였다. 다행히도 장막 밖으로 끌려 나온 을지마사 뒤에 버티고 선 사람이 있었다. 을지마사의 행동을 처음부터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아소미네였다. 아소미네는 을지마사의 들뜬 행동을, 그 나이 의 총각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앓는 열병쯤으로 치부하고 혼자서 미소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장막 속으로 사라진 을지마사가 좀처럼 나오는 기미가 없자 슬그머니 불안해져서 장막쪽으로 다가와 있었다. "을지마사? 아소미네는 을지마사의 몰골을 보고 기가 막혔다. 그는 욱하는 성질을 못 이겨 을지마사를 끌고 나온 중국인들에게 대뜸 덤벼들고 싶었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생판 낮모른 장안 땅에서 불한당 같은 놈들과 정면대결을 해보아야 쓸데없는 짓일 뿐이었다. 아소미네는 장막 밖으로 내팽개쳐진 을지마사를 업고 집으 로 향했다. 아소미네 자신도 을지마사처럼 젊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애태웠던 시절이 있었다 인간이 사는 곳에서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건만 사랑이 저절로 움터 오고, 그 사랑이 쌓이고 쌓여 넘칠 때쯤 되면 혼자서 감당하기 버거운 큰 시련과 갈등을 격어야만 했다. 자모와 나라 사이의 딸 나데는 열여섯이 넘어서자 미색이 완연했다. 나데가 색동옷을 곱게 받쳐 입고, 빨간 댕기 나풀거리며 동네길에 나타나면 동네 총각들은 숨이 꺽 막혀를 똑바로 바라다볼 수조차 없었다. 얼마나 많은 총각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떠올리며 잠 못 이루는 밤을 지새워야 헷는가 말이다. 아소미네는 막연하게 이성을 느끼는 열두어 살 무렵부터 나데가 좋았다. 천애고아인 아소미네에게 있어 나데는 인간적인 정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소미네는 들이나 산에 가서 일을 할 때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보면 가져다가 어린 나데의 손에 쥐어 주곤 했다. 그러나 나데의 나이가 점점 차면서 처녀티를 보이자 아소미네는 나데가 자기가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천애고아인 자기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다른 집의 잘난 총각들이 나데를 서로 차지하려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아소미네가 잔일을 해주며 밥을 얻어먹고 있던 고사원의 큰아들 고지우, 고구려 유민의 원로 중의 하나인 아대수미의 손자 아대자도는 공공연하게 매파를 보내 중매를 넣었다. 또 처녀가 된 나데는 나데대로 주위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옛날부터 오누이처럼 지내던 아소미네를 짐짓 피하는 눈치였다. 아소미네는 비로소 자신이 외톨이라는 생각이 뼈에 사무치는 듯했다 그런데 하루는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평소에 아소미네가 나데에게 곰살궂게 대하는 것에 쌍심지를켜고 있던 아대자도와 고지우 패거리들이 공연한 생트집을 잡아 아소미네를 축 늘어지도록 패버린 것이다. 몰매를 맞은 아소미네의 얼굴이 금방 퉁퉁 붓고, 코와 입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가친척 하나 없는 아소미네를 편들어 주는 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개처럼 두들겨 맞고 땅바닥에 쓰러진 아소미네 옆에서 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소미네 ?"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가늘었지만 연민이 깔려 있었다. "아소미네 ? 아소미네는 퉁퉁 부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자기 곁에 서 있는 나데를 올려다보았다 아소미네는 순간 수치심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처참한 몰골을 적어도 나데에게만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나데는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자 몸을 구부려 우선 아소미네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과 흙먼지를 닦아 냈다. 아소미네는 몸을 비틀며 거절의 몸짓을 했다. 나데의 동정을 받는 것은 두들겨 맞는 것보다 더욱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득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런 저항 마저도 부질없다는 절망감이 들어 나데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뒤이어 나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우리 집으로 가." 아소미네는 움찔했다 그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이것이 세상의 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아소미네로서는 마땅히 찾아갈 곳도 없었다. 몇 년 동안 일을 해주고 밥을 얻어 먹고 있던 고사원의 아들 고지우도 한패거리가 되어 몰매를 준 이상 그 집으로 다시 기어들어갈 수도 없는 노룻이었다. 나데가 다시 그를 재촉했다. "우리 집으로 가자." "싫어..." 퉁명스럽게 내뱉는 아소미네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서글프게 느껴졌다. "네가 정 싫다면 나 혼자만 갈 테다." 나데는 이제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말 속에는 벌써 상대방을 어루는 여자의 모성적인 본능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아소미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부서져 내리는 듯한 절망감이 차갑게 흘러내렸다. 이런 절망감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아소미네는 부시시 일어났다. 그리고 나데의 시선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고쳤다. 그런데 진즉부터 숨어서 숨을 죽이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눈초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아소미네를 흠씬 두들겨 패준 고지우와 아대자도 패거리들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아소미네를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는 나데의 모습에서 그들은 뭔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들의 가슴속을 쓸고 내려가는 것은 좌절감이었고 패배감이 었다. 이윽고 나데의 청을 완강히 뿌리친 아소미네는 주강 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힘없이 발걸음을 돌리는 나데는 무거운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내가 아소미네에게 천애고아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깨닫게 해준 건 아닐까? 그날 밤 아소미네는 끝내 마을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밤이 이슥하도록 마을에는 꺼지지 않은 등불이 하나 있었다. 나데는 뜬 눈으로 밤을 밝혔다. '이제 나데도 다 컸구나.' 건넌방에서 잠못이루는또한명의 여인은어머니 나라였다. 지난 세월을 마치 무엇에 쫓기듯이 살아온 나라는 비로소 자기의 젊었던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포로 수송선에서 반란이 있었던 날 밤,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 언덕에 자모와 나란히 누워 자기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나데만할 때 그녀는 사랑하는 자모에게 앞으로는 그의 누이도, 어머니도 또 그 밖의 모든 것이 다 되어 주겠노라고 다짐을 했었다. 덧없이 지나가 버린 세월의 무게가 그녀의 가슴을 짓눌러 왔다. 마을의 지도자인 자모는 다음날 아침 온 마을 사람들을 풀어 아소미네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어디서도 아소미네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날도 아소미네를 찾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날 해질 무렵, 주강을 거슬러 40리나 떨어진 강변에 기진해서 쓰러져 있는 아소미네를 발견했다. 아소미네가 아버지 자모와 마을 사람 등에 업혀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 나데는 다리가 후들거림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마을 사람 등에 업혀 늘어져 있는 아소미네가 아니고 아버지 자모의 얼굴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금 세 눈물이 그렁해진 나데의 눈길은 한참을 그렇게 아버지를 쫓고 있었다. 거기엔 아버지에 대한 끝없는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뒤이어 나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살아 있나요?" 평소 침착한 나라도 경황이 없었다. 사실 아소미네가 살아 있느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 풍속으로는 밖에서 숨을 거둔 시신은 결코 집안으로 들이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세월은또흘러갔다 몇 년 후자모가 잃어버린 조국 고구려를 회복하-다고 군대를 이끌고 주강을 내려가고, 또 몇 년 후 사실상 마을의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던 나라를 돕고, 집안의 힘든 일도 챙기고 있던 아소미네는 오누이처럼 지내던 나데와 식을 올렸다. 원래 고구려 사람들은 남녀가 서로 눈이 맞아 정이 나면 부모들에게 알리고, 양가 부모들이 좋은 날을 잡는다. 그리고 신랑집에서는 고기와 술을 마련해 미리서 신부집으로 보낸다. 그날 해가 질 무렵이 되면, 새옷을 차려입은 신랑이 농사지을 연장을 챙겨 가지고 신부집으로 찾아가 대문 앞에 꿇어앉아 재워줄 것을 간청하는 것이다. 드디어 신부 부모로부터 허락이 떨어지면, 신랑은 신부집 안으로 들어가 주안상을 받고, 밤이 이슥해지면 신부집 뒤뜰에 새로 지어 놓은 조그만 사위집으로 들어가 애태우던 신부와 한몸이 된다. 그리고 신랑은 첫아이를 낳아 이 아이가 클 때까지 몇 년 동안 처갓집에서 살며 처갓집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해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소미네와 나데의 경우는 이미 오랫동안 한가족처럼 지내온 터라 새삼스럽게 격식을 차리기도 쑥스럽고, 또 가족도 없는 아소미네의 형편으로는 이런 예식을 차릴 수도 없었다. 그날 밤 신방에 누운 나데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처음으로 나데의 몸을 가리고 있던 겉옷들이 하나씩 벗겨져 나갈 때 아 소미네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한집에서 몇 해를 함께 살았으면서도 미처 알지 못했던, 막연하게 상상으로만 그려 왔던 나데의 황홀한 자태가 비로소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아소미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데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그런데 어쩌자고 을지마사는 당나라 서울 장안에까지 와서, 유랑극단에서 춤을 추는 고구려 처녀에게 첫눈에 정이 나고, 또 그 옛날 자기처럼 흠씬 두들겨 맞고 운신도 못 하는 지경이 된것일까. 을지마사를 등에 업고, 웡의 집으로 돌아온 아소미네는 을지마사를 방에 누였다. 그리고 부기를 내리기 위해 계속해서 냉찜질을 해주면서 비로소 아소미네는 생각했다. '그렇다. 서둘러 장안을 떠나자.' 물론 을지마사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문득 장안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는 일말의 자책감이 들었던 것이다. 아소미네가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된 동기가 의외로 쉽게 찾아왔다. 이튿날 오후 아소미네가 잠간 볼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 온 사이 응당 자리에 누워 있어야 할 을지마사가 없어졌다. 성치도 않은 몸을 하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소미네는 우선 집안 구석구석을 찾다가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저잣거리로 달려갔다. 아소미네가 고구려 유랑극단 장막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아소미네는 그 자리에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을지마사가 전날처럼 중국인들에 의해 질질 끌려 나오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전날 얻어맞은 몰골이 말이 아니어서 그랬던지 중국인들에게 다시 심하게 얻어 맞지는 않은 듯싶었다. "을지 마사!" 을지마사는 아소미네를 보자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을지마사는 밤새 온몸이 쑤셔 신음을 토해 내면서도, 통증이 좀 가라앉는가 싶으면 고구려 처녀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정오쯤 되어 마침 아소미네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그는 곧장 저잣거리로 내달렸던 것이다. 그가 구경꾼을 헤치고 무대 가까이 이르렀을 때 여전히 긴 속 눈썹을 내리깔고 춤을 추고 있는 처녀가 거기 있었다. 을지마사는 금방 넋을 잃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순간적으로 찌푸러졌다가 다시 펴졌다. 여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자기를 바라다보고 있는 을지마사를 의식한 것임이 분명했다. 춤을 추며 오른쪽으로 빙그르 돌던 그녀가 맞은편 벽면에 이르렀을 때였다. 좀처럼 치켜뜰 것 같지 않던 그녀의 시선이 짧은 순간 을지마사의 얼굴을 주시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다시 아래로 내려간 그녀의 시선은 한곳에 붙박혀 움직일 줄 몰랐다. 그녀는 무슨 상념에 빠져 있는 것일까. 을지마사의 가슴이 무섭게 요동쳤다. 이윽고 을지마사는 춤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뒤 가리지 않고 어제처럼 장막 안으로 들어서 버린 것이다 "아..." 장막 안으로 불쑥 들어선 을지마사를 본 처녀의 입에서는 나지막한 신흠이 나왔다. 그러나 을지마사는 다짜고짜 처녀 앞으로 다가가 열에 들뜬 목소리를 토해 냈다. "나 고구려 사람 을지마사요." "그대가 보고 싶어 다시 찾아왔소.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알듯 말듯한 한 소리가 나왔다. "미안해요." "그대 이름이 뭐요? 이름을 알고 싶소." "소녀는 여옥이 라고..." 그대가 사는 곳이 어디오? 여옥? 그대를 다시 만나고 싶소. 을지마사가 다시 한 번 다그쳤다 어서 그대가 사는 곳을 알려 주시오. 순간 무슨 말을 할 듯하던 여옥은 굳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쩌면 여옥이 한마디로 대답하기에는 벅찬 긴 사연이 잇는지도 몰랐다. 다음 순간 우르르 몰려든 사내들이 을지마사의 어깨를 낚아챘다. "솰라 솰라..." 어제처럼 억센 주먹에 얻어터진 을지마사는 다시 장막 밖으로 내쫓겼던 것이다. 그날밤 아소미네는 웡이 퇴청하기를 기다려 그의 방으로 찾아 갔다. "아니 , 내일 장안을 떠나신다구요?" 월도 아소미네가 떠나리라고 예상했었지만 막상 내일 떠난다니 조금은 의아스러웠다 더구나 운신도 못하고 있는 을지마사를 데리고 먼길을 간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소미네의 결심은 굳었다. "그럼 어디로 가시렵니까? "농우 쪽으로 가보려 고 합니다." "농우? 그쪽 길은 산세가 아주 험합니다만은..." 사실 장안에 온 후 얼마 동안은 다시 주강 남쪽 마을로 되돌아 갈까 하고 생각도 했었지만, 뜻밖에도 웡에게서 고구려 포로들의 뒷소식을 자세히 듣고 난 후 생각을 바꿨다. 그냥 마을로 되돌아가 보았자 장안까지 멀리 찾아온 보람도 없고, 마을 사람들의 실망한 얼굴을 대할 것을 생각하니 이래저래 난감하기만 했다. 그래서 이왕 다른 지역의 고구려 포로를 살피러 갈 바에야 보장왕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죄수로 붙들려 와서 살고 있다는 농우 쪽으로 가보고 싶었다. 침소로 돌아온 아소미네가 계획을 털어놓자 예상했던 대로 을지마사가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아소미네님, 그렇게 빨리 떠나려구요? 며칠만 더 머무를 순없겠는지요? "을지마사! 주강 남쪽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아라. 우리가 이렇게 허송세월을 하고 있을 땐가를..." 아소미네의 엄한 말에 을지마사는 더 이상 대꾸를 못했지만 밤새 자꾸만 뒤척이는 것이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눈치였다. 다음날 아침 작별할 때 웡은 아소미네와 을지마사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서 새옷과 신발 그리고 상당한 노잣돈을 내놓았다. 그리고 형편이 여의치 않거든 다시 장안에 들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아소미네는 먼길을 가자면 꼭 필요할 것 같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웡의 친절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웡의 집을 나와 주작로에 들어서자 을지마사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 아소미네에게 간절한 청을 넣었다. "아소미네님, 고구려 처녀와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음..." 아소미네는 을지마사의 한 눈빛을 보자 차마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저잣거리로 돌렸다. 두 사람이 저잣거리에 거진 다 이르러서였다. 앞서가던 을지마사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다. 금세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뒤따르던 아소미네도 무슨 일인가 싶어 앞을 바라보니 응당 그곳에 있어야 할 가설무대가 보이지 않았다 장막도 언제 치워 버렸는지 공터에는 말뚝 몇 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체 하룻밤 사이에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망연자실하고 서 있던 을지마사가 이내 털썩 그 자리에 퍼질러 주저앉아 버렸다. 아소미네도 상심하고 있는 을지마사가 가엾게 생각되었다.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지난 넉달 동안 갖은 고생을 함께한 처지였다. "을지마사?" 넋을 놓고 있는 을지마사에게 무슨 소리가 들릴 까닭이 없었다 "을지마사? 아소미네는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그제서야 을지마사는 풀죽은 얼굴을 아소미네 쪽으로 돌렸다. "꼭 만나야만 할 사람들이라면 기회는 다시 올 거다." "아소미네님, 어디로 가면 여옥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 여옥이가 자꾸 생각나서 견디기 힘들어요." "아마도 네가 그 처녀를 꼭 필요로 할 때 만남을 이를 수 있을 거다." 을지마사는 뜬구름 잡는 듯한 아소미네의 말에 금세 얼굴색이 변하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왜? 너는 그 여옥이라는 처녀와 언제나 함께 있는데..." "함께 있다니요? "서로 헤어져 있어도 마음속에서는 함께 자라나는 것이 있단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거지" 이윽고 을지마사는 조금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글쎄요 ." 을지마사는 아소미네가 들려주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살다 보면 어느 땐가 여옥이라는 처녀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에 막연하게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때 두 사람의 거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저자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던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노파 하나가 드디어 확신이 선 듯 을지마사 앞으로 걸어 왔다. "당신들은 고구려 사람?" 웬 노파가 다가와 불쑥 말을 건네자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화들짝 놀랐다. "예 그렇소만, 댁네는 뉘시오? 그들이 고구려 사람임을 확인한 노파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어서 저고리 소맷자락에서 봉함된 한 통의 편지를 꺼내더니 을지마사에게 내밀었다 "여옥이가 전해 달라고 해서 당신네들을 기다리고 있었소." "그럼, 당신은? "여옥이가 묵고 있던 객사의 주모지요." 을지마사가 못 참겠다는 듯이 다그쳐 물었다. "그럼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소?" "오늘 아침 낙양으로 떠났습니다요." "대관절 여옥이는 어떤 처녀요? 또 부모는 누구요?" 노파는 을지마사가 채근을 하자 한참을 망설이더니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소미네와 을지마사가 예측했던 대로 여옥은 노예로 팔린 어느 고구려 포로의 딸인데 성정이 아주 착한 아가씨라고 했다 속전을 내고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지금 유랑 가무단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노파는 더 이상 할말이 없다는 듯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되돌아섰다.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말을 잃고 노파의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라 잃은 백성들의 한없는 서글픔이 거기 있었다. 을지마사는 노파가 놓고 간 여옥의 편지를 열어 보았다 첫눈에도 예쁘게 쓴 글씨였다. 을지마사님이라고 하셨던가요? 저 때문에 많이 다치셔서 미안합니다. 빨리 회복되셔야지요. 저는 또 다른 곳을 향해 떠납니다. 혹시 저를 그때까지 잊지 않으신다면, 내련 한가윗날 농우 댁에서 만나뵐 수 있을는지요. 여옥 여옥의 편지는 몇 줄 되지 않았지만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을지마사는 사라져 버린 여옥과의 사이에 실낱같은 끈을 잡았다는 안도감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을지마사는 여옥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거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농우의 고사계란 사람은 누구며 하필이면 왜 내년 한가윗날이란 말인가. 곁에 여옥이 없으니 자세한 것을 물어볼 수도 없는 노룻이었다. 그나마도 다행인 것은 농우가 자기네들이 가고 있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을지마사는 다시 한번 마음을 굳혔다. 그래, 농우로 가자. 농우로 가면 또 무엇인가 알아지는 것이 있겠지' 주작문을 통해서 장안을 빠져 나간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서쪽으로 곧게 뻗쳐 있는 길을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그들이 열이틀을 걸어 원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주위 풍경들이 달라지고 있었다 장안과 낙양이 속해 있는 중국 대륙의 심장부 경기 지방에서 볼 수 있었던 너른 평야와 한가로운 농촌 풍경은 점차사라지고 대신 자갈과 모래만이 쌓여 있는 삭막한 구룽들이 나타났다. 구릉 위에는 수목 대신 잡풀들만 무성했다. 어떤 날은 몇십 리를 가도록 인가가 보이지 않아 염천에 타는 목을 침을 삼켜 달래 가며 다음 마을이 나올 때까지 기진한 상태로 걷고 또 걸었다 요행히 수백 마리씩 양떼를 몰고 가는 유목민을 만나면 그들의 천막 안에 기어들어가 발치에서 잠을 자가며 다음날 새벽길을 재촉해 갈 수 있었다. 원이라는 시골읍을 출발한 지 엿새째되는 날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뜻밖의 사태에 부딪치고 말았다. 인적이 드문 미지의 땅을 단 두 사람이 여행하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전날 해거름에 양치기 가족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은 아소미네와 을지마사가 낯선 여행객인데도 말젖과 양젖으로 만든 음식물을 주는 등 후한 대접을 했다. 그들의 생김새는 얼굴이 길고, 동그란 눈에 코가 유달리 커서 생김새가 중국 사람들과는 많이 달랐다. 오히려 고구려 사람들과 더 닮아 있었다. 양을 몰고 떠돌아다니는 그들의 험한 생활에 비해 마음씨는 퍽 따뜻했다. 저녁을 먹고 난 다음 한식경이 지나자 또 따끈한 차를 끓여 내놓았다. 이윽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주인 남자가 느닷없이 자기의 마누라를 데리고 와서는 아소미네와 을지마사 둘이서 번갈아가며 데리고 자라는 시능을 했다. 아소미네는 자기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마누라를 주어 대접을 하는 위구르족들의 풍속을 알 까닭이 없었다. 기겁을 한 아소미네가 겨우 주인 마누라를 되돌려보낸 다음에야 두 사람은 잠이 들 수가 있었다. 다음날새벽이었다 아소미네와 을지마사가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 마악 천막을 빠져 나오는데 어느결에 뒤따라나왔는지 주인 남자가 두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는 아소미네는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주인 남자는 뒤따라와 앞을 가로막고는 손을 들어 연분홍 빛으로 물들어오는 새벽 하늘의 비늘구름 조각들을 가리키며 빠른 소리로 지껄여 대는 것이었다. 위구르족 남자와 말도 통하지 않고, 글씨를 써도 의사가 통하지 않으니 서로가 답답할 노릇이었다 얼핏 그 양치기 남자의 지껄이는 말이 자기네들을 못 가도록 만류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아소미네로서는 별별 생각이 들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을 끌어와 자기네들의 짐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닐까? 당시에는 사람도 죽여 만두 속에 넣어 빚어 먹는 세상 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친절했던 양치기 가족이 설마 아소미네는 고개를 저어 나쁜 생각을 떨쳐 버렸다. 어쨌든 이렇게 좋은 날에 그 집에 더 이상 머물러 신세질 이유도 없어 계속 앞을 가로막는 주인 남자를 뿌리치고 출발을 했다. 여느 때처럼 그날 오전 내내 쉬지 않고 걸었다. 농경지대에서만 살아온 아소미네가 자신의 커다란 실수를 깨달은 것은 길을 따라 50년쯤 나아가고 있을 때 였다. 해가 중천에 떠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땅 위의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 후로 한식경쯤 지났을까 이상스럽게도 주위가 차츰 어두워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멀리서 바람이 일고 모래가 날리고 있었다.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조금 지나면 괜찮겠지하는 생각에 길을 재촉했다. 그러나 모래 바람은 시간이 지날 수록 윙윙 소리를 내며 점점 거칠어만 갔다 '아무래도 안 되겠는 걸.' 아소미네와 을지마사가 눈을 두리번거리며 피할 곳을 찾았다. 그러나 인가도 수목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몸을 피할 장소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아소미네와 을지마사가 허둥대는 사이 온 천지가 가는 모래로 뒤덮여 캄캄해져 버렸다 두 사람의 주위는 오직 미친 듯이 울부짓는 바람소리와 날리는 모래뿐 숨을 쉴 수도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을지마사와 아소미네는 강풍에 날려 가지 않으려고 서로를 꽉 껴안고서 납작 엎드렸다 모래 때문에 숨이 컥컥 막히자 보따리에 코를 쑤셔 박았다 그래도 코 속이 매캐하게 막혀 왔다. 시간이 분초를 다투며 죽어 가고 있었다 어느덧 주위에는 모래가 차 올랐다. 그들은 몸을 요동치며 쌓이는 모래를 털어 내려 발버둥거렸지만 두 사람의 몸뚱이는 모래 무덤 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안는 실현의 세월 산남에서 사라진 고구려 포로들을 찾아 나선 당나라 정벌군은 그때쯤 무주를 지나 주강 근처에 와 있었다. 그들의 향도는 고구려인 이춘룡이었다. 그는 고구려 포로들이 산남으로 호송되어 갈 때 당나라의 밀정이 되어 고구려 유민들을 이간시키려고 자모를 괴롭혔던 바로 그자였다 당시 춘룡을 꼬드겼던 소서상달은 일찍 죽었지만 이춘룡은 나이가 70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당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고구려 포로들을 정탐하러 다니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들의 수색 작전은 계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2만 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온 당장 예약수는 훗날 당나라 조정의 상서우승에까지 오를 만큼 꾀가 많고 교활한 자였다. 그는 주강 부근에 도착하자 자기 휘하 2만명의 당군을 천 명씩 20개조로 나누었다. 다음 일렬 횡대로 세워 그 길이가 300리에 뻗치도록 했다. 즉 물샐틈없는 그물 작전을 폈다. 군사 배치가 끝나자 당장 예약수는 비장들을 모았다. "너희들은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을 향해 가며 훌는다. 그러나 이런 무인지경에서 실수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약수의 다음 말은 빈틈이 없었다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사방을 살펴보아라 주위가 수목이 무성해 마을이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만약 밥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면 반드시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인즉 지체없이 그 위치를 보고하도록..." 부장 우문응이 내심 우려의 빛을 띠며 예약수에게 지난날을 상기시켰다 "예 장군! 옛날 고구려의 명장 자소에게 당군 3만 명이 전멸했던 일을 유념해야 할 것이오." "나도 황제에게서 직접 밀명을 받은 것이 있소. 그래서 매사를 조심스럽게 처 리하고자 하오," 당장 예약수는 교활한 만큼 매사에 조심스러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고구려 유민들을 발견한다 해도 섣불리 선제 공격을하지 말도록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이번 싸움은 이기는 데 그치지 않고 고구려 유민들을 어린애들까지 깡그리 잡아죽이는 작전이었으므로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사실 중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항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일지라도 남김없이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자기네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후세까지 기록을 남겨 두기도 했다. 당태종이 고구려의 안시성을 구원하러 온 고연수군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은 말갈병을 흙 속에 생매장해서 죽여 버렸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적어 놓은 것은 차마 인간의 탈을 쓰고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더욱더 끔찍한 학살 기록 하나를 더듬어 보자. 말갈병 3300명을 흙구덩이 속에 묻어 죽였다는 것은 말갈이 이민족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런데 중국인들은 자기네 동족도 걸핏하면 참혹하게 죽였다. 바로 그 유명한 유비, 관우, 장비. 제갈공명이 활약했던 삼국시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천성이 잔혹한 조조는 비무장한 백성들을 무려 수십만 명이나 몰살시켜 매장하는 바람에 시체로 인해 강물이 막혀 흐르지 못하고 텅빈 동네는 유령이 떠돌게 만들었던 것이다. 주강 남쪽의 고구려 유민들은 잔혹한 당군이 자기네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근처에까지 밀려와서 물샐틈없는 작전을 펴고 있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설흑 알았다 하더라도 고구려 유민들은 옛날의 그들이 아니었다. 마을은 손 하나 쓸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처음 자모가 마을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고구려로 향한 후 마을 사람들은 한동안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당시의 어린애들이 어른들이 되었건만 전날의 자소나 자모에 필적할 만한 지도자가 나오지도 못했고, 또 마을 사람들은 바깥 세상과 단절된 채 평화롭게 살았으므로 안이한 생활 습관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4만 명에 이르는 고구려 유민 가운데 마을에 변고가 있을 때를 대비한 경비 목적의 자경단 300여 명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이들은 전후세대여서 자기네 부모들의 나라 고구려에 대한 애착이 적었고 거기다가 성장하면서도 한족들에게 멸시를 당해본 적이 없어 투철한 민족의식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자모의 아내 나라는 마을의 원로회의에서 이 문제에 대해 몇번이나 거론했었다 그러나 자모를 따라간 남편과 자식들 때문에 한이 맺혀 살아온 사람들이라 손자들까지 그렇게 만들 수는 없다고 강한 반발을 보여 나라로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이처럼 그들의 세월이 잠을 자고 있었다면, 상대는 오래 전의 참패를 기억해 내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고구려 유민들이 다시 깨어날 수 없는 영원한 죽음의 세월속에 묻어 버리려고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70년을 버터온 고구려 유민들의 죽음도 이제 시시각각 마지막을 향해 조여 오고 있었다. 그런데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보면 큰 재앙을 목전에 둔 인간에게는 정녕 묘한 예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산자와 죽은 자 사이에 시공을 초월한 어떤 교감이 있는 것일까. "나유야, 어젯밤 꿈이 아무래도 이상하구나." 그날 아침 나라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나유에게 말을 건넸다. 나유는 아소미네와 나데 사이에 난 2남 1녀 중 맏딸 그러니까 나라에게는 큰손녀가 되는 셈이었다. 혼자서 늙어 가는 나라가 외로워할까 봐 아소미네와 나데는 큰딸 나유로 하여금 늘 할머니 곁에서 시중을 들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 무슨 꿈인데요?" 나유도 이제 18살, 꽉찬 나"1였다. 미색이 나데의 처녀 시절못지않아 복숭아꽃처럼 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글쎄, 네 할아버지가 혼자서 마을로 돌아왔지 뭐냐." "정말? 그런데도 할머니는 붙들지도 않으셨어요?" 채 버선발로 기를 쓰고 뒤따라갔지만 끝내 붙잡을 수가 없어 애만 태우다가 꿈을 깼어. "어휴, 우리 할머니도 퍽이나 싱겁다." 그날 아침, 아침상을 물린 나라가 논에 나가 보려고 마악 문밖을 나설 때였다. 마을 사람 몇 명이 나라의 집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주강 나루터에서 배를 부리는 남자 세 명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강 건너로 농사를 지으러 가거나 산과실을 따러 갈 때 강을 건네 주기도 하고, 평소 때는 주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곡식과 바꾸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라의 집에 이르자 대뜸 큰 소리로 외쳤다. "나라님, 나라님 계신가요? "자네들 왔구먼. 아침부터 무슨 급한 일인가? 나라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물었지만 어젯밤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해서 그들이 아침부터 찾아온 것에 내심 불안했다. "예, 다름 아니라... 오늘 아침 고기를 잡다가 이런 것을 건졌습니다요." 세 사람 가운데 그 중 나이가 들어 보이는 땅딸막한 키에 네모진 얼굴을 한 사내가 구덕에 넣어 가지고 온 물건들을 꺼내 보였다 뱃사공들이 내민 물건들을 본 나라의 안색이 싹 변했다. 이것은 남자 미투리가 아닌가? 그리고 이건 음식 찌꺼기들인데... 그럼? "예, 아무래도 저 강물로 거슬러올라가면 사람이 사는 듯합니다." 아닐세. 마을과 아주 가까운 곳에 사람들이 있는 것 같네. 나라의 말을 들은 나루터 남자들이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눈을 휘등그레 떴다 그들은 30여 년을 고기를 잡으며 강물을 오르내렸지만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본 일이 없었다. 나루터 남자들과는 다르게 나라의 눈빛이 의혹으로 빛났다. 그녀의 머리속에 어떤 가능성이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여보게들, 아무래도 보통일이 아니네. 미투리는 아주 먼곳에서 떠내려 올 수도 있지만, 음식물 찌꺼기가 아직도 상하지 않은것을 보면 마을과 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있어. 나라는 일단 나루터 남자들을 돌려보내 놓고, 급히 자경단 30명을 모이게 해 주강 일대를 수색하도록 떠나 보냈다. 아니나다를까, 그들이 떠난 지 한식경도 안 되어 자경단원들이 숨이 턱에 차서 되돌아왔다 "나라님 ! 큰일났습니다요." 나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웬 군사들이 이산 저산마다 가득하고, 함께 갔던 단원 몇 명 군인들에게 붙들렸습니다요." 나라는 눈앞이 아찔했다. 지난 40년 동안 고구려 유민들)숨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요행수였다. 당시 세상 돌아가는 사정으로 보면 당연히 올 것이 온것에 불과했다. 나라는 난생 처음 당해 보는 급박한 상황에 가슴이 벌렁거리고,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곧 냉정을 되찾아 마을의 원로들을 급히 불렀다. 곧이어 긴급 소집에 놀란 원로들이 헐 레벌떡 모여들었다. 그들도 나라의 설명을 듣고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나라의 집에 모인 원로들도 경황중이라 의견이 제각기 달랐다. "나라님, 차라리 항복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대자도의 할아비가 되는 아대수미의 말이었다 또 고지우의 아버지 고사원은 한술을 더 떴다.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군사들을 잘 대접하면 별일 있겠습니까? 그들의 의견이 이렇게 기우는 데도 일리는 있었다. 그들은 모두 소년 시절에 포로로 잡혀와 갖은 고생을 겪었고, 특히 산남시절에 무서운 기아 속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뼈아픈 기억이 있었다. 이제 주강 남쪽으로 내려와 슬하에 손자들까지 두고 풍족하게 살고 있는데, 이러한 풍요를 버리고 다시 참담한 고생길로들어서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능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만은 시종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만약마을을 에워싼 군사들이 당군이라면... 그들과 저 산남에서 처절하게 싸웠던 기억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좌중을 둘러보는 나라의 목소리는 침통했다. "아무래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소. 일단 저들을 피했다가 침착하게 대비책을 강구해 봅시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떻소? 아대수미가 불끈하고 나섰다. "여름 농사 다 지어 놓고 또 어디로 가서 고생을 한단 말입니까? 이래저래 좌중은 선뜻 나라의 말에 동의하고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나라는 평소와는 달리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마을에 남고 싶은 사람은 돌아가서 저들을 대접할 음식 장만이라도 하고, 나를 따를 사람은 이 자리에 남아 주시오." 나라의 말이 끝나자 세 사람 중 두 사람꼴로 엉거주춤 방문을 열고 나갔다 나라는 이제 더 이상 꾸물거릴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방안에 남아 그녀의 얼굴만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라의 말을 듣고 있는 원로들의 얼굴에 일순간 긴장이 감돌았다. 그리고 나라의 다음말은 방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얼어붙게 만들었다. "여러분!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생이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부디 살아 남아 훗날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나라는 말을 마치자 곧 조편성을 했다 우선 3개조로 나누었다 이 3개조는 주강을 기점으로 1개조씩 마을을 빠져 나가 동 서 남쪽을 향해 뿔뿔이 도망치기로 했다. 나라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모두들 밀림 속에서 몸을 숨기며 가면 쉽게 붙잡히지는 않을 것이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불을 피워 연기를 내지 말도록. "그럼 언제 어디서 우리가 다시 만나지요? 마을의 장로 온수곤수가 허옇게 센 수염을 떨며 물었다. 어차피 우리가 살 수 있는 땅은 이곳에 없소. 그날이 언제을 줄은 모르지만 저 남쪽 땅에서 다시 만납시다." 사실 나라도 남쪽 땅이 어떤 곳인지 몰랐다. 막연하게나마 당나라와는 한발짝이라도 더 멀리 떨어진 곳이라야 자기네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렇게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평소에 생각이 깊은 온수곤수가 조실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나라님. 왜 우리가 함께 가지 않고 각기 떨어져 가야만합니까?" 나라는 이 질문을 받고 막상 대답을 하려니 자신의 목이 먼저 메어 왔다. 그래서 잠시 끓어오르는 가슴을 가라앉힌 후 되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해나갔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몰려다니면 우선 적에게 발각되기 쉽고... 또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모두들 마른침을 삼키며 나라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귀를 기울였다. "여 러분들, 꼭 그 까닭을 들어야겠습니까?" 나라는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듯 좌중을 향해 되물었다. 모두들 침묵했지만 그들의 시선은 나라에게 여전히 붙박혀 있었다. "좋아요. 그럼 말하지요. 우리 중에 누군가는 살아 남아야 합니다. 동쪽으로 간 사람이 되었건 서쪽으로 간 사람이 되었건... 아마도 누군가는 당군의 표적이 되어 더 참혹한 꼴을 당하겠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인해서 생명을 보전하는 사람도 생길 것이오. 아무튼..." 좌중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색이 변했다 나라의 목소리만이 홀로 침묵을 일깨우고 있었다. "전쟁에 져서 이런 오지에까지 끌려와 모진 목숨을 보존하고 있는 고구려가 이 세상에서 씨도 없이 사라져 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이와 같이 결정했소." 나라의 비감어린 말을 듣고 있는 좌중은 저마다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때 좌중의 침통한 분위기를 깨고, 마을의 장로 자마우치가 마지막 질문을 던져 왔다. "그럼 언제 어떻게 마을을 떠나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오늘 아침 마을 가까운 곳에서 당군의 자취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어쩌면 우리들이 탈출할 수 있는 통로는 이미 모두 당군에게 봉쇄되어 버렸는지 모르겠소. 이제 하늘의 뜻에 맡길 도리밖에 없지요. 그러나 우리가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촌각을 다투어 마을을 빠져 나가는 것 한 가지뿐입니다. 반 시각 후에 출발하기로 합시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시바삐 돌아가서 간단한 짐을 꾸리고, 식솔들을 챙겨야만 했다. "잠간만!" 서둘러 문지방을 넘어서는 그들의 등뒤에 나라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같은 시각에 출발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산지사방으로 흩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해 두시오. 훗날 밝혀진 일이지만 그날 나라의 판단은 적어도 그 급박한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당군이 고구려 마을을 찾아낸 것은 그 전날 해거름이었다. 그러나 산남에서 자소에게 3만 명이나 되는 당군이 몰살당한 사실을 익히 아는 당장 예약수는 매사에 조심스러웠다. 적어도 당나라 조정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자신이 한치의 실수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그길로 단박에 고구려 유민 마을을 박살내지 않고, 다음날 날이 밝은 다음에 고구려 마을의 방비 상태를 세세히 살피고 난 연후에 군대를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당나라 밀정 이춘룡이 이견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마을이 무방비 상태에 있는 듯합니다. 원래 고구려 종자들은 산 속에서 살아놔서 도망을 잘 가니 더 기다릴 것 없이 단숨에 짓밟아 버리는 것이 상책입니다요." "그래도... " 당장 예약수는 이춘룡의 말을 듣고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조진의 3만 군이 무주 남쪽 산남의 고구려 유민을 토벌하다가 몰사당한 일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까 다음날 진시 (아침 8시경)에 당군의 숙영지 가까이서 고구려 젊은이 1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포로를 심문하고 나서야 당장 예약수는 고구려 유민 마을이 이춘룡의 말대로 무방비 상태임을 알았다. "어허 ! 명불허전이었구나." 당장 예약수는 기쁨이 충만했다. 이제 군대 한 명 없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조리 잡아 주리를 트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워진 것이다. 대항할 수도 없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두 잡아죽이고 장안으로 당당히 개선하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우선 고구려 유민들의 퇴로를 막아라.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 나갈 수 없도록 그물치듯 대형을 벌려랏." 당장 예약수가 비장들에게 포위 명령을 하달한 것은 그날 사시 (오전 11시경)였다. 2만 명의 당군이 마을 주위를 물샐틈없이 둘러싸 버린다면 고구려 유민들은 독안에 든 쥐새끼나 다름없었다. 사실 나라가 정한 출발 시각도 당군의 공격 시간보다 1시간이 늦은 오시여서 당군이 제때에만 공격했더라면 고구려 유민들은 당연히 몰사를 면치 못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군사 작전에는 때에 따라 조그만 불상사가 생기게 마련이고 이로 인해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는 수도 있다. 예약수가 명령을 하달하고 얼마 안 있어 주강 상류 쪽을 담당 하고 있는 비장에게서 급한 전갈이 왔다 "뭣 ! 강을 건너다가 병사들이 죽었다구? 사실 주강 상류는 강 폭은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물살이 세고 강 복판에 소용돌이들도 많았다 거기다가 병사들은 주로 화북 지방 출신들이어서 물에 익숙하지 못한데다가, 통나무를 잘라다. 엮은 뗏목이 강 복판에 이르러 소용돌이를 만나자 겁먹은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뗏목 한 척이 뒤집혀 버린 것이다. 그걸 보고 잔뜩 겁을 집어먹은 다른 뗏목의 병사들까지 아우성을치고, 순식간에 뗏목 서너 척이 뒤집혀 100여 명의 병사들이 떠내려가는 사태가 일어나고 만 것이다. 예약수는 급히 전군의 도강을 중지시켰다. 그런 다음 부장 우문응을 사고가 난 상류 쪽으로 보내 지휘하도록 했다. 결국 주강 하류 쪽으로 이미 도강해 있던 일부 당군은 그대로 대기시키고, 점심이 끝나는 미시 (오후 2시경)에 다시 총공격을 개시하기로 작전 계획을 변경시킬 수밖에 없었다. 정오가 되어서였다. 당장 예약수가 진중에서 마악 점심식사를 하려는데 주위가 갑자기 소란스러웠다. 이어서 비장 한 명이 헐레벌떡 예약수에게로 뛰어왔다. "예 장군님 , 고구려 유민들이..." "뭐, 고구려 유민들이 어떻다는 거냐?" "막 도망갑니다요." 당장 예약수는 막 밥을 퍼 넣으려던 숟가락을 내동댕이치고 벌떡 일어났다. "도망을 가? 어디로?" "저쪽입니다 " 비장은 주강 동편 하류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예약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구려 유민들을 추격하랏?" 뒤이어 공격 신호인 포성이 펑펑 땅을 울렸다. 중국의 전법은 예로부터 잘 알려진 인해전술이었다. 당군은 일시에 강을 건너 주강 하류 쪽을 향해 개미떼들처럼 몰려갔다. 한편 주강 하류를 따라 동쪽으로 도망을 가는 5천 명가량의 고구려 유민들도 기를 쓰고 달음질을 쳤다. 어른이고 어린이고 할 것 없이 숨이 턱에 닿도록 뛰고 또 띄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질서와 규율 속에서 잘 훈련된 당군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30리쯤 갔을 때 그들의 앞뒤는 벌써 당군에 의해 물샐틈없이 둘러싸인 뒤였다. 고구려 유민들은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고구려 유민들은 가족끼리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부등켜안았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당군들은 고구려 유민들 사이를 이리 저리 비집고 다니며 저항도 할 수 없는 그들의 목을 가차없이 칼로 내리쳤다. 사방으로 피가 튀고 순식간에 무서운 살륙의 현장으로 변해 버렸다. 그 가운데는 허연 수염을 한 노인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오늘 아침 나라에게 우리가 왜 서로 떨어져 도망가야 하는가를 물었던 온수곤수였다. 그는 칼을 받기 직전에 나라의 말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당군의 표적이 되어 참혹한 일을 당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인해 생명을 보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오.' 당군이 젖먹이까지 남김없이 학살한 다음 마을로 들어선 것은 그날 신시(오후 5시경)가 다 되어서였다 그런데 당군은 눈앞에 벌어진 뜻하지 않은 광경을 보게 되었다. "어허, 저것은 또 뭐야?" 이곳 저곳에 흰기가 꽃혀 있고, 더욱 이상한 것은 흰기가 꽃혀 있는 집마다 대문 앞에 음식상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부장 우문융이 예약수를 돌아다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마도 항복을 하는 것 같은데 어찌하시렵니까? "흐흐흐... 내 평생 싸움터에 여러 번 있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다." 예약수의 웃음 속에는 잔혹한 그림자가 숨겨져 있었다. "그래도 항복한 사람들인데..." 우문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예약수가 그의 말을 매정하게 잘랐다 "우 장군은 황제의 밀명을 몰라서 묻는 거요? 뒤이어 당군은 마을을 완전히 포위했다. 당군은 해지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그들은 순서에 따라 마을에 불을 질렀다. 불은 일시에 검은 연기를 내며 타올라 마을을 무서운 기세로 휘감았다. 마을에 남았던 많은 수의 고구려 유민들은 불에 타죽고, 불을 피해 집밖으로도망나온 사람들은 당군의 창칼에 셀려 죽었다. 2만 명에 이르는 고구려 유민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하는 끔찍한 현장이었다. 대대적인 학살은 서산에 노을이 곱게 비칠 때쯤에야 끝이 났다. 그날따라 노을이 유난히 붉었다. 모진 목숨들이 한꺼번에 승천을 한 때문이었을까. 마을 이곳 저곳에서는 타다 남은 잿더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살이 타는 노린내가 마른 공기를 타고 주위에 퍼져 나갔다. 수많은 고구려 유민을 한꺼번에 죽인 당장 예약수의 눈은 살 기로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비로소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이제야 중국 사람들의 원수를 갚았구나." 그때 곁에 있던 이춘룡이 교활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예 장군, 아마도 고구려놈들 중 많은 수가 미리 도망을 쳤을 겁니다 " "그으래 ?" 충혈된 예약수의 눈알이 무섭게 번뜩였다. 이어서 고개를 쳐든 그는 다음 명령을 내렸다. "내일은 아침부터 이 일대를 수색한다." 아비 예불여상은 고구려가 망하는 데 일조를 했고, 자식 춘룡은 망해 버린 고구려 유민들을 잡아죽이는 데 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한편, 그날 정오에 마을을 빠져 나간 고구려 유민들은 가재도구와 어린애들을 데리고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났지만 발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그들은 마을에서 겨우 40리를 벗어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예정대로 당군의 수색이 시작되었다 미시가 조금 지나 남쪽으로 달아나던 자마우치와 마을 사람들 5천여 명이 당군에게 발견되었다. 전날 동쪽으로 도망가다가 붙잡힌 온수곤수 조와 똑같은 살육의 축제가 벌어질 판이었다. 그러나 온수곤수 조와는 달리, 당군의 추격이 가까워진 것을 눈치 챈 자마우치 는 젊은이들을 급히 모았다. "너희들은 젊으니까 빨리 이 자리를 떠라 " 그러나 젊은이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희들도 함께 죽겠습니다" "빨리 달아나! 시간이 없다 " 그래도 젊은이들은 고집을 피웠다. 자마우치는 문득 음성을 낮추어 젊은이들을 타일렀다. "너희들은 꼭 살아 남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먼 훗날 너희들이 우리가 당한 이 한을 풀 수 있지 않겠느냐? 젊은이들도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던지 눈물을 뿌리며 가족들과 헤어졌다 젊은이들이 떠나가고 곧이어 당군은 자마우치의 유민들을 에워쌌다. 동시에 겁에 질린 고구려 유민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자마우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허연 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단군님 그리고 주몽님, 우리의 시련이 끝날 날은 과연 언제옵니까?' 그때 당군 한 놈이 달려들어 자마우치의 가슴팍에 창을 찔러 넣었다. 자마우치는 뒤로 벌렁 넘어지며 하늘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그의 꺼져 가는 망막에 얼핏 누군가의 얼굴이 들어왔다. 만족스러운 듯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춘룡이었다. 자마우치는 가까스로 손을 뻗어 이춘룡의 바짓자락을 움켜잡았다. "이춘룡, 너도... 너도 고구려 사람이 아니었더냐!" 자마우치의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이춘룡이 차갑게 내뱉는 소리가 아련히 들렸다 "나는 너희들과 같은 야만족속이 아니다." 춘룡은 분을 참지 못해 숨이 넘어 가는 자마우치의 목을 발로 힘껏 짓눌렀다. 자마우치는 이내 숨이 끊어졌다. 당군들이 시신을 일일이 확인한 다음 떠나 버리자 주변이 다시 조용해졌다. 자마우치의 용단으로 목숨을 건진 고구려 젊은이들은 1천 여명이 되었다. 그들은 밤새워 밀림 속을 뚫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한편 나라가 이끌고 서쪽 주강 상류 쪽으로 도망간 5천여 명은 온수곤수나 자마우치 조와는 탈출 방법이 달랐다. 나라 조의 유민들은 마을을 벗어나자 곧 서쪽으로 뻗은 주강의 지류를 만났다. 나라의 명령이 곧 떨어졌다 "모두 물 속으로만 걷는다 " "나라님, 물 속으로만 가면 힘이 들어 얼마 가지도 못할 텐데요" 많은 사람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하며 반론을 제기했다."물 속으로 가되 갈대 하나 부러뜨리지 않도록 조심할 것? 나라는 유민들의 불평을 묵살해 버리고 다시 한 번 엄한 명령을 내렸다. 물 속으로만 걸어간 나라의 조는 다른 2개조가 그날 오후 30리를 간 반면 겨우 15리밖에 가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날도 겨우 30여 리를 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교활한 예약수의 눈을 속일 수가 있었다. 풀 하나 누워있지 않고, 나뭇가지 하나 부러져 있지 않아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는 곳으로 수고롭게 군사들을 보낼 예약수가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나라 조는 예약수의 추격망을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70년이 넘게 살아온 주강 남쪽 마을의 고구려 유민들은 단 하루 동안에 3만여 명이 당군에 의해 몰살당하고 5천여 명만이 간신히 목숨을 건져 또다시 남부 중국의 산하를 떠돌게 되었다. 나라 조는 계속 주강의 지류를 타고, 서쪽으로 길을 뚫었다. 이렇게 보름쯤을 더 갔다. 그들은 어느덧 주강 마을에서 400여리나 떨어진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상류 쪽으로 갈수록 산세가 가팔라져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어느덧 주강의 지류는 작은 개울물처럼 졸졸 흘러내리더니 그나마 뚝 끊겼다 그때 그들은 지금의 귀주성 근처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나라는 늙은이와 어린애들까지 끌고 온 마당에 더 이상 간다는 것도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처음부터 목표를 정하지 않고 도망나온 처지에 그들의 행군이 끝나는 곳이 어디라고 딱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라는 지세가 비교적 평탄한 곳을 물색해 일단 정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마침 5월로 접어들어 얼마 안 있으면 우기가 시작될 것이다. 산에서 베어온 대나무와 참나무로 산기슭에 연해 기둥과 벽을 세우고 갈대를 꺾어다 지붕을 얹었다. 급한 대로 거처할 만했다. 다음, 논밭을 일구고 서둘러 곡식 종자를 파종했다.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5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제 와서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 나라는 우선 유민들의 정착에 필요한 일을 서둘러 마무리지었다. 몇날 며칠을 생각한 결과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지난 40년의 무사안일이 바로 죽음을 몰고 왔다는 뼈저린 후회가 가슴을 쳤다. 그래서 나라는 똑똑한 젊은이들을 모아조직을 만들었다. 자소의 딸이자 자모의 아내인 나라에 의해 살아 남은 고구려 유민들은 다시 자소와 자모의 시대로 복귀했다. 마을 젊은이들을 모아 보니 천여 명이 되었다 이들을 갈라 편대를 짜고 이들 중에서 다시 똑똑한 젊은이들을 추려 각 편대의장을 삼아 질서와 규율을 지켜 나가도록 했다 나데의 큰아들 아소수미도 벌써 열여덟 살이 되어 팔뚝에 힘이 올라 편대장이 되었고, 열여섯 살인 둘째 아들 아소대모는 그 밑에서 훈련을 받도록 했다. 나데의 두 아들 외에도 퉁소무, 대우상, 명림오묘, 귀실우오, 고인목, 목도사, 아불화도마, 창조무, 연개수근 등의 젊은이가 각각 100명 남짓의 병사를 거느린 편대장으로 뽑혀 매일같이 고된 군사 훈련을 했다. 그러나 귀주성 오지 속으로 옮겨 앉은 고구려 유민 마을이 매사가 순탄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언제나 3, 40대의 중년층이 일으켰다. 그들은 부모들이 무주에서 주강 남쪽으로 옮겨와 피땀 흘려 살 만큼 지반을 잡았을 때 태어나서 큰 어려움 없이 자란 세대들이었다. 그런데 귀주성으로 옮겨간 후로는 일시에 형편이 달라져 버렸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어려움에 부딪친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불만의 소리가 높아져 갔다. "차라리 주강에 있을 때가 좋았어 ." "그러게 말야. 우리가 고생을 사서 하는 것 아냐?" 처음에는 몇몇 사람들의 불평으로 시작하더니 이윽고 그 화살은 자기네들을 이곳까지 끌고 온 나라에게 향했다. "여자는 역시 여자야. 우리가 너무 경솔하게 행동했던 것 같아." "그렇고말고, 이제라도 전답이 있는 주강으로 되돌아가서 편하게 살자구." 자연 고구려 유민들의 불만은 나라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나라는 그렇지 않아도 사위 아소미네가 밖으로 정탐을 하러 떠난 후 반 년이 지났고, 시름에 잠겨 있는 나데가 못내 안쓰럽게 생각되던 차였다. 나데는 드러내 놓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남편 아소미네가 자기네들이 떠나 버린 주강 마을로 돌아와 자기네들을 찾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으로 매일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그렇다 내일 주강 마을로 사람을 보내 보자. 나라의 결심을 들은 나데는 근심이 활짝 걷힌 듯 얼굴 표정이 밝았다. "네, 어머니. 그러는 것이 좋겠어요." 사실 나라도 한편으로는 어쩌면 주강 마을 사람들이 당나라 군사들에게 항복을 하고, 다시 평화스럽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다음날 5명의 젊은이를 뽑아 지류를 따라 내려가 마을을 정탐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떠난 지 열흘째 되는 날 그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되돌아왔다 모두 다 완전히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나라님! 나라님! 아무도 없어요." "뭐, 마을이 텅 비어 있다구? "아니, 마을이 아주 없어졌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죄다 죽어서 시체만 굴러 다녀요. 아휴..." 젊은이들은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순간 나라는 모골이 송연해지며 온몸의 피가 아래로 빠져 나가는 듯했다. "그래, 좀더 자세히 말해 보아라." 주강 마을에 다녀온 젊은이들의 말은 이러했다. 마을은 온통 불에 타버리고, 이곳 저곳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숨을 쉴 수조차 없더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들짐승과 날짐승들이 버려진 시체를 파먹어 어떤 시체들은 흰 갈비뼈만 앙 상하게 남아 있고, 또 어떤 시체들은 해골만 남아 눈이 움푹 패어 있었다고 했다. 젊은이들은 말을 하면서도 또 한번 몸서리를 쳤다. "그래, 필시 그 많은 사람들이 몰살을 당한 거야." 나라는 마을에 남겠다고 고집하던 아대수미와 고사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의 고집으로 2만 명이 넘는 고구려 유민들이 당군에 의해 갓난애들까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그러면 동쪽으로 도망을 친 온수곤수의 무리들은 어떻게 되었으며, 남쪽으로 도망을 친 자마우치는 어떻게 되었을까. 또 마을을 떠난 지 반 년이 다 되어 가는 아소미네와 을지마사는 지금 어느 산하를 헤매고 있는 것일까. 나라의 머리 속에 숱한 상념들이 떠오르며 끊임없이 나라를 괴롭혔다. 해가지는 서쪽을 향헤. "저게 뭘까?" "아무래도 사람 같은데..." 농우에서 20여 리쯤 떨어진 사막길을 한 무리의 낙타떼가 가고 있었다 이들은 장안에서 교역을 마치고 허텐으로 돌아가는 위구르인 대상들이었다 그들의 시야에 가물가물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들은 오랜 경험으로 혹시나 사막에서 길을 잃고 조난을 당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까이 접근을 해서 모래 속에 반쯤 묻혀 있는 물체를 파냈다 짐작대로 사막에서 조난당한 자들이었다. 붉은 수염의 젊은이는 두 사람의 몸을 모래 위에다 똑바로 누였다. 그런 다음 조난자의 심장 근처에 귀를 갖다 대보기도 하고, 눈까풀을 까 뒤집어 보기도 했다. 잠시 후 그는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흰수염의 노인을 올려다 보았다. "벌써 오래 전에 죽은 것 같은데요." 옆에 서서 젊은이가 하는 양을 내려다보고 있던 흰수염의 늙은 노인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다 죽었느냐?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젊은이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눈길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평생을 사막에서 산 그로서는 이따금 이런 일들을 목격하곤 했다 사실 그 자신도 어느때 이런 경우를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노인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다시 한 번 젊은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잘 살펴보아라." 하인인 듯한 젊은이는 다시 몸을 구부려 두 사람의 가슴 위에 번갈아 귀를 대보며, 미미한 움직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온 신경을 모았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들어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주인님, 이 젊은 사람은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듯도 합니다만." 하인의 말을 들은 노인은 낙타에서 내려 조난자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확인하듯 귀를 조난자의 가슴 위에다 대고 숨을 죽였다. 이윽고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이 사람은 아직 살아 있다. 어서 물을 가져 오너라." 이렇게 해서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진 을지마사는 낙타 위에 실려졌다. 그러나 이미 절명해 버린 아소미네는 대상들이 모래를 파고 매장해 버려 그곳에 혼자 남게 되었다. 쉰여섯이라는 아소미네의 한 많은 생애가 중국 서북쪽의 허허로운 사막 속에서 끝나 버렸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 나데와 아들딸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주강의 고구려 마을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이역의 하늘 아래서 눈을 감아 버린 것이다. 빈사 상태에 빠진 을지마사를 낙타에 싣고 가는 대상들은 당시 타림 분지의 오아시스 도시 허텐에서 살고 있던 백인 스키타이들의 후예였다. 백인들은 근세에 들어와 동양으로 진출한 것이 아니고, 벌써 3천 년 전에 스키타이족들이 동쪽으로 진출해와서 중국의 서북방 타림 분지를 점거해서 살았고, 어떤 경로를 밟았는지는 수수께끼지만 이들 중 한무리가 한반도로 들어와 신라의 찬란한 금붙이 유물을 남겼다. 또 자작나무 천마도를 그리고 첨석총을 쌓기도 했다 " 그러나 그 후 3천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타림 분지 일대도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흥노, 돌궐 등이 지배했다가 물러나고, 을지마사가 낙타에 실려갈 때쯤은 옛날의 스키타이 사람들과 주변의 몽고 계통 사람들이 혼혈이 되어 동양인과 서양인을 섞어 놓은 듯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 족속의 이름은 위구르라고 불렀다. 또 그들은 중국과 서양을 잇는 유일한 길목(실크로드)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연 그들의 생업은 낙타떼를 몰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실크로드를 통해 무시로 지나다니는 중국 사람, 서양 사람, 이란 사람, 그리고 인도 사람들 덕분에 그들의 문화는 일찍 발달했다. 신라 사람 혜초도 이 길을 통해 천축국에 가서 불교의 심오한 철리를 깨우치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가 들어와 성행했고, 기독교도 경교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 스키타이 후예들은 처음에는 하늘을 믿는 종교를 갖고 있었으나 다음에는 불교가 융성하여 둔황의 막고굴과 같은 세계적인 불교 유적을 남겼고, 이어서 이란에서 불을 숭배하는 배화교가 들어왔다가 얼마 있지 않아 이슬람 세력이 침투해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다른 종교를 무자비하게 파괴시켜 버렸다 그날 오후 낙타떼를 몰고 가는 위구르의 대상들은 농우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고는 다시 출발했다. 당시 농우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을지마사는 이들의 눈에 띄지를 못했다 그때까지도 을지마사는 의식이 없는 상태인데다가 주강 마을에서 입고 온 고구려 옷만 걸치고 있었더라도 고구려 유민들의 눈에 띄었을 텐데 하필이면 웡이 준 중국옷으로 바꾸어 입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고구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을지마사는 낙타 등에 비끄러매진 채로 농우를 지나 서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을지마사가 정신이 든 것은, 농우를 통과한 지 두어 시각이나 지나 버린 다음이었다 을지마사는 정신이 들자 심한 재채기를 하면서 입과 목구멍 속에서 모래를 토해 냈다. 나중에는 가는 모래가 피와 함께 섞여 나왔다 위구르인 대상들은 서둘러 을지마사에게 물을 주고 먹을 것을 주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을지마사는 의식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러고도 한시각쯤 지나서 의식이 돌아온 을지마사는 문득 그가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소미네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소리를 질렀다. "아소미네님 , 아소미네님 ? 대상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소미네님 ? 을지마사가 계속 아소미네만 부르며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살피자, 위구르인들은 그가 죽어 버린 동료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들은 을지마사를 향해 연방 고개를 휘저었다. "마씨 마씨! 너버웨요.(없다, 없어! 죽어 버렸어)" "아소미네님 ? 을지마사는 그래도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아소미네를 찾았다. 그러자 그들은 손으로 먼곳을 가리키며 죽는 시늉을 했다. "죠마라 너버 붸요.(정말로 죽어 버렸어)" 그제야 을지마사는 농우를 향해 가던 도중 모래 폭풍을 만난 일을 떠올렸다. 어쩌면 아소미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몸이 떨려 오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낯선 얼굴들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을지마사는 서럽게 울었다 한참 뒤 을지마사가 진정한 듯싶자 노인이 질문을 던졌다. "너 어라 라웨리?(너 어디서 왔느냐)" "너래 어라까이라?(너는 어디로 가는 길이냐- 을지마사는 문득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막상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리 낯설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답을 했다. "나래 까오리 치요. (나는 고구려 사람이오) "까오리 치?" "아." 대상들은 그제서야 을지마사의 정체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상들의 다음 행선지는 서쪽으로 50리쯤 떨어져 있는 조그만오아시스 마을. 대상 일행이 오아시스에 닿았을 때는 광활한 천지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야 눈에 들어오는 것은 허허로운 사막뿐, 을지마사는 막상 갈 곳이 없었다.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는 외로움이 뼛속을 파고들었다. 오아시스에는 흙집 스무여 채가 게딱지처럼 엎드려 있고, 그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역시 위구르족이었다. 대상들은 오래 전부터 그들과 잘 아는 사이인지 서로 끌어안기도 하고, 잡담을 주고 받기도 했다. 을지마사가 외따로 떨어져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는데 마을 사람 몇 명이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래 어라 까이라?(너는 어디로 가느냐)" 을지마사는 용케도 그들이 말한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알고보면, 고구려와 민족의 뿌리가 같았던 스키타이의 후예 위구르말은 서로 비슷한 데가 많았던 것이다. "농우, 농우로 가요." "농우?" 을지마사는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농우로 가요." "농우로 까이 요?" 그들은 '가거 라는 말은 알아듣는 것 같은데 농우라는 말을여전히 못 알아듣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은우' 를 한자 그대로 발음했지만, 현지 사람들은 '롱라우' 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을지마사는 안타깝게도 다시 한 번목적지 농우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 다음날 아침, 을지마사는 대상들이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도가도 지평선만이 보이는 사막, 간혹 야트막한 산이 나타나도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서있지 않은 바위투성이 민둥산뿐이었다. 그런데도 석양이 되면 노을이 곱게 비끼고, 새들이 공중으로 높게 날았다. 한낮에는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햇볕으로 온 천지가 뜨겁게 끓다가도 밤이 되면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새벽녁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 대상들이 주는 담요를 몇 장두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오직 주강 마을과 다르지 않은것이 있다면 밤마다 달이 떠올라 먼곳까지 비추고, 민등산의 능선이 어슴푸레하게 윤곽을 드러내 세상이 마치 억만 년 동안 침묵 속에 잠겨 있는 것 같은 적막감이었다 을지마사를 데리고 가는 대상들은 물이 말라서 소금덩이로 굳어 버린 호숫가도 지나고, 또 어느곳인가 붉은 벽돌 건물들이 반쯤허물어져 유령이 돌아다닐 듯한 폐허도 지나쳤다 아마도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 옛날 어느땐가 지각변동이 일어나 땅에서 솟던 물줄기가 끊어져 다른 곳으로 이주해 버렸으리라. 그런데 한 가지 을지마사가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있었다 대상들은 길도 없는 사막 위를 앞을 향해 잘도 나아갔고, 해가 질 무렵이 되어 모래 언덕을 넘으면 그곳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오아시스 마을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오아시스도 모습이 제각기 달라 어느 곳은 연못처럼 지상에물이 고여 있는 곳도 있고, 또 어떤 오아시스는 지상에 보이는것은 물기 하나 없는 푸석한 가는 모래뿐인데, 지하계단으로 해서 내려가면 거기에 지하 동굴 같은 수로를 타고 맑은 물이 땅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오아시스 마을 사람들은 이 물을 소를 이용해서 퍼올려 몇 뼘 안되는 땅뙈기에다가 밀도심고 포도도심었다. 그나마 마을을 뒤덮고 있는 대추야자 나무의 푸른색이 없다면, 오래 전에 죽어 버린 땅으로 착각할 만했다. 인간이란 저렇게도 사는 것인가? 을지마사는 주강 마을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들의 각박한 삶의 모습을 볼 때마다 연민이 치솟곤 했다. 을지마사가 대상들을 따라 20여 일을 간 후에야 목적지 허텐에 당도했다. 육중한 성문을 통해 들어서자 제법 규모가 큰 도시가 나타났다. 시가지 이곳 저곳에 누각이 고색창연하게 서 있고, 길 양옆으로는 상점들도 늘어서 있었다. 허텐은 사막 한가운데 한 점 보석처럼 박힌 도시였다. - 대상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대상들이 들어 선 집은 한눈에 허텐에서도 좨나 부자인 듯싶었다. 대상 일행이 대문 앞에 이르자 집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반갑게 맞이하는 통에 집 안팎이 한동안 법석을 떨었다. 그날 이후로 을지마사는 그 집에서 마련해 준 잠자리에서 자고, 주는 음식을 받아 먹으며 지냈다. 주식은 '논' 이라 하는 밀가루를 반죽해서 구운 것인데 큰 타원형으로 생긴 호떡 같은 빵이었다. 거기다가 양고기를 잘게 썰어 쇠꼬챙이에다가 줄줄이 끼운 다음 불에 구운 것을 가져다 주었다 을지마사는 처음 얼마 동안은 양고기의 노린내가 역겨웠지만 주는 대로 배를 채을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한 달쯤 지내고 나니 차츰 주위가 낯설지 않게 되었다. 하인들과도 차츰 친해져서 그들의 표정만 보고도 대충 의사가 통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을 먹자 하인 몇 명이 을지마사의 손을 끌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도시의 공연 장소인 듯한 넓은 공터에 들어서자 울긋불긋한 큰 천막 여러 채가 세워져 있고, 그 사이를 비집고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이곳 허텐은 동서양을 잇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서 별의별 모습을 한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몽고 사람처럼 얼굴이 넓고 코가 주저앉은 노란 얼굴들이 있는가 하면, 코가 크고 눈이 파란 서역 사람들도 있었고, 얼굴이 작고 길며 눈이 동그랗고 피부가 가무잡잡한 인도 사람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을지마사가 보기에 그날이 이곳의 축제날인 듯싶었다 공연 장소에 모인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네들의 고유 의상을 입고 장막 안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페르시아에서 온 마술사가 이글거리는 숯불 위를 걷고, 입으로 불을 확 토해낼 때 는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던 관객들이 '와핫? 하고 탄성을 질러 댔다 페르시아의 마술이 끝나자 장내가 다시 소란해졌다. 이윽고 열대여섯 명의 처녀들이 들어왔다 바로 위구르족 처녀들이었다. 을지마사는 그녀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놀랐다 연주하는 악기와 춤추는 동작이 주강 남쪽의 고구려 마을에서 보았던 것하고 어쩌면 그리도 똑같을까. 남자들이 꽹과리와 징을 치면, 처녀들은 발을 사뿐히 떼놓으며 양쪽 손을 어깨 위로 올려 리드미컬하게 흔들어 댔다. 일종의 군무였다 이때 을지마사 옆에서 침을 흘리며 구경을 하고 있던 젊은 하인놈 하나가 춤추는 처녀 한 명을 손가락질하더니 고개를 을지마사 쪽으로 돌리며 씩 웃었다. 뒤이어 그 하인 녀석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자숙! 자숙!" 그때쯤 을지마사도 '자숙' 이 자기가 묵고 있는 집주인의 이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 하인 녀석이 을지마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집주인 자숙의 딸이 가장 예쁘다' 라는 뜻이었을 게다. 사실 자숙의 딸은 예뻤다. 동서양의 피가 섞여 몸매는 아담하고 날씬했다. 검은색 머리와 눈동자는 갸름하게 생긴 얼굴과 조화를 이루었는데도, 콧날이 오뚝해 이국적인 정취가 있었다 뜯어볼수록 매력 있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을지마사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허텐에 온 지 열흘쯤 되는 어느 날 오후, 그 집 후원에 있는 살구나무 밑에서였다. 을지마사가 지루한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후원으로 나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늙은 살구나무 아래 그림처럼 서 있는 한 처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을지마사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혔다. 보통 때 같으면 남녀가 서로 시선을 비키거나 어느 한쪽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을 터였다. 그런데 그날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그윽이 들여다보며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잠시 후 조금은 어색했던지 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옥을 굴리듯 아름다운 목소리 였다. "어 브으자." 을지마사는 처녀의 소리를 듣고는 혹시 고구려의 인사말 '어디보자'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을지마사도 금방 대꾸를 했다. "어 디 보자." 그녀는 을지마사의 대답을 듣자 수줍어하면서도 살짝 미소를 지 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더 이상 의사를 교환할 수가 없었다. 잠시의 침묵이 있고 나서 그 어여쁜 위구르족 처녀가 손을 펴 을지마사에게 내밀었다, 손바닥에는 노랗게 잘 익은 살구 두 알이 놓여 있었다. 을지마사는 살구를 받아 한 개는 자기 입에 물고 나머지 한 개는 속씨를 발려 다시 처녀에게 건네 주었다. 처녀도 살구를 입 속에 넣으며 또 한번 수줍게 웃었다 을지마사는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처녀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으로 자기의 가슴을 가리켰다. "나 마사, 나 마사 " 소녀가 말을 받았다. "마사? "응 마사" 소녀는 가만히 입 속으로 뇌어 보았다. "마사 " 을지마사가 다시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 잠시 머뭇거리던 소녀가 비로소 을지마사가 묻는 뜻을 알아차렸다. "무메," "무메 ?"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무메, 너 마사" 오후의 정원은 한적했다 그 후 을지마사는 틈만 나면 후원 뜰로 나갔고, 그럴 때면 소녀가 살그머니 나타나 맛있는 음식들을 을지마사의 손에 쥐어 주곤 했다. 공연장에 함께 간 하인놈이 바로 주인집 딸 무메를 가리키며, 이 허텐 안에서는 가장 예쁘다고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들었던 것이다. 그때 춤을 추고 있던 무메도 이쪽의 존재를 알아챈 것 같았다. 다른 처녀들과 어울려 춤을 추며 빙글빙글 돌아가면서도 을지마사 쪽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정작 좋아한 것은 곁에서 구경을 하는 총각 하인 녀석. 무메가 자기에게 아는 체한 것으로 착각을 한 하인놈은 벙글벙글 웃는 얼굴로 을지마사를 돌아보았다. 을지마사는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가까스로 참고 총각 하인의 어깨를 툭 쳐주었다. 그사이에도 세월은 가고 있었다. 을지마사는 대상 자숙의 집에 머문지 몇 달이 지나자 공밥 얻어먹기도뭣해서 집안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낙타와 말들을 돌보고, 오후에는 짐도 꾸리고 집안을 쓸기도 했다. 다른 민족에 비해 고구려 사람들은 무척 부지런했다. 그래서 을지마사의 존재는 자숙의 집에서 금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쯤 집주인 자숙도 아내로부터 딸의 변화를 귀띔받고 을지마사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중이었다. 그의 눈에도 허우대와 인물이 그만하고, 거기다가 유별나게 부지런한 을지마사가 싫을 까닭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 , 을지마사는 집주인 자숙에게 불려 갔다 자숙은 부드러운 얼굴로 을지마사를 건너다보았다. "나래 너게 아오 삐웨요.(내가 너에게 옷을 준다)" "나?" "아-" 을지마사도 어느새 위구르족들의 말을 조금쯤 흉내낼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인이 을지마사에게 새로 지은 옷 한 벌과 소를 주는 것이었다. 마침 입고 있던 옷이 낡은 터라 을지마사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받아 나왈서 입고 보니 영락없는 위구르족의 모습이었다. 그날 오후 을지마사가 무메를 만났을 때 무메는 모처럼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마사, 너 자 다웨요.(마사, 너 참 아름답구나) 을지마사가 멋쩍어 하며 머뭇거리자 이번에는 무메가 혼자서 얼굴을 붉혔다. "나래 너 도조붸, 너 아자라?(내가 너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니)" 갑자기 을지마사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응" 대답은 했지만 공연히 쑥스럽고 무안한 기분이 들어 을지마사는 슬그머니 후원을 나와 버렸다 하루는 을지마사가 자숙의 긴한 심부름으로 물건을 가지고 허텐의 저잣거리로 가서 세라는 중국 사람을 만났다 중국인 세는 장안에서 옥을 사러 허텐까지 온 사람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옥을 최고의 보석으로 쳤다. 그래서 옥은 당시의 중국 사람들에게 부의 상징이었다. 심지어 옥갑을 입으면 저승에 가서도 귀하게 태어난다고 해서 부자들은 거금을 아끼지 않고 옥을 사들여 몸을 장식하고, 또 수의까지도 만들어 입었다. 중국인 은 종자를 50여 명이나 거느린 큰 장사꾼이었다. 운이 따랐던지 을지마사는 주인 자숙의 심부름을 가서 그를 만났고, 그와는 한문을 써가며 의사를 통할 수가 있었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을지마사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대반점 (중국의 큰 여관)에서 쉬고 있는 세를 다시 찾아갔다 세는 을지마사가 처음에는 위구르족 청년인 줄 알았다가 한문을 아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기고 있던 차였다. "그대는 나에게 볼일이 또 있는가? "예, 세님. 혹시 농라우라는 곳을 아십니까?" "응, 알지 . 그런데 청년은 어떻게 중국 글자를 아오?" "저는 위구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 "고구려 사람입니다." 갑자기 중국인 세의 눈이 휘등그레졌다 "고구려 사람? 그럼 어떻게 이곳까지 왔소? 을지마사는 장안에서 농우로 가던 중 모래 바람을 만나 함께 가던 아소미네는 죽고, 자기는 대상 자숙에게 구출되어 이곳까지 오게 된 경위를 말했다. 을지마사가 겪은 우여곡절을 듣고 난 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농라우가 어디냐고 나한테 물었소? 왜? "그곳에는 고구려 유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그렇소. 농라우는 이곳에서 장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 2천 리가 더 되오." "제가 꼭 만나 뵈어야 할 분이 그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 , 그분 성함이 뭐요? "예 , 고사계라는 분을 찾습니 다." 문득 세의 표정이 변했다 "고사계 대인을 찾는다구? "예 , 그러 합니다." "진정 그대는 고 대인을 찾아가는 길이었소? 을지마사에게 확인하듯 묻고 있는 중국인 거상 세의 얼굴에는 놀람의 빛이 역력했다. 을지마사는 불안한 생각에 가슴이 탔다. 그러나 어차피 내친 걸음이었다 을지마사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장안에서 만난 유랑극단의 처녀 여옥과 만날 약속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데 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농라우의 고 대인과는 수년간 친교가 있소. 안심하고 대답하시오." "예, 저 고 대인은 저의 외가쪽 친척이 됩니다" 을지마사는 적당히 둘러대 당장의 곤란한 입장을 모면했다 "아, 그랬었구먼," 중국인 세는 참으로 묘한 인연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고사계와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고사계는 고구려가 망하고 애초에 영주로 끌려갔던 사람이었는데 그 후 다시 가솔들을 거느리고 자기네 형제들이 끌려가 살고 있는 농우로 이주했다고 한다 무예가 출중했던 그는 젊어서 하서군 교장으로 근무했다가 은퇴한 이후에는 부지런히 장사를 해서 지금은 그 일대에서 알아주는 호족이 되어 있다고 했다. 자기와는 수년째 물품을 거래해 오는 관계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중국에서 서역을 가자면 중국땅의 마지막 끝나는 곳이 농우였다. 그래서 장사차 서역으로 가는 사람들은 농우에서 필요한 물건을 조달받아야 하는데, 이 일을 바로 고사계 노인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 젊은이는 꼭 농라우로 가고 싶소? "예 세 대인께서 저를 거두어만 주신다면 따라가겠습니다. "나는 내달 중순께 돌아가는데 혹시 ...." "노비문서에 도장 찍은 것은 없소?" "노비문서라구요? 을지마사는 처음 듣는 말이라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는 부호들 집에는 노비가 수십 명씩 있었고 한번 노비문서에 도장을 찍으면 그 집에 속한 물건으로 간주되어 평생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중국인 세는 을지마사가 당황해 하는 것을 보자 고구려 유민인 그가 내용을 잘 모르려니 하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오. 내가 자숙 대인을 만나 잘 이야기해 보겠소." 거상 세는 을지마사가 농우 고사계의 친척이 된다는 말을 듣고는 각별하게 신경을 써주었다 그로부터 닷새 후에 대상 자숙은 을지마사를 불렀다 자숙의 얼굴이 평소와는 다르게 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너 농라우로 까이 뚜라?(너 농라우로 가고 싶으냐- 자숙은 한동안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윽고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므야, 너 자 까이 뚜라, 까이 페요.(만약 네가 꼭 가고 싶으면 가도 좋다)" 그런데 문제는 무메였다. 다음날 후원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리고 을지마사를 빤히 건너다보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는 조용한 슬픔 같은 것이 깃들여 있었다. 무메는 살구 나무 아래서 한참을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안채로 들어가 버렸다. 을지마사는 무메가 사라져 버린뒤로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음날 을지마사는 다시 후원으로 나갔지만 무메는 거기에 없었다. 무메가 항상 서 있던 살구나무 아래는 비어 있었다. 을지마사가 허텐을 떠나기 3일 전쯤, 그는 안채로 불려 갔다. 자숙의 부인은 중년의 나이였지만 수십 명의 하인을 부리며 안주인 노릇을 해온 터라 무게와 기품이 있는 여인이었다. "너 래 도죠치라. (너는 좋은 청년이다)" "어브으자. (감사합니다)" "너래 나웨 어뷔마 무메 짜가라?(너는 나의 딸 무메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을지마사의 가슴이 덜컥 네려앉았다.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너웨 어뷔마 무메 자 다웨요.(당신의 딸 무메는 아주 예쁩니다)" "어꼬로, 너래 농라우로 어라 까이 뚜요?(그런데 너는 왜 농라 우로 떠나려고 하느냐)" "나래 농라우로 나웨 아쁘아삐 피웨요.(나는 농라우에 친척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마, 너래 나웨 어뷔마터 시베, 너게 나흐웨 메삐페요.(만약 네가 나의 딸과 결혼한다면 우리들은 너에게 우리 집안의 성을 물려줄 수도 있다) 자숙 부인의 제안을 들은 을지마사는 깜짝 놀랐다 자기의 딸과 결혼을 하면 성을 물려 주겠다는 말 속에는 모든 재산, 노비 그리고 가업을 송두리째 물려 주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당황한 을지마사는 이런 때일수록 행동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졌다 "어브으자, 어꼬로 나래 농라우로 까이 해라. 농라우로 까이 뚜 나래 허 텐로 라웨요.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꼭 농라우로 가야만 합니다. 농라우로 간 다음 다시 한 번 찾아 뵙겠습니다>" 무메의 어머니도 을지마사의 결심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을지마사는 안채에서 물러나 자기의 방으로 돌아와 벌렁 누워 버렸다. 자숙은 사막 속에서 죽어 가는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말도 통하지 않고, 일을 시킬 수도 없는 자기를 여섯 달이나 먹여 주고 입혀 주지 않았던가. 사실 무메를 거절하는 것이 은인을 배신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이제 을지마사의 나이 열아홉, 한참 혈기왕성한 젊은이로서 무메처럼 어여쁜 처녀를 외면한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죽은 아소미네를 떠올렸다. 함께 뜻을 품고 마을을 떠나와서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난 마당에 이제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옹골차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보통사람이면 해낼 수 없는 독한 결심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을지마사는 더 이상 무메의 일을 생각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제 한가윗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을지마사는 다시 한 번 지나 버린 세월을 떠올려 보았다. "이제 두 달 보름 후면 한가윗날,,,, ,." 문득 그의 시야에 가냘픈 여옥의 얼굴이 아롱져 왔다. 일행을 따라 허텐을 떠난 것은 정확히 사흘뒤였다. 허텐을 떠나는 날 아침에 을지마사는 자숙과 그의 부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갔다 그러나 그곳에 무메는 없었다. 자숙은 먼길을 떠나는 을지마사의 등을 토닥거려 주며 적지않은 은덩어리를 내놓았다. 한사코 받지 않겠다는 을지마사에게 어거지로 떠안기며 자숙이 말했다. "너 무꼬 까이라, 게코 허텐타 아저 마씨.(어디를 가든지 결코 허텐을 잊지 말아라)" 을지마사는 가슴이 찡해 왔다 을지마사는 머리를 숙여 자숙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행길로 들어선 을지마사는 이제 영원한 이별이 될지도 모르는 자숙 대인 집을 다시 한 번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무메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그 집 대문 곁에는 늙은 뽕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다 바로 그 뽕나무가 서 있는 토담 위로 반쯤 얼굴을 내밀고 자기의 뒷모습을 바라다보고 있는 무메를 보았다. 그녀는 을지마사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다가 때마침 고개를 돌린 을지마사와 시선이 마주쳐 버린 것이다. 흙담 위로 올라온 검은 눈동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을지마사는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그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정녕 인생의 행로란 알 수가 없는 것이로구나!' 을지마사는 탄식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어쩐지 그대로 가면 안 될 성싶었다. 을지마사의 가슴속에도 어느덧 뜨겁게 차오르는 것이 있어 더 이상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을지마사는 뒤로 돌아서서 오던 길을 되짚어 갔다. 늙은 뽕나무 아래 무메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무메 !" 무메는 대답을 안 했지만 을지마사를 바라다보는 검은 눈동자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무메, 다시 오겠어 ." "널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게 " "그럼 됐어 이젠 가봐" 무메가 울음을 참느라고 얼굴을 찌푸렸다. 을지마사가 잠자코 무메를 바라보다가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다시 몇 발자국을 옮겨 놓는데 등뒤에서 무메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을지마사? 을지마사가 뒤돌아보았을 때 무메의 웃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억지로 웃음을 띤 무메를 보자 을지마사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을지마사, 너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구." 슬픈 얼굴로 이별할 수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무메는 천천히 을지마사에게로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무메의 손에는 평소에 그녀가 끼고 있었던 옥반지가 놓여 있었다. 무메에게서 옥반지를 받은 을지마사도 놋쇠팔찌를 빼내 그녀에게 주었다. 서로 영원히 잊지 말자는 정표였다. 인간 고선지. 그날 아침 무메와 작별을 한 을지마사는 세를 따라 농우 를 향해 출발했다 일행은 모두 50명이었지만 짐짝을 실은 여분 의 낙타들이 많아 그럭저럭 200여 마리의 낙타들이 일렬로 사막 을 뚫고 행진을 해나갔다. 과연 7월의 날씨는 달랐다. 흰색 담요로 온몸을 휘감고 두 눈 만 빠끔히 내놓고 가는데도 사막지대는 습도가 낮아 진종일 이 글거리는 불볕에 살갗이 타는 듯했다. 흡사 용광로 같은 사막 속 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곤 오직 낙타 행렬뿐이었다 을지마사는 여섯 달 전에 대상 자숙 일행을 따라서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것이라 주위의 풍경들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하 루 종일 수십 개의 모래 언덕을 넘어 해가 질 무렵쯤 되면, 낙타 떼의 선두에 선 안내인은 귀신같이 오아시스 마을을 찾아내 타 는 목을 축이고 음식물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 동안 두 차례의 모래 폭풍을 만났다 전날 해질 무렵 서쪽 하늘이 어둡거나 다음날 새벽 하늘 복판에 새털구름이 떠 있으 면, 일행은 반드시 오아시스 마을에서 2~3일씩 묵었다 그런 날 이면 어김없이 바람이 거칠어지고 모래가 날려 해를 가렸다. "바람이 있으니까 구름이 흩어진 거야." 세가 하늘을 가리키며 을지마사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아, 그랬었군요." 을지마사는 그제서야 농우 바로 못 미처서 위구르 남자가 아 소미네와 자기를 한사코 가로막으면서 못 가도록 붙든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고 또 일 말의 의심이 들어 행군을 감행하다가 그만 아소미네가 참변을 당했던 것이다. 세는 또 뭉게구름이 퍼져 올라오는 날이면 입가에 만족한 웃 음을 지었다. 그런 날은 으레 날씨는 따가웠지만 바람이 없어 순 조롭게 행군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단조로운 여행이 계속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어서 일행 은 드디어 농우에 닿았다. 농우는 허텐을 출발한 이래 처음 보는 큰 도시였다. 규모는 허텐의 두 배쯤 되어 보였다. 주위의 풍경 도 사뭇 달랐다. 허텐이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도시라면 농우는 반사막지대였다. 주위에 제법 산도 있고, 산등성이에는 키가 작 은 관목들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일행이 여관에서 짐을 풀고 있을 때, 세가 을지마사를 불러 하 인 한 명을 딸려 주었다_ "우선 먼저 고사계 대인 집으로 가시오. 그리고 나는 내일이 나 대인을 찾아 뵙는다고 전해 주시오." "예 , 그간 고마웠다는 말씀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 중국인 세에게 인사를 마치고 하인의 뒤를 따라가는 을지마사 의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하기만 했다. 그 역시 초면인 고사계라 는 사람에게 무어라고 자기 소개를 해야 한단 말인가 앞장을 선 하인은 큰 병영 듯한 건물을 지나 사잇길 로 접어들더니 이내 솟을대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바로 이 집입니다 " "이 집 이 라고?" "예, 고사계 대인 댁입니다." 사실 을지마사는 난감했다. 그렇다고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 을 수도 없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 집 대문을 들어서 서 안으로 들어가 주인을 만나는 길뿐이었다. 이어서 하인이 대문을 두드리고, 그 집 하인인 듯한 사람이 나 왔다. 잠시 서로 말을 주고받더니 그 집 하인이 을지마사를 데리 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보기보다 훨씬 넓었다. 기와를 인 사랑채에 이르자 하 인이 안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큰 방문이 열리며 누군 가 나타났다. 머리와 수염이 허옇게 센 백발 노인이었다 그러나 첫눈에 보아도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이 형형해서 어딘가 범접하 지 못할 위엄이 서려 있었다. 을지마사가 속으로 고사계라는 사람이 바로 저 노인일지도 모 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노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솰라 솰라,,,,,,." 그런데 뜻밖에도 노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중국말이었다. 아 마도 노인은 을지마사를 중국 사람이나 위구르 사람으로 본 모 양이었다. 을지마사는 얼른 고구려 말로 대답했다. "저는 고구려 사람 을지마사라고 합니다 " 노인이 흠칫 놀랐다 "아 네가 고구려 사람이라구? "예 그렇습니다 " "그런데 무슨 일로 우리집 엘 찾아왔느냐? 당연한 물음이었다 을지마사는 옷소매에서 여옥의 편지를 꺼내 고사계 노인에게 건넸다 편지를 훌는 고사계 노인의 표정에 아연 긴장감이 감돌 았다. 이윽고 편지를 다 읽고 난 고사계 노인이 눈을 들어 을지마사 를 바라다보았다 "네가 정녕 여옥이라는 처녀 아이를 만나 보았느냐? 노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게 언제쯤 되느냐?" "작년 9월 초순, 장안에서였습니다 " "장안 어디서 였느냐?" "예 , 고구려 유랑극단에서였습니다 " "알았다. 여옥이는 내 손녀가 되는 아이다. 아직까지 그 애를 만나본 적이 없다만,,,, ." "우선 쉬도록 해라 다시 너를 부르겠다," 고사계 노인은 하인을 시켜 을지마사를 행랑 별채로 안내했다 다음날 아침, 을지마사가 마악 아침상을 물리려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형씨 계시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을지마사가 방문을 열어 보니 밖에 웬 청년이 버티고 서 있었다 나이는 이제 30쯤 되었을까, 기골 이 장대하고 눈매가 부리부리해서 첫눈에도 무인다운 풍모가 있 었다. 청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씨가 을지마사라는 고구려 사람이오? "그렇습니다만,,,,,,." "오늘 아침 아버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소, 병영에 출근하 는 길이라 아침 일찍 찾아와서 미안하오." 청년은 이 집 주인 고사계의 아들임이 분명했다 청년을 방으 로 맞아들인 을지마사는 다시 수인사를 나누었다 "을지마사라고 합니다." "나는 고선지라고 하오. 을지 형을 만나서 반갑소." 이것을 꼭 운명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을까? 훗날 중국 천 하를 주름잡은 두 영웅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고선지는 전날 그의 아버지 고사계가 물었던 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듯 을지마사에게 물어 왔다. "아우가 여옥이라는 처녀를 장안에서 만난 것은 분명하오" "예 , 그러 합니다." "아우는 여옥과 한가윗날 이곳 농우에서 만나기로 분명히 약 속을 했소? "예 , 여옥의 편지에 의하면 그렇습니다만, 고선지는 더 이상 할말이 없는지 혼잣말을 하면서 문득 한숨 을 내쉬었다. "그 애가 한가윗날까지 돌아오면 좋으련만 그날밤 일찍 퇴청한 고선지는 을지마사와 밤을 새워 가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먼저 고선지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 고사계는 고구려의 소사자 벼슬에 있었 는데, 펴라성 수성전 때 자소 밑에서 싸웠다고 했다. 고구려가 망하고 나자 일가족이 포로가 되어 영주로 끌려갔고 고선 지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얼마 후 고구려 점령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크게 일어나자 당 황한 당나라 조정은 붙들어 왔던 보장왕을 다시 돌려보내 고구 려 유민들을 무마시키려고 하였는데 보장왕마저도 독립운동에 가담해 버렸다. 얼마 후 발각이 나고, 영주의 고구려 유민들은 다시 중국 땅으로 끌려갔다. 그 와중에서 고사계의 큰딸이 당군 에게 붙잡혀 갔다. 고사계는 잃어버린 딸을 찾으려고 어린 아들 고선지를 데리고 고구려 포로들이 끌려간 농우로 왔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했지 만 딸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농우로 끌려온 고구려 포로들 중에는 상당수가 당나라 사람들의 압제에 견디다 못 해 서역의 구자국쪽으로 가고, 또 일부는 서북쪽의 북정으로 흘러 갔다 그래서 계속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 찾아보았다 덕분에 그 쪽으로 이주해 간 형제들은 찾았으나 끝내 딸은 찾지 못했다. 몇 년 후 고사계는 하서에 눌러앉았다. 고사계는 젊어서 펴라 성의 동문 수비대장을 맡았을 정도로 무예가 출중했다. 그는 먹 고살기 위해 당군으로 들어가 하서군의 교장의 직책에 있다가 퇴직을 하고는 농우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얼마쯤 지나고, 잃어버린 딸에 대한 아픔이 체념으로 뒤바뀌어 갈 무렵 우연찮게도 큰딸의 소식을 풍문으로 들을 수 가 있었다. 그때쯤 고사계는 농우에서 객주를 해서 한 밑천 단단 히 잡아 가고 있을 때였다. 물건을 가지러 장안에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들이 묵고 있었던 대반점에서 성을 고씨 라고 하는 고구려 여인 한 명이 죽었는데, 사연인즉 그 여인네는 당나라 사람 대반점 주인의 첩으로 있다가 본처의 시샘으로 독 살되었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죽은 고구려 여인이 거적에 둘둘 말려 북망산으로 가는 것이 하도 불쌍해서 자기네들이 관을 사 서 장사를 지내 주었노라고 했다. 당시 포로로 붙들려간 처녀 중에서 얼굴이 좀 반반하다 싶으 면 당나라 군관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였고, 힘센 놈이 데리고 살다가 싫증이 날 때쯤 되면 주점 같은 곳에다 노예로 팔 아먹는 것이 다반사였다 장안에 갔었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한낱 여행담으로 하고 있었지만, 자나깨나 큰딸을 생각하고 있었던 고사계 노인은 그 냥 흘려 버릴 수가 없었다. "혹시 죽은 여자가 몇 살쯤이나 되어 보였소?" "이제 나이가 사십이 갓 넘어 보였습니다." 고사계 노인은 다시 물었다. "출신이 고구려 어디 라고 합디까?" "본래는 펴라성에서 살았고, 붙잡혀온 곳은 영주라고 하옵니 다." 고사계는 곰곰이 큰딸의 나이를 따져 보았다. 지금 살아 있다 면 42살. 그런데 인간이란 자기의 살붙이에 대해서는 특별한 예 감이라도 있는 것일까 장안에 다녀온 사람들이 말을 처음 꺼냈 을 때부터 고사계 영감은 그 이야기가 건성으로 들리지 않고 가 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그 외에 또 달리 들은 것은 없소?" 함께 장안에 다녀온 사람들이 그제야 생각나는 것이 있다는 듯이 말을 보탰다. "예, 그 여자의 근본은 고구려의 호족 출신이었던가 싶습니 다 아버지가 주느브의 의사자였다던가. . " 순간 고사계 노인의 얼굴색이 파랗게 질렸다 "? 뭐 --" "주느브 의사자라고 했습니다 " "그게 사실이오? 고사계 영감이 지르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모두들 화들짝 놀랐다 이어서 고사계 노인의 오열이 터져나왔다 "아! 정녕 네가,,,,,, 네가 그렇게 죽었구나!" "아비 잘못 두어 그렇게 죽었구나?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고사계 노인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는 그만 이 성을 잃어버렸다. 고사계 노인은 주위 사람들이 고정하라고 말 리는데도 한참 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나라가 송두리째 망한 고구려 백성들의 한이기도 했 다 고사계는 하얀 수염을 덜덜 떨어 가며 한식경을 그렇게 통곡 하고 나더니 겨우 정신이 드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 슬하에 남겨둔 자식은 없답디까? 좌중의 얼굴이 다시 난감해졌다. 그러나 숨길 수는 없었다. "남의 집 종살이를 할 때, 함께 종살이하던 고구려 남자와의 사이에서 난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딸이? 그래 몇 살이나 되었다고 합디까? "얼핏 보아 16, 7세쯤 되어 보이던데요." "그래 그애는 어떻게 됐소? 사실 농우에서 장안으로 장사를 하러 간 그들은 죽은 고구려 여인이 하도 불쌍해서 장례만 치러 주었지 그 여인의 딸이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수가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로 고사계는 아들 고선지와 몇 사람을 장안으로 보내 알아보았다. 그러나 표독스러운 대반점의 본처가 첩의 딸인들 가만히 놓아 두었을 까닭이 없었다 그녀는 고구려 여인의 딸을 마침 대반점에 묵고 있던 유랑극단에 팔아 넘긴 후였다. 어찌 보 면 청루에 팔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고사계 노인이 보낸 고선지 일행이 장안의 대반점에 도착했을 때는 딸이 팔린 지 달포가넘어 넓고 넓은 중국 천지 어디에 가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한 달쯤 장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백방으 로 수소문했지만 여전히 종적이 묘연하기만 했다. 결국 고선지 는 대반점에서 종으로 일하는 다른 고구려 여인들에게 부탁을 해놓고 다시 농우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년쯤 지난 뒤 유랑극단이 중국 천지를 돌아다니다 가 다시 장안으로 되돌아오자 죽은 고구려 여인의 딸인 여옥은 뜻밖에도 농우에서 자기를 데리러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 나 유랑극단주에게 몸값이 물려 있어 1년은 더 끌려다녀야 했기 때문에 그녀로서도 몸을 빼낼 도리가 없었다. 긴 이야기를 대충 끝낸 고선지가 을지마사에게 은근한 눈길을 건넸다. "그래 , 을지 아우는 우리 여옥이와 어떤 관계요? 드디어 고선지가 을지마사에게 내내 궁금했던 일을 물어 왔다. "아-네 " 을지마사는 대답하기가 조금은 쑥스러웠지만 숨겨서는 안 된 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가 여옥을 만나게 된 사연을 털어놓 았다. 아소미네와 장안에 갔었던 일, 당인 웡의 집에서 묵고 있다가 어느 날 장안의 저잣거리에서 고구려 유랑극단을 만나고, 거기 서 여옥이라는 처녀와 눈이 맞은 일,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자기가 중국 사람들에게 두 번씩이나 몰매를 맞은 일, 다음날 여옥이는 자취를 감춰 버리고 대신 어느 노파가 여옥의 편지를 가져다준 일 등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아-, 을지 아우에게도 그런 곡절이 있었군요? 고선지의 얼굴이 감동에 찬 빛으로 변했다. 을지마사는 이왕 내친 김에 자기 이야기를 마저 해야 되겠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와 아소미네가 농우로 가다가 농우 바로 못 미처 서 모래 폭풍을 만나 아소미네는 죽고, 자기는 대상들에 의해 구 출되어 허텐까지 갔다가 중국인 거상 세의 도움으로 농우로 다 시 오게 된 사연을 말했다. 을지마사의 이야기를 듣고 난 고선지 의 감정이 격해지는 듯했다. "을지 아우, 정말 장합니다 어린 나이에 그처럼 험한 시련을 격다니 ,,,,,,." 고선지는 무심결에 을지마사의 손을 꼭 쥐었다. 고선지는 을 지마사가 왠지 듬직하고 또 여옥과 그런 사연이 있다는 이야기 를 듣자 어쩐지 남 같지 않고 형제 같은 친근감이 들었다. "그런데 을지 아우는 어디서 왔다고 그랬소? "저 ,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선대들은 고구려에서 끌려온 다음 장강 남쪽에서 살았고,, ,,,. " "장강이라고 그랬소? 되묻는 고선지의 얼굴빛이 굳어져 있었다. "예, 장강이오. 그리고 저의 아버지대에 이르러 당군과 한차 례 싸운 뒤에는 남쪽으로 강을 하나 더 건너와 살았답니다." -- ---- "아, 그럼 바로 주강에서 살던 동포들이었구나!- 을지마사가 보기에도 고선지의 놀라는 표정이 "선지 형은 벌써 우리들을 알고 있었습니까?- "아, 알고말고. 그런데. ,... " ''아니 ,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을지마사는 자못 불안한 눈빛으로 고선지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고선지의 탄식 섞인 말이 흘러나왔다 "을지 아우, 내 말에 놀라지 마시오." 문득 불길한 생각이 엄습해 와 을지마사는 입 안이 바싹 타들 어 갔다. 일단 운을 뗀 마당에 고선지도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강 남쪽의 고구려 유민들은 모두 다 죽었소.- "뭐 , 뭐 라구요?" 을지마사는 고선지가 뭔가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죽다니? 그럴 리가 있습니까? "사실이오. 지금으로부터 일곱 달 전에 당나라 조정에서 예약 수에게 2만 명의 병사들을 주어 주강 남쪽 마을의 고구려 사람 들을 몰살시켜 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소." 을지마사는 너무나 큰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차라리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때 문득 어렴풋이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아소미네와 장안 성 주작문을 들어섰을 때, 창검과 기치를 번쩍거리며 남쪽을 향 해 가던 당나라 군대들. 그저 구경삼아 보았던 군대의 기치와 창 검들이 을지마사의 머리 속을 무섭게 후려쳤다. 그러면 나라와 가족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당군에게 죽임을 당해서 원귀가 되었단 말인가. 오직 을지마사 자기 혼자 만이 살아서 농우라는 낯선 하늘 아래 외톨이로 남아 있다는 고 독감이 뼈를 깎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고선지가 그렇게 말한 데에는 근거가 있었다. 당장 예약수는 고구려 유민들을 토벌하고 돌아와서 조정에 주강 남쪽에서 웅거 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을 어린아이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렸다 고 보고했다. 이 소문은 금세 산지사방으로 퍼져 농우 병마절도 부의 부절도사로 근무하는 고선지의 귀에까지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이끈 5천 명의 사람들이 서쪽 귀주성으로 도망 가서 생명을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선지가 알 리 없었다. 투박한 고선지의 손이 울먹이는 을지마사의 어깨를 쓸었다 "을지 아우,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그러나 을지마사의 오열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이젠 마음을 편안히 갖고 압일을 생각하는 길밖에 없소." 고선지는 을지마사를 달리 위로할 길도 없어 그냥 자기 처소 로 돌아오면서 날짜를 꼽아 보았다. 이제 한가윗날까지 꼭 열하 루가 남았다. 문득 밤하늘을 바라보니 칼날 같은 초승달이 뒤껼 정자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다음날 아침 조반을 마치자 고선지가 을지마사가 묵고 있는 별채로 얼굴을 내밀었다. "을지 아우, 절도부 병영에 가보지 않으려우? 고선지의 말은 실상 함께 가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어젯밤 비통한 소식으로 을지마사의 울적한 심사를 달래 주려는 고선지 의 배려였다. 을지마사는 하루종일 혼자서 방구석에 죽치고 있 기도 뭣하여 고선지를 따라 나섰다 "오늘 좋은 구경을 많이 시켜 주겠소." 동생이 없는 고선지는 자기보다 열 살가량 손아래인 을지마사 에게 곰살궂게 대했다. 병영은 집에서 나와 큰길을 따라가다 오 른쪽으로 돌면 곧바로 자리잡고 있었다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연병장도 넓었고, 연병장 한옆으로는 병사들의 막사가 연이어 세워져 있었다. 이곳이 바로 당나라의 농우절도부. 농우는 국방상 가장 첨예한 지역이었다 바로 서역으로 통하 는 병목 같은 외길이라서 선대 당태종 때는 이 길로 티베트의 송찬강보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서 장안을 15일씩 이나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나라에서는 하는 수 없이 금은 보화를 산더미같이 바치고, 당태종은 친딸 문성공주) 를 송찬강보의 첩으로 주어 겨우 그의 칼날에서 벗어날 수가 있 었다 다음에는 돌궐의 힐리가한이 침략해 오고, 이어서 위구르도 이 길로 해서 당나라를 침략했다. 이렇듯 언제나 농우 가 무너지면 당나라 전체가 위험에 빠졌다. 그래서 여러 곳의 병 마절도부 중에서도 농우절도부는 그 소임이 막중해 여타 절도부 에 비해 병사도 많고 장비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고선지와 을지마사가 영문에 들어섰을 때는 벌써 수만 명의 병사들이 아침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쪽에서 활을 쏘고, 얍 얍 소리를 지르며 창과 칼을 쓰는가 하면 또 한쪽에서는 먼지를 자 욱이 일으키며 말달리기를 했다. 특히 농우 지역은 기병이 중요했다. 틈을 엿보며 당나 라를 침략하는 티베트나 돌궐, 위구르는 언제나 말을 타고 기습 전을 펼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말을 타고 사방을 누벼온 그들 을 상대하는 데 보병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해나 가을이 깊어지고, 들풀이 누렇게 시들 때쯤이면 어 김없이 북풍과 함께 말을 타고 내려온 그들이 먼 발치에서 서성 대곤 했다. 불모지에서 유목을 하며 사는 그들은 이제 막 추수가 끝난 중국인들의 곡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떼를 지어 농우 부근 으로 약탈을 나서는 것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사나운 그들을 몹 시 두려워했다. 멀리서 말울음 소리만 들어도 중국 사람들은 공 포에 떨어야만 했다. 아주 먼 옛날 한나라 이전부터 그들과 싸우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을 구슬리는 데 온 힘을 쏟아온 것이 중국 사 람들의 역사였다. 오죽 시달렸으면 진시황이 그들을 방비하기 위해서 만리장성을 다 쌓았을까 을지마사는 농우절도부에서 병사들이 훈련하는 광경을 보면 서 어렸을 때 주강 남쪽 마을에서 나라가 들려주던 고구려 민족 의 씩씩한 무용담을 떠올렸다. 어린 을지마사는 태조왕, 광개토왕, 을지문덕 , 연개소문, 양만춘 장군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피가 끓어올랐었다. 아! 우리 조상들은 그처럼 영용했건만 지금은 남의 나라 포로로 끌려와 이지경이 되다니,,, . 그때 고 선지의 목소리가 을지마사의 상념을 깼다 '병영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겠소?" 두 사람이 연병장을 가로질러 본부 막사 쪽으로 걸어가자 병 사들이 우르르 달려와 모두들 고선지에게 인사를 했다. 당시 고 선지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부병마절도사의 지위에 올라 있었 다. 부병마절도사라고 하면 병마절도사 바로 다음 자리, 지군 의 총지휘자였다. 그는 처음에 아버지 고사계를 따라 싸움에 나 가 용맹을 떨쳐 안서군의 유격장군이 되었다. 그 후 승진을 거듭 해서 엔치의 진수사로 있다가 농우의 부절도사에 올랐다. 그는 말타기, 창칼쓰기 , 활쏘기 등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출중할 뿐만 아니라, 병사들을 잘 다스려서 군대에 들어온 지 10년도 안 되는 신출내기로는 전무후무하게 큰 출세를 한 것이다. 또 당시 농우에 유배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들의 뒷배경도 무 시할 수는 없었다 교활한 당나라 조정이 고구려 포로들을 멀고 먼 농우에 데려다가 버린 것은 첫째 포로들이 다시 고구려 땅으 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멀리 격리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다 음으로는 고구려 포로들로 하여금 그들을 괴롭혀온 이민족과 싸 우게 하자는 이이치이, 오랑캐를 이용해서 다른 오랭캐를 다스림)적인 발상이었다 "을지 아우, 저기 저 병사들이 보이지요? 대부분이 고구려인 들이 오." "예, 고구려 병사들이라구요? 그게 사실입니까? 을지마사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바로 눈앞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병사들이 고구려 사람들이라니. "어떻게 고구려인 병사들이 저렇게 많지요?" 고선지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 내막을 설명했다 중국 사람 들은 자기네들 한족이 없는 불모지에서 세력이 강한 토박이 위 구르인들을 병사로 쓸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당나라의 지배에 불만을 품은 그들을 군사로 쓰면 반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해서 였다. 그래서 떠돌이인 고구려 젊은이들을 모아 훈련을 시킨 다 음, 전방인 안서나 북정 등으로 보내 싸움을 시켰다 젊은이들뿐 만이 아니었다. 농사를 짓는 고구려 백성들까지도 가만두지 않 았다. 당나라는 신장 위구르의 초입에서 살고 있는 고구려 백성 들을 단결병으로 얽어매 농한기에 군사 훈련을 시켰다 가 외적 방비에 동원했던 것이다.- 그때 고선지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때가 오면 저 병사들이 고구려를 위해 유용하게 쓰여질 것이 오." "그래 요?" 그러나 그때가 언제인가 과연 그런 날이 올 것인가. 을지마사 는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압도되어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새로 운 기대가 꿈틀대며 벅차올랐다. 을지마사는 그날 이후 매일같이 고선지를 따라 병영으로 출근 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깊이 생각해 보았다. 이제 와서 모 두 죽임을 당했다는 주강 남쪽 마을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차 라리 농우에 남아 고선지와 함께 행동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 나 고구려를 위해서 무엇인가 희망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하루 는 넌지시 고선지에게 청을 넣었다. "선지 형, 나도 군인이 되면 어떻겠소? 고선지가 을지마사의 진의를 확인하려는 듯 빤히 보았다 '진정으로 하는 말이오?" "그렇습니 다 " 고선지는 을지마사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보고는 그의 청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을지마사는 생각지도 않았던 당나라 군인이 되었고, 또 고선지의 배려 덕분에 군관의 지위로 임명되었다. 을지마사는 천부적인 군인이었다. 허우대도 컸고 힘도 남달리 좋았다 다음날부터 을지마사는 진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무술을 닦았다. 그의 무술이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것 을 보고는 고선지마저 감탄했다. "을지 아우는 머지않아 중국에서 제일가는 장수가 되겠어. "아니오 나는 이담에 고구려 장수가 되는 것이 소원이오." "딴은 그렇군." 고선지가 실수를 깨닫고 얼른 둘러대었다. 두 사람은 의미있 는 눈길을 서로 주고받았다. 며칠이 그렇게 눈 깜짝할 새 지나가더니 이제 한가윗날이 내 일로 다가왔다. 그러나 온 집안 식구들이 애타게 기다렸건만 여 옥은 종내 나타나지 않았다. 조바심이 난 을지마사는 별채 마당 으로 나와 동산으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중 얼거렸다. "오늘까지 온다고 했는데,,,,,,." 다음날 새벽이 밝아오고 한가윗날이 되었다. 장만한 음식을 먹으며 흥겹게 떠드는 사람들은 집안의 하인들뿐, 정작 주인들 방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한가윗날부터 이제나저제나 소식이 올까 목을 빼고 기다린 지 열흘이 지났다. 이제 그들의 기다림은 불안감으로 엄습해 왔다. '혹시 여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그들읫 불안한 예감은 적중하고 있었다. 여옥은 유랑가무단에 팔린 몸이라 중국 천지를 끌려다니며 밤 낮으로 혹사당했다. 돈이라면 환장을 하는 중국 사람들은 손님 이 있다 싶으면 낮이고 밤이고 춤을 추게 해 아침에 일어나면 두 다리가 퉁퉁 부어올라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몰인정한 중국 사람들은 욕설을 퍼붓고 걸핏하면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유랑극단에서 춤을 추는 여 자들에게 몸을 팔게 하거나 자기네들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덤 비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슨 예의가 있고 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춤추는 여자들이 임 신을 해서 배가 나오고 몸이 무거워지면 춤을 못 추게 되어 자기 네들이 손해를 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춤추는 여인의 계약 만 기가 2 3개월쯤 남았다 싶으면 그들은 돌연 야수로 변했다 그 리고 밤마다 돌려가면서 처녀를 능욕했다. 그래서 유랑극단에서 만기가 되어 몸값을 치른 처녀들은 만신 창이가 되어 나왔다. 문제는 처녀들이 순결을 짓밟혔다는 그 자 체보다는 뭇사내들에게 윤간을 당한 후 심적으로 좌절해 버리는 데 있었다. 그런 몸으로 바깥 세상에 나와도 막상 찾아갈 곳이 없었다 다 행히 임신이 되지 않아 홀몸으로 나오면 청루에 떨어져 몸을 팔 다 종당에 남의 집 첩으로나 팔려 가면 그나마도 다행이었다 그 도저도 못하거나 배가 불러서 나오는 고구려 여인네들은 중국 사람들의 종살이로 갖은 구박을 당하면서 일생을 보내야 했다 여옥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여옥의 만기가 두 달쯤 남았을 때 였다. 하루는 밤공연까지 끝내고 숙소로 돌아와 파김치가 되어 쓰러 져 있는데 갑자기 극단주가 부른다는 것이었다 극단주는 40대 초반의 중국인으로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온 음험한 인상의 사 내였다. 바로 그 극단주가 야밤에 고구려 처녀를 불러내는 이유 는 이 유랑극단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여옥은 오들오들 몸을 떨며 새파랗게 질렸다 "언니 !" 한방에 있던 고구려 처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여옥에게로 쏠렸 다. 그녀들은 드디어 여옥에게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누 구 한 사람 입을 열 처지가 못 되었다. 여옥의 신음소리가 다시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언니 ! 나 어떡해." 그때 방 밖에서 기다리던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빨리 나오지 못해 ? 가장 나이들어 보이는 처녀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여옥아, 너만은 몸성히 나가기를 바랐는데,,,, ." 고구려 유랑극단에서는 여옥의 나이가 가장 어렸다. 또 나이 에 비해 말수가 적고, 행동이 조신해 같이 춤을 추는 나이든 처 녀들은 평소에 여옥을 친동생처럼 아꼈다. 그녀들은 여옥이가 몸이 풀려 바깥 세상으로 나가면 언젠가 여옥을 찾아왔다가 두 번씩이나 몰매를 맞고 쫓겨난 그 고구려 청년과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못다 이룬 자기네들의 한을 보상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옥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마침내 방문을 왈칵 열어젖히는 서슬에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 던 여옥이 그만 푹 고꾸라졌다. 두 놈의 중국인 사내가 들어오더 니 여옥을 낚아챘다. 사내의 손이 몸에 닿자 여옥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악! 이 광경을 보다 참지 못한 여인 한 명이 여옥을 감쌌다. 좀전 에 여옥을 걱정해 주던 나이든 고구려 처녀였다. "여보세요, 여옥이는 오늘 몸이 아파요. 당신네들은 인정사정 도 없어요? 순간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중국인 사내가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는 주먹에 맞아 나이든 고구려 처녀가 쓰 러졌다. "이 고구려 쌍년이 어디다 대고 지랄이야? 뒤이어 여옥이 질질 끌려 나갔다. 여옥이 아무리 발버둥거려도 두 놈의 힘을 당해낼 수도 없었지만, 자기를 아끼던 언니가 편역 을 들어주다 두들겨 맞자 방안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여옥은 두 사내에게 양쪽 옆구리를 붙들린 채 질질 끌려 극단 주의 방문 앞에 이르렀다. 이윽고 방문이 열렸다. 문턱을 넘어선 여옥은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이제 자신에게는 죽음보다 더 끔찍한 치욕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방안에서는 극단주가 누군가와 한창 말다툼을 벌이 고 있었다. "안 된다니까? 극단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뒤이어 굵직한 다른 사내의 소리가 들려 왔다. "그년은 내가 전부터 점을 찍어 놓았습니다요_ 그년만은 내게 곱게 넘겨 주시오." 마치 연약한 토끼 한 마리를 놓고,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먼저 잡아먹겠다고 으르릉거리는 꼴이었다 "어허, 이 바보 같은 자식! 그러니까 내일부터 너에게 준다고 했잖아." 극단주에게 애원을 하고 있는 놈은 언젠가 장안에서 두 번씩 이나 을지마사를 두들겨팬 그 사내였다 '그게 아니고 모처럼 나도 홀아비 신세 면하고 싶어서 그럽니 다요, 그래서 개를 특별히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이자식, 이제 보니 너 정신나간 놈이구나 그래 세상에 계집 이라고 여옥이 하나뿐이냐?" 결국 사내는 여옥을 끌고 온 다른 두 놈에 의해 방 밖으로 끌 려 나갔다. 이제 방안에는 극단주와 벽을 향해 돌아앉아 있는 여 옥이 단둘이만 남았다. 극단주의 탐욕스런 시선이 여옥의 가녀 린 몸뚱이를 훌어 내려갔다.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온 얼굴에 비 로소 만족스런 미소가 흘렀다. 야들야들한 처녀의 알몸에 올라 타 맘껏 유린하는 일은 생각만 해도 온몸이 쩌릿쩌릿해졌다. 그는 음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여옥이 너 알지?" "오늘밤 나를 즐겁게 해주면 너한테도 이로을 거야 " 그러나 여옥의 귀에는 그자의 열에 들뜬 목소리만 윙윙거릴 뿐 들려 오는 것이 없었다. "너 나갈 때 노잣돈이라도 듬뿍 줄 테니까 잘해봐 " 극단주는 더 이상 못 참-다는 듯이 씩씩거리며 여옥에게 와 락 달려들었다. "악? 동시에 여옥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다시 방안은 잠잠해졌다. 극단주의 손이 민첩하게 움직이며 여 옥의 치마끈을 풀어 내리자 허연 허벅지살이 보였다 그의 손은 다시 속고쟁이를 더듬었다. 그리고 속고쟁이마저 내리려는데 그 의 충혈된 눈에 문득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피였다. 붉은 피가 여옥의 입 속에서 거품처럼 흘러나와 창백한 뺨을 적시고 있었 다. 극단주가 여옥을 덮치는 순간 여옥은 악 소리를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해 혀를 깨물어 버렸던 것이다 "허어, 이게? 극단주는 불끈 화가 치밀어오르는 모양이었다. 치켜올라간 손 이 사정없이 여옥의 뺨을 후려쳤다 극단주의 우악스러운 손이 그녀를 후려칠 때마다 창백한 얼굴이 좌우로 쓰러졌다 여옥은 이미 실신했는지 반응이 없었다. 그때였다. 여옥을 때리던 극단주가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지 르며 여옥의 몸 위로 푹 고꾸라졌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움직 이지 않았다 붉은 피가 여옥의 몸 위에 널브러진 극단주의 등을 벌겋게 적시며 흘러내렸다. 방안에는 웬 사내가 피묻은 칼을 들 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이 일로 해서 고구려 유랑극단은 하루아침에 풍지박산이 되어 버렸다. 오갈 데 없는 고구려 여인들은 남의 집 종으로 들어갔 다 여옥을 감쌌다가 두 놈의 사내에게 주먹질당했던 연화라는 고구려 여인과 두 명의 다른 여인네들은 여옥을 친동생이라고 속이고 함께 낙양성의 한 청루로 들어갔다. 여옥은 그날 밤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시름시름 앓아누어 오 랫동안 일어나지를 못했다. 청루의 구석방에서 밤낮으로 열에 들떠 신음을 하다가도 얼핏 정신이 들 때마다 그녀는 힘없는 입 술을 달싹거렸다. "을지마사? 여옥의 뺨 위로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을지마사,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녀가 멀리서 반짝이는 별빛처럼 을지마사의 환영을 찾아 허 공을 헤매는 동안 이미 끊어진 것으로 생각되었던 을지마사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한 발짝씩 다가서고 있었다. 농우 병영에서 매일같이 고된 훈련을 하고 있 던 어느 날 고선지가 뜻밖의 말을 했다 "을지 아우, 이번에 장안으로 가게 되었네 " "장안으로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응, 조정에서 나를 부른다네 ." "그럼 ? 고선지가 씩 웃으면서 을지마사의 등을 토닥거렸다 "여부가 있나 을지 아우도 함께 가네." 고선지의 말을 들은 을지마사는 몹시 흥분이 되었다. 장안으 로 가면 여옥의 행방을 수소문해 볼 수 있다는 희망에 가슴이 부 풀었다 "선지 형, 그런데 무엇 때문에 조정에서 부르는 것일까요? "글쎄, 군사 비밀이라 그런 것은 나도 알 수 없네." 을지마사는 슬그머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곁에 있던 고선 지가 눈치를 채고는 을지마사를 안심시켰다. "설마 나쁜 일이야 있을라구 " "그래도 우리는 중국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좌우지간 가보기로 하세 " 다음날 아침 고선지와 을지마사 그리고 10여 명의 군사들이 장안을 향해 출발했다 농우에서 장안은 3천 리가 넘는 먼 길. 그러나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의 신분이 군인이었고, 더 군다나 왕명을 받고서 가는 길이라 역이나 판에 들를 때 마다 숙식을 제공받고 지친 말을 바꾸어 탈 수가 있었다 이렇게 10여 일이 지난 다음에야 고선지 일행은 장안에 도착했다 고선지 일행은 역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아침 승상부로 찾아갔다 당시의 재상은 이임보 이임보라는 위인은 체 구도 작고 비쩍 마른데다가 생김새도 볼품없었다 그런데도 당 나라 최고 지위인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라간 것으로 보아 지모 가 출중하든지 아니면 아첨에 능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재상 이임보는 고선지를 면대하자 대뜸 여자처럼 교태스러운 목소리 로 물었다 "그대가 고려인 고선지인가? "그렇습니다. 농우도 부절도사 고선지 입니다." "축하하네 ." 우선 이임보의 안색이 밝아 마음이 놓였다. "황제께서 자네를 기다리니 서둘러 입궁하세 ." 고선지와 을지마사는 이잉보의 뒤를 따라 통명문을 지나 태극궁으로 들어갔다. 당현종이 거처하는 태극궁은 보장왕 을 비롯한 고구려 포로들이 장안으로 끌려와 심문을 당하던 함 원전과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궁궐 안 넓은 뜰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해 화려하면서도 유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당나라 황제 현종이 전각에서 양귀비를 데리고 희롱하다가 전 각 앞으로 다가서는 이임보와 고선지 일행을 흘끗 쳐다보았다. "재상, 아침부터 웬일이오? 당현종은 병약했던 당고종과는 달리 허우대가 멀정했다. 적당 히 살이 오른 풍채가 그런 대로 위엄이 있어 보였다. 재상 이임 보가 교태스런 목소리로 아뢰었다. "네, 화창한 이 봄날에 아침부터 상감마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린 것은 아닌지 황공하오이다." 체구가 오종종한 이임보의 입에서는 매끄러운 말이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당현종은 이임보의 말은 뒷전이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늠 름한 체구의 고선지에게 눈길을 주었다. "저 사내가 누구요?" "바로 황제께서 기다리시는 농우도 부절도사 고선지를 대령 시켰습니다 " 그제서야 당현종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오호! 그대가 바로 위구르를 제압하고 있는 고선지라고 장부답구먼 " 고선지는 침묵했다 당현종도 희롱하던 양귀비를 물리고 다시 고선지를 돌아다보았다. "그대도 선고 당고조 이래로 서장(티베트)에게 당한 치욕을 알고 있을 터,,,, ." "그대를 행영절도사에 임명하는 터이니 반드시 서역을 무찔러 일월을 가렸던 근심을 없이하라." 순간 고선지는 숨이 멎는 듯했다. 뜻밖에도 자신에게 서역 토 벌 총사령관의 직책이 내리다니 ,,,,. 당나라에 포로로 붙들려온 고구려 백성의 자손으로서는 처음으로 중책에 임명된 것이었다 600여 년 전 한나라 때 장건이 서역을 정벌했던 이래로 그 누구도 넘보지 못했던 서역 정벌의 일대 드라마가 고선지에 의 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객사로 돌아온 고선지는 밤늦게까지 잠을 이를 수가 없 었다. 고선지가 이생각 저생각에 몸을 뒤척거리는데 이 낌새를 알아챈 을지마사가 고선지에게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선지 형, 자랑스럽습니다 " "그게 아니다. 너는 아직 모른다." 고선지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럼 ? "까닭이 있다." "??" 잠시 후 가벼운 한숨 소리에 이어 고선지가 입을 열었다 "농우의 고구려 유민들을 의식한 거야." "무슨말인지, . " 고선지의 음성이 갑자기 낮아지면서 곁에 누워 있는 을지마사 의 귀에 겨우 들릴락말락하게 속삭였다. "고구려 유민들을 전쟁터에 보내 세력을 약화시킬 수 있으니 좋고, 서역을 정벌하면 비단길도 보호하고 자기네들의 원수도 갚을 수 있으니 두루두루 좋은 거지 ." 뒤늦게나마 을지마사도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역시 고선지 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럼 왜 그 직책을 떠맡았나요? "쉿, 조용히 해라. 때를 엿보는 거다 " 을지마사는 더 이상 물어 보기도 뭣해서 슬쩍 화제를 돌렸다 "선지 형, 이번길에 여옥이를 찾아봐야 되겠지_ "여옥이 ,,, 여옥이 그렇지. 나는 황제에게서 부월출전을 상 징하는 큰 도끼)을 받은 이상 장안에서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 "네가 내일부터 한 3일 동안 수소문해 보아라." 을지마사는 이내 여옥의 얼굴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자 기는 지금 여옥과 만났던 장안 땅에 와 있는 것이다 참으로 얼 마 만인가 이번에는 기필코 여옥을 찾아내 가슴속을 채우고 있 던 그리움과 아픔을 떨쳐 버리리라. 그리고 다시는 헤어지지 않 으리라 다짐했다 다음날 고선지는 서장 정벌군의 편성과 작전 계획을 상의하기 위해 소관부서인 병부상서로 출근했다. 을지마사는 여옥의 행방 을 찾기 위해 온 장안성을 뒤지고 다녔다 당시의 장안은 동양에 서 가장 큰 도시답게 모여든 사람들도 많고 물산들도 풍부했다 저잣거리에는 서역에서 온 진귀한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 고, 그 주변에는 짐을싣고 먼길을 온 키 큰 호마와 낙타 들이 어슬렁거렸다. 그러나 을지마사는 처음 기대와는 달리 막상 찾아갈 만한 곳 이 없었다. 넓고 넓은 장안 천지에서 뜨내기나 다름없는 자신이 고구려 처녀 여옥을 찾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을지마사는 무작정 장안 거리를 헤매며 오가는 여인네들의 얼굴 만 살피고 다녔지만 그렇다고 여옥이 을지마사의 코앞에 불쑥 나타날 까닭이 없었다. '그럼 혹시 ?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지친 다리를 쉬고 있을 때 문득 머리 속 을 스쳐가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을지마사는 벌떡 일어나 서둘 러 걸음을 빨리했다. 을지마사는 1년반 전 여옥을 처음 만났던 저잣거리로 가고 있었다 고구려 가무단은 유랑극단이니 어쩌면 장안으로 다시 돌아와 공연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을지마사가 저잣거리로 들어서자 아니나다를까 풍악소리가 들려 왔다 분명 고구려 음악이었다. 이어서 유랑극단의 흰 장막 이 시야에 들어왔다 을지마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장막 쪽으로 다가갔다 장막 안에서 낯익은 음악소리가 울려 나오고 상당수의 구경꾼 들이 모여 장막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을지마사는 사람들을 헤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틀림없는 고구려 가무단이었다. 열대 여섯 명의 고구려 처녀들이 원형으로 둘러서서 장단에 따라 색 동으로 된 긴 팔소매를 하늘로 뻗었다가 다시 팔꿈치를 뒤로 꺾 어 내리면서 고구려 춤을 추고 있었다 '-여옥이 .' 을지마사의 시선은 허둥지등 춤추는 아가씨들의 얼굴을 훌었 다. 그러나 그곳에 여옥은 없었다. 그러면? 저 장막 안에 있는 것일까? 을지마사는 다시 구경꾼들 사이를 헤집고 나와 장막 안 으로 들어갔다 장막 안에는 남자와 여자 몇 명이 있었다 그런 데 어찌 된 일일까? 그곳에도,,,,,, 여옥은 없었다 을지마사는 허탈감으로 휘청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며 옷을 꼬매고 있 는 한 중년 여자에게 다가갔다. "저 혹시 고구려 사람? 눈이 오목하게 들어가고 콧날이 오뚝한 그 중년 여인네는 첫 눈에도 고구려 여인의 모습이었다 여인네는 불쑥 나타난 당군 복장의 젊은 사내의 물음에 당황했는지 불안한 눈길로 건너다보 았다. "나도 고구려 사람이오. 을지마사라고 합니다. 그제서야 그 중년 여인은 안도하는 빛을 보였다. "그런 데 ?" "여옥이라는 고구려 처녀는 어디 있소? '여옥이 라구요?" 을지마사의 안타까운 물음에 그 중년 여인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아가씨는 이곳에 없는데요." "고구려 가무단에서 춤을 추는 아가씨요." 중년 여인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여옥이라는 이름의 처녀는 없다니까요." "없다구요? 작년에 바로 이 곳에서 그 처녀를 만났었소." 중년 여인은 그제서야 맘속에 짚이는 것이 있었던지 고개를 끄덕 였다. "아하, 댁내는 뭔가 잘못 알고 있구먼요." "??" "그게 아니 라, , ,,, ,." 그 중년 여인의 대답인즉, 고구려 패망 이후 당나라 온 천지에 고구려 가무가 크게 유행을 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흥행을 하는 가무단만도 수십 개라고 했다. 그러니까 을지마사가 찾아든 가 무단은 작년에 여옥을 만났던 그 가무단이 아니었다. 을지마사 의 실낱같은 기대가 간단없이 무너졌다 그럼 어디 가서 여옥을 찾는단 말인가. 을지마사는 가슴이 답답해 왔다. 그때 그 중년 여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여옥,,, 여옥,,,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혹시 펴라 가무단에 있던 그 참하고 춤 잘 추는 아가씨가 아 닌지 모르겠어요." 을지마사는 눈이 번쩍 빛났다. "그 펴라 가무단이 지금 어디에 있소?" "펴라 가무단 말이죠? 그러나 을지마사의 혹시나 하는 한가닥 희망은 중년 여인의 다음 말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낙양에서 산산조각나 버 렸어요." 예나 지금이나 떠돌이 유랑극단은 툭하면 없어지기도 잘하고 그런가 하면 비온 후 죽순 돋듯 생기기도 잘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언제입니까?" "하, 글쎄요. 지금으로부터 여덟 달 전쯤,,,,,, " 을지마사의 마음속에 짚이는 바가 있었다 펴라 가무단이 없 어진 게 8개월 전이라면 지난해 추석 석달 전쯤이 되는데 왜 여 옥이는 자기와 만나기로 한 농우로 오지 않았을까 여옥에게 필 시 곡절이 있었으리라. 문득 을지마사의 마음속에 지금까지와는 또다른 불길한 그림자가 덮쳐 왔다 을지마사는 그날 저녁 어둑해서야 숙사로 돌아왔다. 고선지가 먼저 퇴청을 했는지 후원에 있는 객사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을지 마사가 무심코 객사 가까이 접근했을 때 창호지를 바른 객창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이고 두런두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와 있는 것일까? 을지마사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고선지의 얼굴이 들어오 고 그 맞은편에 낯선 손님이 앉아 있었다. 흰 얼굴에 턱수염을 보기좋게 기른 귀공자 같은 인상의 사내였다 "을지마사, 인사드려 라 내 아우올시다." 다시 고선지가 을지마사를 돌아보며 손님을 소개했다. "이분은, , " 을지마사가 갑작스런 대면이라 겸연쩍어하는데 고선지의 다 음 말이 이어졌다. "당나라 조정에서 우의장군으로 계시는 왕사례 어른이시다." '저는 을지마사라고 합니다. 아우처럼 생각해 주십시오." "지나친 말이오. 함께 뜻을 모아 봅시다." 을지마사가 언뜻 보기에 왕사례는 30이 조금 넘었을 것 같은 중후한 분위기에다 왠지 보통 인물 같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귀공자같이 생겼으나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는 위엄과 기개가 있었다. 그럼 왕사례는 어떤 인물인가 왕사례는 중국인 가서한의 호적에 입적을 하고, 성을 왕씨로 바꾸어 버렸다 그 후 당나라 조정에서 권세를 누리던 가 서한의 추천으로 당나라 조정에 중용되어 , 고구려 포로 후손들 가운데서 가장 출세의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 그날 밤 왕사례는 같은 고구려 유민의 자손인 고선지가 서역 토벌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을 알고는 인사차 찾아온 것이었 다. 고선지와 왕사례 두 사람은 벌써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 던 듯 더 이상 을지마사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하던 이야기를 계 속했다 "그러니까 고 형의 서역 정벌은 우리 당나라의 위상을 한껏 높여줄 것입니다 " 왕사례가 고선지의 서역 출정을 축하해서 한 말이었다. "과찬의 말씀이오." "과찬이 아닙니다 이번 고 형의 서역 정벌이 성공하면 우리 고구려 유민들도 중국땅에서 기를 펴고 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고선지의 대답은 조금 달랐다. 그는 오랫동안 가슴속 에 품어온 굳은 결의를 슬그머니 내비쳤다. "고구려 유민들이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해야만 할까요?" 그때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을지마사가 숨을 훅 내쉬었다 그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 내용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중국 천하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두 사 람의 고구려인 예비 영웅 고선지와 왕사례의 생각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고선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왕 공, 내가 이런 말을 드리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 다만 " "언젠가 우리 후손들이 조국 고구려를 되살려야 할 것 아닙니 까? 왕사례는 순간 당황하는 빛을 띠었다 고선지는 왕사례의 긴 장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은 비록 남의 나라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 고국 땅에서 뿌리를 박고 살아야겠지요," 고선지는 모처럼 같은 민족의 지기를 만나 오랫동안 가슴속에 서만 키워 왔던 고구려 민족의 한을 토해 냈다. 그러나 왕사례는 고선지의 의지와는 사뭇 달랐다 농우라는 변방에서 고구려 포 로들의 처참한 생활을 보면서 자란 고선지와 행운이 따라 일찍 부터 당나라 장안에서 중국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 성장한 왕 사례의 의식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왕사례가 입을 열었다 "과연 그렇게 될 수 있겠소? "꼭 그렇게 되어야 하겠지요." "그게 언제가 될까요? "언제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힘 을 기른 다음일 것이오." 그때 난데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방안에 있던 세 사람은 간이 떨어지는 듯 놀랐다 뜻밖에도 7 척 거구에 검붉은 얼굴을 하고 눈이 부리부리한 장한이 문지방 을 넘어서고 있었다. 장한은 체구에 걸맞게 목소리도 우렁했다 "형님들! 해도 너무하오." 그 7척 거구의 장한은 대뜸 고구려 말로 방안에 있는 사람들 을 위압하듯 나무랐다. "? ?" "언제까지 기다린단 말이오? 중국놈들 학정에 고구려 사람들 씨가 말라 가는데,,,,,,." 그는 얼굴이 곱상한 왕사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래도 허 우대가 건장한 고선지를 쏘아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순간 고선지의 부릅뜬 눈이 무섭게 빛났다 "형씨가 대체 누구길래 아닌 밤중에 남의 방에 들어와서 큰소 리를 지르는 게요?" 고선지의 차분하면서도 위압적인 질책에 그 장한도 제정신이 드는지 움찔했다 "허 ! 분통이 터져서 그만,,,, 나는 평로절도독부에서 비장으 로 있는 이회옥(훗날 이정기로 이름을 바꿈)이라고 합니 다." "비장 이회옥? 고선지로서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고선지와 왕사례는 출세 가 빨라 당나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만큼 지위가 올라가 있었 지만 이정기는 나이도 어렸고 그때까지도 일개 비장이라는 대수 롭지 않은 지위에 있었으니 고선지나 왕사례가 일찍이 그의 이 름을 들었을 까닭이 없었다.) 이정기는 마침 평로절도부의 공무연락으로 장안에 왔다가 같 은 고구려 동족인 고선지가 서역 정벌군 총사령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고선지를 만나러 객사로 찾아왔다가 우 연히 문밖에서 고선지와 왕사례가 하는 말을 엿듣고는 분김에 방안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럼, 이 형은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복안이라도 가지고 있소? 고선지가 물었다. "있고말고. 그러니까 제가 고선지 형님을 찾아온 것 아니겠습 니까? "어떻게? "이제부터는 우리가 고구려를 망하게 한 당나라를 때려부수 고 민족의 원수를 갚을 차례입니다." 순간 방안에 있던 사람 모두가 아연 긴장했다. 그 가운데서도 왕사례는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자신이 이정기라고 밝 힌 장한의 태도는 조금도 주저하는 빛이 없었다. "놈들의 심장부인 장안에는 왕사례 형님이 있고, 서쪽에는 고 선지 형님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초 나도 동북쪽에서 버티고 있 습니 다." "만약 고선지 형님과 내가 동과 서쪽에서 일시에 진격하고, 왕사례 형님이 장안성내에서 내응을 한다면 당나라도 그때는 끝 장입니다." 고선지와 왕사례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불쑥 뛰어든 이 정기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이정기 의 마지막 말은 목구멍에서 피를 토하는 듯했다. "형님들! 고구려 천년 사직의 원수를 갚읍시다. 바로 이때요.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 민족의 천추의 한을 씻을 길이 없습니 다? 지난 1200년 동안 우리의 역사 속에서 철저하게 매장되었던 -정기는 과연 누구였던가. 우리의 일부 선조들, 통일신라시대 이후의 유생들은 패망한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중국과 처절하게 대적한 이정기가 동족이라는 사실조차 입에 올리기를 꺼려했다. 부모의 나라 중 국에 반역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날 밤 장안성 객사에서 만난 세 명의 고구려 예비 영 웅들은 각기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만 이정기의 갑작 스런 출현으로 방안은 팽팽하게 긴장된 공기로 터질 듯했다 나이 어린 을지마사는 세 사람의 대화에 끼이지도 못하고 한 구석지에서 잠자코 앉아서 듣고만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에 가슴이 끓어올라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을지마사와 아소미네 가 떠나온 주강 남쪽에서 중국 사람이 되기를 거부한 고구려 유 민들이 당나라에 의해 몰살당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쳤다 그때 팽팽히 죄었던 분위기를 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왕사례였다. 귀공자다운 그의 얼굴은 몹시 굳어져 있었다. 그의 말소리는 표정만큼이나 단호했다. "난 그만 가겠소. 이런 말을 하자고 고 형을 찾아온 것은 아니 었소." = 모두들 놀라 왕사례를 쳐다보았다. "그럼 왕 형은? 갑작스러운 일이라 고선지도 당황했다. "그렇소. 똑똑히 기억해 두시오. 당신네들이 그런다고 해서 이미 죽어 버린 고구려가 다시 살아날 까닭이 없소." 역시 고구려 성을 버리고 중국인으로 살고자 했던 왕사례다웠 다 고선지가 마주 일어서면서 왕사례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왕 형, 그래도 이렇게 섭섭하게 헤어질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고선지의 목소리는 뒤이어 터져나온 이정기의 호통소 리에 묻혀 버렸다. "저런 자는 필요 없으니 백 번이라도 가게 내버려 두십시오." 왕사례는 이정기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토방으로 내려섰다. 그러나 그에게도 고구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은 어찌할 수 없 었던가. 그는 방안을 향해 한마디를 내뱉고는 어둠 속으로 총총 히 사라져 갔다. 그렇게 그가 떠나고도 그의 말은 방안에 있는 사람들의 귓바퀴를 맴돌며 긴 여운을 남겼다 "내 선대가 동족인 것을 생각해서 당신네들이 역적모의한 것 을 고변하지는 않겠소." 그날 밤 고선지, 이정기 두 사람과 결별한 왕사례는 훗날 자신 의 출세를 위해 고구려인이 아닌 중국인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 리고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바탕으로 당나라에 충성을 다하며 일생을 영화롭게 보냈다. 그러나 왕사례가 자리를 박차고 돌아간 후에도 방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고선지 이정기, 을지마사는 결코 왕사례처럼 될 수 는 없었다. 물론 세 사람이 걸어간 인생 또한 제각기 달랐다. 방안에는 촛불만이 밤을 태우고 있었다. 고선지가 어색한 분 위기를 누그러뜨릴 양으로 먼저 침묵을 깼다. "이 형, 때를 기다립시다" 이정기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기대가 무너져 버린 이상 그로서도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고선지 형님 , 무운을 빕니다." 이정기가 일어서 밖으로 나왔을 때는 벌써 밤이 이슥했다. 아 직도 매서운 바람끝이 옷섭을 파고들어 으스스 추웠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듯한 공허함이 찬바람보다도 더 참기가 힘들었다 이정기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렇다! 나 혼자서 라도 하는 거다." 이정기가 떠나간 다음 고선지와 을지마사는 한동안 꼼짝도 하 지 않고 앉아 있었다 을지마사의 가슴속에는 묘한 아쉬움이 남 아 있었다. 그것은 이정기에 대한 것이었다. 을지마사 또한 혈기 왕성한 젊은이인지라 이정기의 화끈한 행동에 마음이 끌리고 있 었다. 그때 고선지의 우렁한 목소리가 을지마사의 상념을 깼다 "을지마사, 무슨 생각을 그처럼 골똘히 하는 거냐? "예? 아닙니다." 을지마사는 대답을 어물거렸다 "내일 장안을 떠나야 할 것 같다 "내일이라구요? 을지마사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렇다. 서역 정벌군이 다섯 달 후에 안서도호부에서 집결하 기로 되어 있다" "그러 면?" 고선지가 무슨 말을 할 듯이 주춤거리는 을지마사를 건너다보 았다. 이윽고 을지마사가 결심이 선 듯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 았다. "저는 이곳에 남았다가 뒤쫓아 가겠습니다." "왜 ? "아무래도 여옥을 찾아 낙양으로 가보아야겠습니다." 고선지도 을지마사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촛불이 꺼졌다. 짙은 어둠이 몰려들었다. 어둠이 눈에 익자 뜰에 심어 놓은 시누대 이파리들이 달을 받아 창호지 문 에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을지마사는 좀처럼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고구려의 딸 여옥 고구려의 기막히게 아름다운 처녀를 10만 냥에 판다. 낙양성 중심가에 자리잡은 청루 앞에 큼직한 방이 나붙었다. 그리고 그 이색적인 방은 그 앞을 지나다니는 낙양성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온 낙양성과 인근 고을에 까지 -퍼져 갔다. "글쎄,,-,,, 처녀 한 명에 10만 냥이래." "뭣?10만 냥? 처음 듣는 사람들은 좀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시 돈 10만 냥이라고 하면 기와집을 열 채도 사고 남는 거금이었다 처녀값 이 일반 백성들은 평생 동안 구경해 본 일도 없는 거금이고 보니 온 낙양성이 발칵 뒤집힌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처녀래?" "고구려 처년데 보나마나 사람잡게 생겼겠지 ." 당시 고구려 처녀들의 모습은 살색이 노랗고 콧대가 펑퍼짐한 중국 처녀들과는 기본 생김새부터가 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구려 처녀들은 그 윗조상 때의 코카서스인 핏줄의 흔적이 남 아 있어 콧날이 오뚝하고 피부가 눈처럼 희었다. 그래서 고구려 포로 여인들이 노예시장에서 팔릴 때는 다른 곳에서 붙잡아온 여자들보다 3배의 값을 더 쳐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10만 냥은 터무니없이 비싼 몸값이었다. "아니야. 필시 곡절이 있을 거야." 말내기 좋아하는 시정잡배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의견이 분분 "곡절이라니? "아, 거 있잖아? 한번 잠자리를 했다면 남자가 죽어서 나오는 말야." "하, 그럼 소문으로만 듣던 그 명기를 가졌단 말이구 "미련스럽기는 원, ,,,, ,." 시정잡배들은 군침을 흘렸다 알고 보면 고금을 통해 중국 사람들만큼 섹스를 철저히 상품 화한 민족도 드물다. 중국인들은 애당초 여자를 사람의 가죽을 씌워 놓은 가축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냘픈 여체 를 가지고 차마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별의별 해괴한 짓을 다했다. 여자 아이가 돌이 되면 두 발을 단단한 헝겊 쪼가리로 칭칭 묶어서 길렀다. 발의 성장이 멈추도록 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 여자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애 같은 앙징맞은 쪽발을 가지고 뒤뚱거리며 일생을 살아야만 했다. 부모들은 애 당초 딸자식을 재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자기 딸의 발을 다른 여자들 것보다 더 조그맣게 만들어 비싼값에 팔 수 있을까 고심했다. 중국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야만인이라고 천대시해 온 주변국 사람들은 중국의 이러한 풍속을 보고 중국 에는 여자가 부족해서 도망을 못 가도록 하는 방편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중국 사람들은 여자가 어려서부터 조 그만 발로 뒤뚱거리고 다녀야만 여자 성기 주위가 발달해서 남 자에게 오묘한 쾌감을 준다고 믿었다. 어디 이뿐이었던가 한때 중국의 거부들은 단 몇 분의 성적 쾌락을 위해 돈을 주고 여자를 사서 죽인 다음 시간까지 하는 풍속도 있었으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연일 낙양성 시정잡배들의 더러운 입에 오르내리고 있던 주인 공 여옥은 그때까지도 청루 골방에 갇혀 신음하고 있는 신세였 다. 그녀는 대엿새 전에 청루의 사내들에게 느닷없이 끌려 나가 뭇매를 맞은 태독이 가라앉지 않아 뼈마디가 쑤셔 왔다 "빨리 빨리 처먹어. 네가 죽으면 큰 손해니까 '' 방금 전에 청루에서 일하고 있는 한 사내가 썰렁한 찬밥 한 사 발과 반찬 한 가지를 밀어 넣고 가버렸다. 바로 그 곁에서 나이 든 고구려 여인 하나가 눈물을 떨구며 여옥의 입에 억지로 밥숟 갈을 떠넣고 있었다. "이 일을 어쩔꼬! 너를 살리자고 한 짓이었는데,,,,,,."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여옥의 말소리는 차분했다. "언니 , 모두 다 팔자소관인데 너무 걱정 마세요." "어린 네가 우리들 죄업까지 떠맡았구나 " "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것이니까 다시는 그런 소리 말아요." 두 사람의 오고가는 말소리를 들어 보면 오히려 나이 어린 여 옥이 나이든 여인을 다독거리고 있었다. 처음 고구려 여인들이 이 청루에 왔을 때 나이든 여인 세 명은 밤마다 중국인들에게 술시중을 들고 온갖 해괴한 짓을 다 당해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건만 그래도 여옥만은 끝까지 보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어수룩하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 장사를 하는 포주들은 밥값이다, 옷값이다, 치분값이다 하 여 빛을 눈덩이처럼 키워 놓아 청루의 여자들을 꼼짝 못 하도록 붙들어 맸다. 그렇게 진국이 빠질 때까지 뽑아 먹고는 여자의 눈에 잔주름 이 질 나이쯤 되면 무지렁이나 농사꾼들에게 팔아 넘겼다. 중국 에도 여자는 많았지만 밥술이나 먹고 살았다 하면 한 사람이 첩 을 대여섯 명씩이나 거느리고 살아 평생을 가야 여자 구경도 못 한 하층민들은 청루에서 닳을 대로 닳은 퇴물들도 감지덕지하고 사갔다. 여자 장사에 이골이 난 청루에서 몸매가 아담하고 얼굴이 해 사하게 고운 여옥을 언제까지 그냥 놔둘 까닭이 없었다. 고구려 가무단에서 당한 충격이 어지간히 가라앉아갈 무렵 하루는 난데 없이 청루에서 일하는 사내들이 여옥이 들어 있는 골방 문을 박 차고 들어섰다. 그리고는 영문도 모르고 발버둥치는 여옥을 떠 메다가 청루의 안마당에 내팽개쳤다. 청루의 주인인 듯한 비긴 살이 띠룩띠룩 오른 중년 사내가 2층 난간에 서서 큰 눈알을 굴 리며 여옥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년 사내는 여옥이 끌려오자 가 만 내려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고것 참! 고구려 계집답게 앙징스럽게 생겼구나." 여옥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주인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해도 되는 거요? "헤 헤 헤, 무례하다고? 그래도 저년이 주둥아리는 살아 있구 나." 청루 주인은 처음부터 겁을 주었다. "그간에 들인 밥값하고 잠재워준 값이나 내고 그런 소리 해 라. 뻔뻔스러 운 년 같으니 라고.' "밥값? 재워준 값? 여옥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 갔다 그러자 주인 사내는 음흥스 럽게 웃으며 여옥을 다그쳤다 "너 당장 돈을 낼래? 오늘부터 청루에 나올래? "청 루에 ?" "이년아! 다 너 좋자고 하는 일이야. 호의호식시켜 주고 밤마 다 사내맛도 보여 주고,,, ." 여옥이 수치심에 몸을 부르르 떨며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 자 주인 사내가 다시 윽박질렀다. "어서 말해? "나는,,, 나는,,, 그런 일 못 해요." "뭣 ! 내 말을 안 듣겠다구?" "나는 할 수 없소." "고구려 포로 딸년 주제에 아직도 매운 맛을 못 보았구나 여 봐라? 청루 주인은 안마당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옛날부터 매에는 장사가 없느니라. 손 좀 봐주어라." 주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옥을 붙들어온 사내들이 달 려들었다 그리고 혹독한 매질이 그날 해질 무렵까지 계속되었 다. 그러나 한번 독심을 품은 여옥은 개처럼 두들겨 맞으면서도 결코 굽히지 않았다 그날 저녁 초죽음이 되어 업혀 들어온 여옥 의 곁에 둘러앉아 고구려의 세 여인은 서럽게 울었다. 그러나 청루 주인이 그쯤해서 그칠 위인이 아니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한 닷새쯤 지났을까. 여옥은 또 한번 사내들에게 떠매 여 청루 안마당으로 끌려 나갔다. 이번에는 그 흉물스러운 청루 주인의 수법이 달라져 있었다. 여옥이 첫눈에 본 것은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여 인들이었다. 바로 세 명의 고구려 여인들이었다 여옥이 망연자 실해 있는데 2층 난간에서 주인 사내의 호통소리가 들려 왔다. "히히히, 돈을 안 갚으면 개야 개. 너도 저꼴이 되고 싶으냐? 여옥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여옥은 눈물을 닦을 생 각도 하지 않고 주인 사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 빛에는 전에 없던 초연함이 보였다. 그저 순진하고 연약하게만 보이던 여옥이 아니었다. "나,,,,,,." 여옥이 숨을 훅 몰아 쉬었다 "몸을 팔겠어요." "뭣? 몸을 팔겠다구? "그래 요 ." "호, 진즉 그럴 일이지 ." 청루 주인의 큰 입이 함박만하게 찢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 시 곧이어 여옥의 다음 말을 듣고는 벌렸던 입을 다시 다물어 버 렸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몸을 팔았으면 팔았지 조건이란 게 또 뭐냐? "그렇습니다. 10만 냥에 팔아 주시오." 10만 냥?" 10만 냥이 꼭 있어야겠습니다." 여옥은 자기가 이왕 몸을 버려야 할 운명이라면 그간에 신세 를 진 고구려 여인들의 속전을 물어 주고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 다. 청루 주인은 무척 놀랐는지 게슴츠레하게 큰 눈이 왕방울만 하게 툭 불거져 나왔다. 그가 아무리 머리 속을 굴려 보아도 터 무니없는 액수였다. "너 나를 놀릴 셈이냐?" ''남자 손 한번 닿아본 적이 없는 숫처녀요. 만약 내 조건을 들 어 주지 않는다면,,,,,,." "허, 갈수록 가관이구나. 그래. 만약 네 조건을 들어 주지 않 는다면 어쩔 셈이냐?" "내,,,,,,." 순간 청루 주인도 숨을 삼켰다. 그러나 여옥의 표정에는 비장 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내 목숨을 끊어 버리겠소." "아니! 내게 협박을 다 해. 내가 먼저 네 숨통을 끊어 놓을 테 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청루 주인은 앞뒤가 확 막힌 사내는 아니 었다. 자기네들 중국 사람들의 만만디와는 다르게 고구려 사람 들의 성격은 단호하고도 급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드디어 청루 주인은 그 이상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청루 담벼락 에다 방을 써 붙이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물건값이 제아무리 비싸도 세상에는 임자가 있게 마련 이었다. 낙양성 동북쪽에 왕 대인이라고 하는 50고개를 넘긴 부 자 영감이 살고 있었다. 그 영감은 서역과 말장사를 해서 큰돈을 만진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 왕 대인이라는 사람 도 특이한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의 아버지가 고구 려 포로로 끌려온 여자를 사서 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어느덧 소문은 왕 대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왕 대인은 여러 해 전에 상처를 해서 혼자서 살다가 나이가 들어 점차 생활이 불 편해지자 막수라도 얻어 볼까 하고 생각하던 차였다. "허 , 고구려 처녀 몸값이 10만 냥이라고? 그때 왕 대인은 고구려 여인이었던 어머니의 얼굴을 떠 올렸다. "물건이란 제아무리 비싸도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법 사람만 좋다면 10만 냥도 아깝지 않지 ." 그렇게 해서 왕 대인은 선뜻 청루 주인과 흥정에 나서기로 했다. 이 무렵 스무 살이 갓 넘었을까 하는 고구려 청년 한 명이 낙 양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그는 무엇을 찾는지 꼭두새벽부터 온 종일 골목을 비집고 돌아다녔다. 을지마사였다. 그는 장안의 고 구려 가무단에서 만난 여인에게서 들은 막연한 소문만을 믿고 스무 날을 걸어 낙양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낙양은 한나라 때 300년 동안이나 수도였던만큼 넓고 넓었다 그 넓은 천지에 어디로 가서 여옥을 찾는단 말인가. 설 사 여옥이 소문대로 낙양에 있다고 할지라도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면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낙양성내 집집마다 모두 이 잡듯 이 뒤져 보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어서 암담한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을지마사가 낙양성에 들어온 지 며칠 안 되어서 고구 려 처녀를 판다는 소문이 그의 귀에도 들어왔다. 을지마사는 혹 시나 하는 생각에 급히 청루로 찾아가 보았다. 청루에는 그때까 지도 방이 나붙어 있었다. 사람에게는 예감이란 게 있는 것인가. 웬일인지 청루 대문 앞에 선 을지마사는 묘한 흥분으로 몸이 떨 렸다. 대문을 들어서자 작은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진 땅딸막한 문지 기가 버티고 있었다. "이 집에서 고구려 처녀를 판다고 해서 찾아왔소." 문지기는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않고 을지마사의 행색부터 훌었 다. 청루에서 잔뼈가 굵은 땅딸이는 첫눈에 을지마사의 나이로 보나 차림새로 보아 처녀를 사러온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고구려 처녀를 파느냔 말이오?" 을지마사는 다시 한 번 목에 힘을 주고 물었다. 문지기는 을지 마사의 허우대가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던지 시큰등하게나마 대 답을 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벌써 "벌써 팔리다니? 그럼 그 처녀가 팔려가 이곳에 없단 말이 오? "아직 가버리지는 않았소. 흥정을 하고 있는 중이오. 그런데 형씨는 뉘시오? 문지기가 다그쳐 묻자 을지마사의 말문이 막혔다. "아, 나 말이지 . 장안에서 왔소." "장안에서 , 그 먼길을?" "그렇 소 ." "댁네가 사려고? "아, 아니오. 심부름 왔소." "심부름을? 문지기는 미심쩍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별 도리가 없 었는지 을지마사에게 따라오라고 눈짓을 했다. 이렇게 해서 겨 우 문지기의 눈을 속이고, 을지마사는 청루 안채로 들어갔다. 을지마사를 만난 청루 주인도 의심쩍은 눈초리로 을지마사의 위아래를 훌었다 "고구려 처녀는 벌써 팔렸는데..., ." 왕 대인과 흥정중인데도 청루 주인은 문지기처럼 슬쩍 능쳐 보았다. 그러고 나서 을지마사의 눈치를 살폈다. 을지마사는 곁 에서 어른거리는 문지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자에게서 그 처녀가 아직도 이 집에 있다고 들었소." 청루 주인은 대답 대신 을지마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중국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중국말이 아직 서툴어 순간 을지마사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곳이 어디인 가. 만약 자신의 정체가 탄로라도 난다면 사지가 성해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소. 나는 고구려 사람이 오." "고구려 사람? 을지마사는 청루 주인이 눈치 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심호흡을 하고는 적당히 둘러댔다. "장안성내 장 대인 집 서사로 있는데, 그분이 처녀가 쓸 만한가 한번 보고 오라는 부탁을 받고 왔소." 장안과 낙양은 천 리도 넘는 길이라 청루 주인이 장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 까닭이 없었다. 청루 주인은 차츰 욕심이 동했다. "그럼 , 처녀값이 얼만지나 알고 왔소? "10만 냥 아니오? 장 대인은 좀전에 상처를 해서 처녀만 좋으 면 거금을 아깝다 하지 않을 사람이오 " 청루 주인의 표정이 바뀐 것을 눈치 챈 을지마사는 아주 쐐기 를 박아 버렸다. 이윽고 청루 주인은 바깥에 들리도록 큰 소리를 질렀다. "냉큼 여옥이를 불러 와라." "여옥? 순간 을지마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을지마사가 울렁거 리는 마음을 미처 진정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처녀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첫눈에도 분명 여옥이었다. 얼굴은 수척했지 만 갸름한 얼굴에 눈매가 서늘해 보이는 얼굴 윤곽은 옛날 그대 로였다. 부지중에 을지마사가 벌떡 일어섰다. 마악 여옥을 부르려는 순간, 을지마사를 쳐다본 여옥의 시선에 생기가 번쩍 하더니 이 내 스러졌다. 뒤이어 여옥은 쓰러질 듯이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여 옥이 -." 을지마사는 급히 여옥에게로 달려갔다. 을지마사는 자신이 장 대인의 서사로 위장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었다. 그러나 미처 여옥에게 닿기 전에 억센 사내들이 나와 그를 가로막았다 을지마사는 양 어깨를 붙잡는 사내들을 거칠게 뿌리치고 여옥 에게 다가가려고 발버둥쳤다. 그때였다. 을지마사의 면전에서 여옥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 왔다. "대체 누구신데 내게 아는 척을 하는 게요? 을지마사는 멈칫하며 여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옥이 날 모르겠소? 정말 모른단 말이오? 그때 을지마사의 절망적인 부르짖음을 청루 주인의 격한 목소 리가 삼켜 버렸다. '너 분명 이자를 아느냐? 여옥은 무너지려는 마음을 다시 한 번 독하게 추스렸다 "모릅니다. 저런 사람은 평생 만난 일도 없습니다 " "그럼, 어떻게 된 일인가? "어떻게 되다니요? 나는 이미 왕 대인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몸,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청루 주인은 그래도 미심쩍었던지 이번에는 을지마사를 돌아 다보았다. "그럼 고구려 청년! 저 여옥을 아는가?" 뜻밖에도 넋을 잃고 앉아 있던 을지마사가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모르는 사이요? 다시금 청루 주인의 다그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을지마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아는 여옥이라는 여자는 이미 죽어 버린 여자였소. 잠 시 그녀인 줄로 착각을 했나 보오." 여옥은 그것 보라는 듯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젊은 나이에 사람 얼굴도 제대로 구별 못하니 안됐소." 그제야 청루 주인의 얼굴에 의심이 가시는 듯했다. 을지마사는 맥이 풀려 흥정을 시작하자는 청루 주인의 말을 듣는 등 마는 등 사지를 흐느적거리며 청루를 나왔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여옥으로 인해 죽어 갔는가. 또 자기는 여옥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만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낙 양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기적적으로 만난 여옥 은 이미 옛날의 그녀가 아니었다. 을지마사는 객사로 돌아가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분 노도 절망도 아닌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끝 없이 그를 괴롭혔다. 새벽이 되어 동네 닭들이 훼를 치고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을지마사는 마음을 굳혔다. '날이 밝으면 장안으로 돌아가자.' 그 길밖에 없었다 이제 장안을 거쳐 농우로 되돌아갈 수밖에 을지마사가 달리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을지마사는 새벽같이 객주 주인을 깨워 셈을 치르고는 장안을 향해 출발했다. 여옥을 만난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낙양까 지 오는 발걸음은 나는 듯 가벼웠다. 그러나 모든 희망이 산산조 각이 나버리고 허탈한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힘들고 지루하 기만 했다 장엄한 낙양성 동문의 고루거각이 시야에 들어왔지 만 이미 을지마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낙양성 동문을 빠져 나가자 갑자기 한가한 시골 풍경으로 바 뀌었다. 이른 아침부터 농부들이 들녁에서 밭도 갈고, 씨도 뿌리 고 있었다 을지마사는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먼 길을 가는 나그네라면 으레 길가의 정자그늘 같은 데서 쉬어 가다가 마침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길동무가 되기도 했다. 함께 걸으면서 잡담이라도 나누다 보면 무료함도 덜 수 있고, 더 러 노상강도, 산적, 맹수들로부터 서로 보호가 되었다. 그러나 을지마사는 사람들이 곁에서 치근덕거리며 말을 거는 것도 귀찮 을 성싶어 혼자서 휘적휘적 장안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 리 빨리 걷는다고 해도 농우까지는 먼 길이었다. 을지마사는 길을 가다가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한숨을 내쉬곤 했다. 문득 주강 남쪽 마을을 떠나온 이후 겪었던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아소미네의 죽음, 허텐과 농우에서의 떠돌이 생활. 그제야 비로소 을지마사는 넓고 넓은 세상 천지에 자기 혼 자만이 팽개쳐져 있다는 고독감이 뼛속을 파고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을지마사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그간 잊혀졌던 주강 남쪽 마을의 정경이 보 이는 듯 떠올랐다. 오랜 인고의 세월을 살아 오면서 백발이 되어 버린 자모의 아내 나라 할머니, 멀어져 가는 아소미네의 뒷모습 을 지켜보며 애끓는 슬픔을 견디고 있던 나데의 모습이 다시금 가슴속을 후비는 것 같았다. '음 -.' 을지마사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신음을 토해 냈다. 나라도 없 이 유랑하는 고구려 유민의 한이 바로 이런 것인가. 을지마사는 앞일이 아득했다. '그나저나 농우로 돌아가면 고사계 노인에게는 무어라고 말 을 해야 하나.' 그때 어젯밤 내내 지워 버리려고 발버둥거렸던 여옥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그런데 어젯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 도 고구려 포로의 자식인 이상 앙칼진 목소리 뒤에는 말 못할 슬 픔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 면?' 을지마사는 걸음을 멈추었다. 여옥에 대한 미련이 그처럼 간 단히 지워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선 채로 잠시 망 설였다 '어떻게 할까?' 을지마사는 이윽고 결심을 굳혔는지 획 돌아서더니 뭔가 소중 한 물건을 잊고 온 사람처럼 낙양성을 향해 걸음을 빨리했다 을지마사가 어제의 그 청루에 도착한 것은 아침이 조금 지나 서였다 청루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을지마사는 청루 대문 앞으로 다가섰지만 차마 대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 대문을 두 드려 보았자 여옥을 다시 만나기는커녕 당장에 쫓겨날 것은 불 을 보듯 확실했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 때 조금 떨어진 기와담장 안에 매화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이 눈 에 들어왔다. 담장 밖 길가로 뻗어 나온 진회색 가지에도 연분흥 색 꽃들이 송아리져서 흐무러지게 매달려 있었다 정녕 이국의 땅에도 봄은 오는 것인가. 그러나 담너머에 여옥을 두고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을지마사의 봄은 아직도 추운 겨울 속에 감추어 져 있었다. 을지마사는 무심코 담장 밖으로 늘어진 매화나무 가지 곁으로 다가갔다. 매화꽃잎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을지마사가 몸을 구부려 땅에 떨어진 꽃잎을 주우려는데 문득 발 앞으로 무 언가 툭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분명 매화꽃이 아니었다. 담장 너머에서 여옥이 던진 종이쪽지였다. 안타까움으로 밤잠 을 설친 여옥이 혹시나 을지마사가 다시 나타날까 싶어 꼭두새 벽부터 담장 너머로 밖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을지마사는 얼른 집어 들고는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침나 절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을지마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눌러 가며 급히 골목길로 뛰어들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걸어 청 루와 멀어진 다음에야 손에 꼭 쥐고 있는 종이쪽지를 조심스럽 게 펼쳐 보았다. 종이는 문풍지라도 잘랐는지 노랗게 색이 바래 있었다. 그 좁은 지면 위에 숯검댕으로 그린 글자가 눈에 들어 왔다 금야오경 조 오늘밤 12시 옥 을지마사는 누가 볼까 봐 얼른 종이쪽지를 접어 품속에 넣었 다. 가슴속이 무섭게 두방망이질쳐 왔다. 오늘밤 삼경이 라...... 삼경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을지마사는 그날 하루종일 목적지도 없으면서 낙양성내를 이 리저리 돌아다녔다 과연 낙양성은 구석마다 고루거각들이 들어 서 있어 예로부터 중국 제일의 도시다운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을지마사는 왼종일 가슴이 울렁거리고 긴장되어 주변의 풍경들 은 보는 등 마는 등 하고 끼니도 걸렀다. 어느덧 어둠이 깔리자 이곳 저곳의 누각에서는 청홍등에 불을 밝히고, 청루 앞에도 꽃과 술을 찾아 모여든 시정잡배들로 시끌 벅적했다. 대문 양쪽으로 기와담장에 내걸린 수십 개의 청홍등 불이 홍등가의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때쯤 을지마사는 길 건너 남의 집 처마 밑에 몸을 숨기고 청 루를 지켜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청루 안에서는 무엇이 그 리도 흥겨운지 노랫가락이 새어 나오고 왁자한 웃음소리도 간간 이 들려 왔다_ 시간이 또 얼마나 지났을까. 밤이 이슥해지자 청루를 드나드 는 손님이 점차 뜸해 갔다. 이경이 지날 무렵이 되어서야 청루 대문이 닫히고 청홍등도 꺼졌다. 그리고 온 사방이 갑자기 고즈 넉해졌다 어둠 속에 잠긴 3층 고각은 마치 해저에 가라앉은 거 대한 공룡의 시체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또 초조한 시간이 흘러갔다. 둥둥둥 어둠 속을 뚫고 낮으면서도 장중하게 들려 오는 삼경을 알리 는 바라소리였다. 그것은 마치 어둠에 묻혀 버린 낙양성이 영원 히 죽어 버린 것이 아니고, 아직도 일부는 살아 깨어 있다는 확 인과도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둥둥 둥 을지마사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듯 몸을 부르르 떨고는 처마 밑에서 살금살금 기어나와 행길을 건너 청루 쪽으로 다가갔다. 몸을 담벼락에 찰싹 붙이고는 매화나무 쪽으로 접근했다. 어둠 속에서도 매화나무의 희무레한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을지마사는 담장 밖으로 뻗어 나온 매화나무 가지 밑에서 숨 을 죽였다. 주위는 여전히 조용했다 가슴이 타는 듯한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순간 어둠 속을 응시하는 을지마사의 눈에 무엇인가가 들어왔 다 이어서 희미한 불빛이 나타났다 불빛과 함께 거뭇한 물체들 의 윤곽이 분명 을지마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을지마사는 본능적으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두 개의 횃불이었다 횃불 은 주위의 어둠을 사르며 을지마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우 뚝 멈춰섰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횃불이 다시 움직였 다. 너울거리는 불꽃의 흔적을 어둠 속에다 남기며 다시 멀어져 갔다. 낙양성내 순라군들이었다 '어휴? 을지마사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고 나서도 또 한식경이 지나갔지만, 주위는 여전히 조용 하기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러나 을지마사는 그시각 담장 너머 안쪽에서 여인네들이 소 리를 낮춰 주고받는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 "언니 -." 앳된 목소리에 뒤이어 조금 숙성해 보이는 여인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래도 안 된다. "나 혼자 좋다고 갈 수는 없어요 " "그래도 우리는 갈 수가 없다 " 어둠 속에서 숨가쁜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었다. "언니 , 이것이 우리에게는 마지막 기회라구요 " "우리가 함께 가면 너마저 마지막이 된다." 그때 나이가 가장 많은 듯한 여인네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옥아" "네가 나중에 아이를 낳거든... _ "네 아이들 이름에 우리들 이름자 하나씩을 붙여다오. 그리 고 "그 아이들은 우리 대신 떳떳한 인생을 살게 해다오." 짙은 어둠은 곧 그 나이든 여인네의 말소리마저 삼켜 버렸다 뒤이어 숨죽인 흐느낌 소리가 났다. 밤은 벌써 3경이 지나 4경으로 넘어서고 있었다 조바심을 내 며 담장 밑을 떠나지 못하는 을지마사는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 했다. 도대체 저 담장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바로 그때였다. 매화나무 가지가 조금 움직인다 싶어 얼핏 위 를 쳐다보았다. 매화나무 가지 위에 거뭇한 물체가 나타났다. " 이어서 담장 밖으로 뻗은 매화나무 가지 하나가 활처럼 휘어졌다 을지마사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할 겨를도 없이 그 거뭇한 물체 밑으로 다가가 두 손을 올려 받아 내렸다 여자였다. "여옥이 ? "쉿, 이곳은 위험해요? 두 사람은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남의 눈에 띌세라 고각의 담 장 밑으로 기다시피해 낙양성 거리를 빠져 나갔다. 을지마사는 낮에 보아 두었던 성문 쪽으로 갔다. 성문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낙심하여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성문은 굳게 잠겨 있어 그들 이 빠져 나갈 구멍이 없었다. 아침이되어 동녁 하늘이 뿌옇게 밝 아 오는 새벽이 되어야 열릴 것이었다. 만약 지금이라도 청루에서 여옥이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면 온 낙양성이 벌컥 뒤집힐 것이다. 왕 대인에게서 10만 냥이라는 거 금을 받기로 한 청루 주인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청루 사 내들은 물론 관가의 포졸들까지 모두 풀어 성문을 통하지 않고 는 쥐새끼 한 마리 빠져 나갈 구멍이 없는 온 성안을 샅샅이 뒤 질 것이다. 더욱이나 아는 집 하나 없이 길거리를 방황해야 할 을지마사와 여옥이가 붙잡혀 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을지마사와 여옥은 초조했다. 두 사람은 성문 가까이에 있는 어느 집 처마 밑에 웅크리고 앉았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예감이 라도 하고 있는 듯이 서로 말이 없었다. 춘삼월이라고는 하나 새 벽 공기가 쌀쌀했다. 을지마사가 오른손을 뻗어 여옥을 자기 쪽 으로 끌어당겼다. 여옥이 을지마사의 팔에서 자신의 몸을 빼내 려는 듯이 움찔하다가는 그만두었다. 을지마사의 손 끝에 와 닿 은 여옥의 몸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여옥이 !" 을지마사가 막상 여옥을 불러 놓고는 다음 말을 찾지 못해 잠 시 머뭇거렸다. "여옥이, 나는 다시는 여옥이와 헤어지지 않을 거야 " 여옥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한 숨소리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을지마사, 어제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사실은. "그런 말 안 해도 돼, 다 알고 있어 " 어둠 속에서 여옥의 그윽한 시선이 을지마사의 얼굴을 더듬 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디서 왔지요?" "농우에서 당신과 한가윗날 만나기로 했던 농우에서 ." "농우에서 ? 여옥은 농우라는 말을 듣고는 무척 놀란 듯 시선을 아래로 떨 구었다 그녀의 뇌리 속에서는 지나가 버린 슬픈 세월이 되살아 나고 있었다. 그때 또 을지마사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옥이 할아버지도, 삼촌 고선지 장군도 모두 잘 있소." "삼촌 고선지 장군?" 여옥으로서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대화를 그쯤에서 중단해야만 했다. 날이 밝으 려면 아직 이른 시각인데도 성문 주위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 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미리 와서 성 문이 열릴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또 그 시각쯤이면 성문 밖에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주로 인근 마을에서 사는 농부들 로 아침 일찍 채소나 고기를 팔기 위해 성안으로 들어오는 사람 들이었다. 드디어 성문 근처가 시끌벅적한 것을 보면 성문이 열리는 모 양이었다. 을지마사와 여옥도 일어서서 사람들 틈에 끼여들었 다. 수십 명의 인파가 성문을 향해 일시에 밀려갔다. 그러나 막 상 사람이 통과하는 성문의 통로는 비좁았다 그리고 그 비좁은 통로 양편에는 칼을 찬 포졸들이 지키고 서서 오고가는 사람들 의 얼굴을 연방 눈알을 굴리며 살피고 있었다 이윽고 을지마사와 여옥이 통로에 들어섰다. 두 사람이 애써 태연한 걸음으로 마악 성문을 통과할 때였다. 갑자기 퉁명스런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보, 당신 ? 을지마사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하지만 못 들은 척하 고 앞만 보고 몇 걸음을 옮겼다 '너 귀머거리냐? 을지마사의 뒷덜미를 붙잡은 포졸놈이 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처음부터 반말지거리였다 을지마사가 고개를 돌려 포졸을 쳐다보았다 턱수염을 비비 꼰 품이 꾀나 성깔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는 을지마사를 다 그쳤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 "장안으로 갑니 다.' "장안? 너 중국 사람 아니지?" 허구한 날 성문에서 사람 행색만 살펴온 자들인지라 한눈에 척 알아본 것이었다. "아니오, 고구려 사람이 오." 을지마사는 태연한 척 대꾸하면서도 까딱 잘못하면 만사가 수 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애가 탔다. 포졸은 자기 의 추측이 어긋나지 않았음을 확신이라도 한 듯 거드름을 피우 며 을지마사를 닦달했다. "그곳에서는 무슨 일을 하지?" "나는 농우 병마절도부 군관일을 하고 있소 " 사람이란 절대 위기를 만나면 오히려 침착해지는 것일까. 을 지마사는 애써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위엄을 갖췄다. "만약 당신이 군인이라면 군표를 가지고 있소? 을지마사가 군관이라고 말하자 포졸의 말투가 금세 바뀌었다. 을지마사가 품속에서 군표를 꺼내 보여 주자 포졸은 한참을 이 리저리 살펴보더니 군표를 도로 내밀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심 쩍은 표정이었다 "농우에서 낙양까지 왔다구? 도대체 중국의 변방 끝에 있는 농우에서 만 리가 넘는 낙양까 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을지마사는 청루 주인의 추격꾼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 황이라 안절부절못했다 만약 추격꾼들에게 잡히는 날이면 그것 으로 끝장이었다. 그런데도 포졸은 을지마사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을지마사는 하는 수 없이 포졸에게 그럴듯하게 둘러 댔다 "장인어른 상을 당해 예까지 왔소." "처갓집이 낙양이라구? 그럼 저 여자는 당신 부인이오? "그렇소, " 그때 다른 포졸 몇 놈이 호기심들 가지고 기웃거리며 자기네 들끼리 떠들어 댔다. "저게 고구려 여자래 ." "고구려 여자들은 과연 10만 냥짜리답게 이쁘게 생겼구먼." "히히히, 포졸 주제에 어디 손이나 한번 잡아볼 수 있겠어? 을지마사는 여옥을 희롱하는 말을 듣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 구쳤다 당장에 놈들의 머리통을 박살내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 았다 을지마사를 붙든 포졸은 아무래도 미심쩍다는 듯이 고개 를 갸우뚱거렸다. 그사이에도 시간이 흘러 어느덧 날이 밝아 오 고 거리에는 오고가는 행인들이 부쩍 늘었다. 그 시각이면 여옥 이 도망친 것을 알고 청루 안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아무래도 상부에 연락을 해서 당신 뒷조사를 해봐야겠소." "뒷조사라고? 을지마사는 숨이 컥 막혀 왔다. 포졸의 말은 언제 청루 주인 패거리들이 나타날지 몰라 한시가 급한 자기네들을 붙들어 놓겠 다는 것이었다. 을지마사와 여옥의 운명이 끝장날지도 모르는 위급한 순간이었다. 을지마사는 마음을 다져먹고 다시 한 번 운명에 도전했다. 어 차피 이판사판이었다. "좋소, 나는 한 달이라도 여기에 있겠소. 하지만......." "???" "황제의 명을 어긴 죄는 당신이 받아야만 하오." "뭣이라고? 황제의 명을? "그렇 소 ." "그럼 , 당신이 황제의 명으로 이곳에 왔소?" 포졸은 황제라는 말을 듣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농우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있소. 만약 내가 기일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그때는 당신도 끝장이오," 당시 군사에 관한 것은 절대로 누설해서는 안 되는 국가 기밀 사항이었다. 또 군대가 기일 안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장 수 된 자라 할지라도 이유를 불문하고 죽임을 당했다 곧 을지마 사가 기일 안에 임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포졸더러 책임을 지라 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그 포졸은 한건 걸려들었다는 미련을 버 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당신은 중국 사람도 아니고, , ,, 을지마사는 포졸의 말을 중간에서 사정없이 잘라 버렸다 "내가 당신에게 군표를 보여 주지 않았소? "좋소, 나는 할말을 다 했소. 어서 나를 끌고 가시오." 그제서야 포졸도 한풀 꺾이는 눈치였다. 드디어 포졸은 턱수 염으로 성문 바깥 쪽을 가리켰다. 을지마사의 가슴속에서 후유 하고 안도의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마터면 자신과 여옥의 운 명이 성문을 빠져 나오기도 전에 결단날 뻔했던 것이다. 성문을 빠져 나오자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산도 있었고 들 도 있었다. 들녘을 가로질러 흐르는 황하 유역에는 논밭이 연이 어 있고 농사꾼들이 무리를 지어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을지마사와 여옥은 막상 갈 곳이 없었다. 큰 길을 따라 장안으로 갈 수는 없었다. 청루에 남아 있는 나 이든 고구려 여인들이 여옥의 탈출을 최대한도로 숨긴다고 해도 이미 발각이 났을 테고 말 탄 포졸들까지 합세해서 여옥과 을지 를 뒤쫓을 것은 불을 보듯 확실했다. 을지마사와 여옥은 성문을 빠져 나오자마자 무작정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황하 유역인 낙양 주변은 황톳길이었다. 을지마사 와 여옥은 붉은 황톳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중국의 한복판인 낙양이나 장안 주위에는 당시에도 사람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 래서 시골길을 가다 보면 제법 큰 마을들이 드문드문 나타났다 그러나 을지마사와 여옥은 마을을 지나는 것이 오히려 겁이 났 다. 그래서 인가가 나오면 될 수 있는 대로 걸음걸이를 빨리해서 지나쳤다. 고갯마루턱에 오를 때마다 뒤를 돌아보아도 다행히 그들의 뒤를 쫓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날 해질 무렵, 을지마사와 여옥은 다 쓰러져 가는 절간 하나 를 발견했다. 문을 닫은 지 벌써 오래 된 듯 담장이 허물어지고, 푸른 이끼가 긴 기와지붕 위에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먼 다 을지마사와 여옥은 절간 안으로 들어갔다. 퀴퀴한 곰팡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그날 밤을 이슬이 내 리는 찬 들판에서 노숙할 수는 없었다 우선 길가의 옥수수밭에 서 따온 옥수수 몇 자루를 날로 씹어 시장기를 면한 다음 을지마 사가 괴나리봇짐을 풀어 농우에서 가지고 온 낙타털 담요 한 장 을 바닥에 깔았다. 구멍이 난 기왓장 사이로 어두워 가는 밤하늘 이 보였다. "여옥이 , 고단하지? 여옥은 그때까지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괜찮아요." 을지마사는 여옥을 끌어당겨 담요 위에 누였다. 미묘한 침묵 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여옥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은 서먹한 분위기를 먼저 깼다 "괜히 나 때문에 당신만 고생시켜서 미안해요." "나는 오히려 여옥이가 더 걱정이야.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나는요 "???" "이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여 옥이 -." "나는 여옥을 사랑해 ." "여옥이,,,, ." 그런데 이상하게도 을지마사의 다음 말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을지마사는 갑자기 긴장이 풀리고 며칠째 누적된 피로 가 몰려와 자꾸만 눈꺼풀이 감겼다. 여옥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어둠 속으로 흘렀다. "을지마사,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죠? 여옥도 앞일을 생각하니 막연해졌다. "응, , 응,,,,,,." 그러나 을지마사 쪽에서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지난 며칠 밤 을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한 을지마사는 벌써 잠에 곯아떨어져 버렸다 오직 이름 모를 폐사에 깃든 어둠만이 두 사람의 기묘한 인연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을지마사는 누군가 살며시 흔드는 기척에 벌떡 일어났다. 주위가 조용했다. 손으로 여옥이 누워 있는 곳을 더듬어 보았다. "여옥이 !" 여옥의 목소리가 맑은 것을 보면 여옥은 그때까지 잠들어 있 지 않은 듯했다 "아-나는 무슨 일이 있는가 했어. 그러고 나서 을지마사가 다시 잠이 들려는데 이번에는 여옥 쪽에서 을지마사를 나직이 불렀다. "을지 마사 " 여옥은 다시 침묵했다. 을지마사는 여옥에게 혹시 무슨 일이 있지 않나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잠이 확 달아나는 듯했다. "여옥이,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니 에 요." 한참 뒤 여옥은 결심이 선 듯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저,,,,,, 있잖아요.'' "???"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지 몰라요." "왜 그런 소리를 하지? "그래서 당신은, 당신은, 오늘밤 "꼭 나를 가져 야만 돼요." "뭐 라구? 여옥의 말은 갑자기 을지마사에게 야릇한 충동을 불러일으켰 다 온몸의 피가 뜨거워지며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이 무섭게 꿈틀 거렸다. 그러나 여옥의 목소리는 오래 생각해 온 결심을 털어놓 듯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을지마사, 나는 당신에게 내 모든 것을 주어 버려야만 해요 더 이상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이 그리고,,,,,,." 을지마사의 숨결이 자꾸만 가빠 왔다. "오늘밤 나를 완전히 가지세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후회가 남지 않게요." 여옥은 을지마사보다 나이가 한 살 어린데도 숙성한 데가 있 었다. 아니, 여옥이 이처럼 적극적인 것은 지난 몇 달 동안 극단 주와 청루에서 두 번씩이나 겁탈을 당할 뻔한 자신을, 사랑하는 을지마사에게 어서 주어 버려야 한다고 결심한 데 있었다. 을지마사는 손을 뻗어 여옥을 껴안았다. 하지만 여옥의 몸은 그녀의 생각과는 사뭇 달랐다. 그녀는 을지마사의 품속에서 가 늘게 떨었다. 을지마사의 손이 그녀를 더듬을 때마다 아직도 그 녀의 몸은 살아서 풋풋이 저항해 왔다 그러면서도 여옥은 나직 이 부르짖었다. "아, 어서 나를 가지세요. 그때까지 을지마사는 여인과 잠자리를 한 경험이 없었다. 그 러나 여옥을 향한 마음은 원초적인 본능을 일깨우기에 충분했 다. 을지마사는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보는 흥분으로 온몸이 녹 는 것 같았다. 무섭게 몰아치는 격정의 끝에 이르자 그는 살맞은 짐승처럼 여옥의 몸 위에 그대로 엎어져 버렸다. '여자를 갖는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을지마사가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는데 여옥이 입을 열었다.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었어요." 여옥의 생각대로라면 그들은 방금 초야를 치른 셈이었다. 다 른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날을 받고, 예물을 교환하고, 큰 잔치 를 벌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허물어져 가는 폐사 에서 한몸이 됨으로써 그들은 부부가 된 것이다. 다음날도 을지마사와 여옥은 황톳길을 걸었다. 걸어도 걸어 도 끝간 데 없이 이어진 황톳길이었다. 황톳길 양 옆으로는 옥수 수밭이 연이어 있었다. 을지마사는 생옥수수만 씹어서는 안 되 겠다고 생각해서 들쥐도 잡고, 개구리도 잡아 부싯돌을 쳐 구웠 다. 생옥수수만 씹을 때와는 달리 기운이 돌았다. 그들이 말 탄 사람을 본 것은 그날 해질녀이었다 지친 몸을 끌고 막 언덕배기를 넘는데 언덕 아래로 몇 사람의 말 탄 사람들이 멈추어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을지 마사와 여옥을 뒤쫓아온 낙양성 포졸들임이 분명했다. 여옥이 밤 사이에 도망간 사실을 안 청루 주인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포도청을 움직여 을지마사와 여옥을 추적케 한 것이다. 그자들 은 성문 포졸로부터 을지마사와 여옥이 낙양성을 탈출한 사실을 알고는 인근 동네마다 이 잡듯 뒤지고 있는 중이었다. 을지마사는 여옥의 손을 끌고 얼른 옥수수밭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때마침 사람 키가 넘게 자란 옥수수들이 두 사람을 감쪽 같이 숨겨 주었다. 을지마사는 긴장 때문에 가슴이 타들어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주위가 너무 조용했다. 아마도 포졸들이 을지 마사와 여옥을 못 보고 지나쳐 버린 듯했다. 을지마사가 동정을 살피기 위해 슬며시 몸을 일으켜 옥수수밭 가로 기어 나갔다. 바로 그때였다. 가까이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걸걸 한 남자 목소리였다. "그 고구려 년놈들이 바로 이 옥수수밭 어디엔가 숨어 있을 거 야." 뒤이어 쇳소리 같은 고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확 불을 질러 버릴까? 숨어서 엿듣고 있는 을지마사는 더럭 겁이 났다. 그러나 다행 히도 황하 주변의 옥수수밭은 불을 지르기에는 너무도 넝었다. 한번 불이 붙으면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옥수수밭이 모두 불바 다가 될 판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하루종일 을지마사와 여옥을 찾느라 짜증이 난 포졸들이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을지마사는 옥수수밭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갈 수 가 없었다. 그날 밤은 옥수수밭 속에서 찬이슬을 맞으며 밤을 새 웠다. 두 사람은 다음날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옥수수밭에서 기어 나 왔다 포졸들은 그사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여옥의 얼 굴은 몹시 창백했다. 자꾸만 쓰러지려는 여옥을 부축해 또 황톳 길을 걸어갔다. 을지마사도 어제 저녁부터 먹은 것이 없는데다 한데서 밤을 지샌 탓인지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이를 악 물었다. "을지 마사." "우리 그냥 여기서 살아요, 집도 짓고 밭도 갈고-,--- 기진맥진한 여옥이 자꾸만 헛소리를 했다. 해는 벌써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점심때가 지나서도 두 사람은 쉬지 않고 걸었다.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라선 을지마사의 눈이 휘등그레졌다. 발 아래로 시뻘건 물이 넘실거리며 홀러가고 있었다. "앗! 강이다." "강? "그래 , 강이 나타났어 ." 두 사람은 어느덧 황하 기슭에 다다른 것이었다. 황톳길은 바 로 그 강가로 이어졌고 황톳길이 끝나는 나루터에는 초가집이 두어 채 있었다. 을지마사는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버 틸 만큼 버틴 셈이었다. 을지마사는 나루터로 내려가 초가집 문 을 두드렸다. 조금 후에 방문이 열리고 건장한 중년 사내가 나왔다. 평생을 강바람만 쐬고 살아서 그런지 살갗이 구릿빛에다 술이 덜 깬 듯 눈자위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저 , 강을 건널 나룻배가 있습니까? 중년 사내는 핏발이 선 눈으로 두 사람의 위아래를 유심히 살 피고 난 다음 입을 열었다. "예, 있기는 한데,,,,,, 손님은 어디로 가시려고? 을지마사는 말문이 막혔다. 사실 을지마사는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할 수도 없었다. "장안으로 갑니 다." "장안으로 간다구요? "그렇소. 뱃사공이 있소?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금방 말을 바꿨다 사실은 그가 바 로 뱃사공이었다. "뱃사공이 있기는 한데 방금 어디로 가서 ,,, 잠시 기다려야 겠습니다 " 사실 장안은 그쪽이 아니고 서쪽이었다. 나루를 건너면 낙양 의 북쪽인 하북성이었다. 뱃사공 사내는 을지마사의 행선지를 듣고는 부쩍 의심이 났다. 뱃사공 사내는 무슨 생각을 했던지 갑자기 친절하게 굴며 지 쳐 있는 을지마사와 여옥을 방안으로 청해들여 쉬게 했다. 곧이 어 그의 마누라인 듯한 뚱보 여인이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다. 을지마사와 여옥은 시장했던 참이라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나 자 금세 졸음이 왔다.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 그때 사내는 뚱보 여인을 뒤껼으로 불러내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여보, 아무래도 수상쩍 어 ," 뚱보 여인의 눈알이 갑자기 커졌다 "낙양에서 도망쳤다는 고구려 년놈들이 틀림없어 ." "물론 내가 상금을 타게 됐지. 헤헤헤, 호박이 덩굴째 굴러 떨 어졌단 말야." "그래도 어떻게 고발할 수 있어요? 불쌍해서 ..,,,,." 뚱보 여인은 남편과는 달리 그래도 마음씨가 착했다. "임자가 관가에 얼른 다녀와. 내가 년놈들을 지키고 있을 테 니 .' 뚱보 여인은 남편의 포악한 성질을 아는 터라 마지못해 관가 를 향해 출발했다. 나루터에서 관가까지는 꼬박 걸어서 한나절 이 걸리는 길이었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꼬이고 있었다 상금에 눈이 어두운 뱃 사공은 혹시나 그사이 두 사람이 도망을 칠까 봐 자기 뚝심만 믿 고 두 사람을 꽁꽁 묶어 방안에 가두기로 한 것이다. 이런 사정 도 까맣게 모르는 을지마사와 여옥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체구가 건장한 뱃사공은 부엌으로 들어가 식칼을 거머쥐고 나 왔다. 그러고 나서 방안의 동정을 살폈다. 두 년놈들이 세상 모 르고 잠에 곯아떨어져 있었다 뱃사공은 음홍한 미소를 흘리며 방문을 살며시 열고는 살금살금 기어 들었다. 을지마사는 갑자기 숨이 컥 막혀 와서 눈을 번쩍 떴다 눈에 핏발이 선 중년 사내가 가슴에 올라타고서 한손에 식칼을 쥐고, 다른 손으로 자신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을지마사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한참 기 운이 뻗칠 나이인데다 농우절도부에서 고된 군사훈련을 쌓은 터 였다. 을지마사는 자기의 목을 누르고 있는 뱃사공의 팔을 비틀 면서 동시에 두 다리로 뱃사공의 아랫도리를 힘껏 내질렀다 사내가 쿵소리를 내며 맞은편 벽에 부딪혀 나등그러졌다. 순 간을 놓칠세라 을지마사가 뱃사공을 덮치며 배 위에 올라탔다 그러나 뱃사공도 힘깨나 쓰는 장한이었다. 뱃사공은 깔려 있는 상태에서 자신을 올라타고 있는 을지마사 를 다시 한 번 비틀어 넘어뜨렸다. 뱃사공과 을지마사는 한데 어 우러져 방안을 뒹굴었다. 그러나 뱃사공이 한발 빨랐다. 뱃사공은 어느새 방바닥에 떨 어져 있던 식칼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재빠르게 을지마사의 정 수리를 향해 내리찍었다. "을지 마사, 위험해요!" 여옥이가 몸을 날려 뱃사공을 밀쳐 내면서 비명을 질렀다. 간 발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여옥의 목소리는 그 이상 들려 오지 않 았다 위기를 모면한 을지마사가 얼른 몸을 빼 주먹으로 뱃사공의 얼굴을 마구 후려쳤다. 뱃사공의 얼굴이 금세 피범벅이 되었다. 그는 아주 숨이 끊어졌는지 더 이상 꿈틀대지 않았다. 그제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을지마사는 쓰러져 있는 여옥을 안았다. 칼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가 흥건히 흘러나왔다. 을지마 사는 우선 피를 틀어 막고 여옥을 들쳐 업었다. 그리고 허둥대며 나루터로 내달렸다. 나루터에는 배가 있었다. 을지마사는 나룻배에 여옥을 누이고 닻줄을 끊었다. 을지마사와 여옥을 태운 나룻배는 강물을 따라 흘러갔다. 을지마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강 건너편을 향해 노를 젓건만 배는 물살에 밀려 자꾸만 아래쪽으로 떠내려갔다. 나루터에서 아래쪽으로 20리쯤 되는 곳에 마을이 있었다. 계 곡을 뒤로 하고, 강가에는 키 큰 포플러 나무들이 강변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제법 운치가 있는 마을이었다. 나룻배가 강기슭 에 닿자 을지마사는 서둘러 여옥을 들쳐업고 마을 안으로 들어 섰다. 이제는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그 길밖에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 강촌 마을은 하북성 지경이어서, 마 을 사람들은 낙양성내에서 일어난 일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조금 있자니 머리가 반백이 된 촌장이 나오고, 마을 사람들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여기는 유가촌이오. 형씨는 어디서 온 뉘시오? 촌장은 시골에 묻혀 사는 서생 같았지만 외모가 준수했다. "농우에서 왔습니다 이름은 을지마사라고 합니다." "이름이 넉 자인 것을 보니 필시 한족은 아니고, 혹시 고구려 "그렇습니다. 고구려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눈에 기품이 있어 보이는 촌장은 을지마사가 고구려 사람이라고 해서 조금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저 환자가 시각을 다투는 것 같은데,,,, ,." "오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제발 도와 주십시오." 촌장의 도움으로 을지마사와 여옥은 유가촌에 들게 되었다. 그러나 혼수상태에 빠진 여옥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사흘 밤낮이 지나도록 열은 좀처럼 내리지 않았다. 촌장이 좋다 는 약을 구해와 먹였지만 상처가 워낙 깊은지라 차도가 없었다. 을지마사는 여러 날을 여옥의 곁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유가촌에 온 지 나흘째 되던 날 아침은 유난히 날씨가 청명했 다. 여옥의 병세도 조금 나아 보였다. 여옥이 모처럼 정신이 드 는지 살며시 눈을 떴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을지마사가 기뻐 서 들뜬 소리를 냈다. "여옥이 죽어서는 안 돼. 나는 당신을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사랑할 거 야." 여옥은 힘이 드는지 다시 눈을 감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러고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과 함께 지낸 며칠간은 꿈도 꾸어볼 수 없는 행복한 시 간이었어 요." "앞으로도 우리는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거야." 가빠 오는 여옥의 숨결을 듣자 을지마사는 문득 불안한 예감 이 들었다. "여옥이 , 여옥이 ." 여옥은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검은 눈동 자는 흐려지고 있었다 "을지마사, 부탁받은 것이 있었어요." "여옥이-." 그러나 여옥은 하던 말을 힘들게 이어 나갔다. "혹 아이들을 많이 낳거든,,,,,, 연화, 모화, 나나라고 이름을 붙여 주세요. 청루에 있는 고구려 아가씨들 이름이에요," "그리고,,,,,, 그리고 내 이름도......." "여옥이 ? 그러나 여옥의 말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을지마사는 싸늘하게 식어 가는 여옥의 몸을 부등켜안고 통곡 을 했다. 몇날 며칠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 으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산 자와 죽은 자는 가는 길이 달랐다 마침내 보다 못한 동네사람들이 몰려들어 발버둥치는 을지마사 를 끌어내고는 여옥의 시신을 거두어 매장해 버렸다. 다음날 을 지마사는 여옥의 무덤을 찾아가서 또 한번 목을 놓아 울었다. "여옥이 ! 죽은 혼백일망정 조국 고구려로 돌아가 편히 쉬어 ." 졸지에 여옥을 잃은 을지마사는 유씨 마을에 더 이상 눌러 있 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촌장이 일러준 길을 따라 장안성을 향 해 걸어갔다. 그 길은 천혜 남단으로 해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낙양성을 비켜 가자면 하는 수가 없었다. 혼자서 터벅거리고 가는 을지마사는 이따금 주위에서 인기척 을 느끼곤 했다.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여옥의 혼백이 을지 마사를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을지마사는 그녀가 바로 곁에서 함께 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어 자꾸만 흠칫 놀라곤 했다. 을지마사가 장안성에 도착한 것은 유씨 마을을 떠난 지 한 달 보름이 지나서였다 을지마사는 장안성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 곧바로 서쪽으로 뚫린 길을 따라 농우로 향했다. 혼자서 농우로 되돌아가는 길은 멀고도 힘들기만 했다 아 나라닌 장안성을 출발한 지 3일째 되던 날 을지마사는 한떼의 대상들을 만났다. 대상들은 낙타 대신 호말에다 짐을 잔뜩 싣고 서역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을지마사는 먼 길을 가는 데 마침 좋은 길동무를 만난 것이다. 텁석부리에다 코가 크고 서글서글한 대상 한 명이 혼자서 터 벅거리며 가고 있는 을지마사에게 말을 걸어 왔다. "형씨 . 어디로 가는 길이오?" "예 . 농우로 갑니다. 그런데 당신들도 그쪽으로 가겠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대상들이 가는 행선지는 을지마사의 예상과 달랐다. "아니오. 우리는 대리 ." "대리라구요? 을지마사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예, 사천을 지나 주강에 이르러서 또 남쪽으로 3천 리 길을 가지 _-" 순간 을지마사는 기겁을 하도록 놀랐다. 텁석부리 영감이 분 명 주강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저 , 분명 주강이라고 했소?" "아, 그렇다니 까요." 텁석부리 영감이야 을지마사의 되묻는 속사정을 알 까닭이 없 었다. 그러나 주강이라면 을지마사 자신과 아소미네가 떠나온 곳이다 고선지로부터 주강 마을의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의 토벌로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을지마사는 가끔 마을 사람 일부가 혹시나 목숨을 부지 해서 숨어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사실 아소 미네가 사막 가운데서 죽은 다음 외톨이가 된 을지마사가 지금 까지 주강 마을로 되돌아갈 수 없었던 것은 돌아가는 길을 몰라 서였다 을지마사는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이 들려주던 말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텁석부리 영감에게 지난 일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 다. 그래서 그간에 미심쩍었던 것만을 골라서 물었다. "그러니까 무주로 해서 남쪽으로 가면 주강이 나오지 않습니 까? "젊은 양반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아시오? 옛날 전쟁 때는 그 랬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가까운 사천 길을 따라 다니지요." "그럼 그 대리라고 하는 곳까지 길은 언제 뚫렸습니까? "허 , 작년에 난리가 나고서부터 사람들이 다니지요." "난리라니요? 을지마사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을지마사가 주강 마을을 떠나 중국의 각처로 유랑한 지도 벌써 햇수로 2년이 다 되어 가 고 있었다. 뒤이어 텁석부리 영감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깼다. "말도 마시오. 난리통에 숱한 사람이 죽었소." "도대체 누가 누구와 싸웠단 말입니까?" 텁석부리 영감은 긴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에 ,,, 아마도 그곳에서 살던 토박이들을 당나라 군대가 쳐 들어가 박살을 냈던 모양이오. 나도 풍문으로만 들었을 뿐이 오 텁석부리 영감은 그 이상은 자기도 잘 모른다는 어투였다. 을 지마사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혹시 ,,,,.' 하지만 그는 그럴리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힘차게 내저었다. 한편 주강에서 살아 남은 고구려 유민의 일부가 귀주성의 첩 첩산중으로 옮겨온 뒤로도 무심한 세월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한번 마을을 떠난 사람들은 세월이 흘 러도 돌아올 줄 몰랐다. 나라의 남편 자모가 그랬고, 또 아소미 네와 을지마사가 그랬다. 폐허가 되어 버린 주강 남쪽 마을로 가 끔 사람을 보내 보아도 이곳 저곳에 백골만 굴러다닐 뿐 아소미 네와 을지마사가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아 소미네와 을지마사에 대한 한 가닥의 기대마저 시들어 버린 지 오래였다. 오직 그들 두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가 하는 것만 이 궁금증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소미네와 을지마사가 떠난 후 당군의 급습을 받고 전멸하다시피 했을 때 자마우치가 이끌었던 유민 중 도망을 친 젊은이 천여 명이 있었다. 그 젊은이들은 어느 곳으로 도망을 쳐 서 지금쯤 어느 산하를 헤매이고 있는 것일까. 훗날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들은 젊은 탓에 예상보다 더 멀리 도망갈 수 있었다. 그들은 용케도 가파른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운남 고원에서 긴 장정을 끝냈다. 그들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보았다. 구름도 쉬어 넘는 그 높은 지대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아소미네와 을지마사 가 만나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와족 같은 원시인들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남소라고 불리는 나라 형 태를 갖춘, 상당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자신들을 백족 이라고 불렀다 백족은 전쟁을 모르고 평화 속에서만 살 아서 그런지 천성이 착했다_ 그래서 고구려의 젊은이들은 백족 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문제는 항상 중국 사람이 일으켰다. 황하 와 장강 유역에 비옥한 토지가 넘칠 만큼 있건만 그들의 야망은 국경 주변의 사람들을 복종시키고 죽여야만 직성이 풀렸다. 중 국 역사 3천 년은 피 묻은 역사 바로 그것이었다. 오지중의 오지 에서 바깥 세상과 등지고 사는 백족마저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세월이 지나다 보니 운남 고원 일대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정보 가 당나라에 들어갔고. 당나라는 드디어 대규모의 토벌군을 일 으켰다. 제1차 토벌군은 당현종 때 있었다. 바로 아소미네와 을지마사 가 바깥 세상을 정탐하기 위해 주강 마을을 떠난 지 1년 후의 일 이 었다. 당나라에서는 대장 이밀을 남만 정벌의 총대장으로 하 고 그의 휘하에 2만 명의 군사들이 산남서도(,사천성) 를 지나 귀주성 근처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토벌 대상인 대리의 백족이 아니고, 그 사이에 낀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애초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이 주강 마을에서 모두 죽은 것으로 여겨 토벌 대상으로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데 재수없게도 대리로 통하는 길목에 살고 있어 당나라 군대와 맞 부닥뜨려야만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바깥 세상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전운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데도 귀주성 고구려 마을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점심 무렵 나라의 집 사립문이 사납게 흔들렸다. - 곳에는 조무래기 몇 명이 헐레벌떡 모여들었다 "나라님 ! 나라님 !" 나라는 마침 점심을 들고 있다가 툇마루로 나왔다 "무슨 일들이냐?" "나라님 ! 글쎄 저 마읍산 꼭대기에서 ." 그제사 나라의 가슴속에 문득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 천천히 이야기해 보아라." "연기가 올랐다니까요," "연기가? 똑똑히 보았느냐? 그러나 아이들에게 다시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그때쯤 논 밭으로 일하러 나갔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마을 에 모여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불안해 하는 표정들이었다. 귀주성의 고구려 유민들은 옛날과는 생활 방식이 달랐다. 그 들은 주강 남쪽 마을에서의 일을 교훈삼아 마을의 안전을 위해 지나치리 만큼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 주변 높은 산봉우리마다 봉수를 설치하고 교대로 근무하게 했다. 특히 중국 쪽을 향해 있는 산은 마을의 안전을 위해 중요시 여겨 옛날 고구려의 수도였던 펴라성 북쪽에 있던 마읍산의 이름을 따서 그대로 불렀다. 그런데 뜻밖에도 마읍산 에서 위험을 알리는 봉화가 오른 것이다. 봉화는 오직 적이 침입 하는 경우에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 뒤이어 또 한떼의 사람들이 나라의 집 앙 공터 에 모여들었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훈련시킨 마을의 병사들 이 완전무장을 하고 집결한 것이다. 마을 병사들의 집결이 끝나 자 편대장 격인 아소수미 , 퉁소무, 대우상, 명림오묘, 귀실우오, 고인목, 목도사, 아불화도마, 창조무, 가한서한, 연개수근 등이 나라 앞에 섰다. 그들의 얼굴에도 아연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연장자라 총책을 맞고 있는 가한서한이 나라 앞 으로 다가갔다. "나라님 , 필시 불길한 일이 발생했나 봅니다." 그러나 나라는 군더기 말이나 주고받을 계제가 아니었다 군사들은 모두 집합했는가? "그럼 기다려 라." 사실 귀주성 고구려 마을의 군사가 1천 명이 조금 웃돈다고는 하나 전투 경험이 없어 오합지쫄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모의 다 음 세대는 무사안일로 지내다가 죽었거나 산 자라 할지라도 농 사일밖에 모르는 무지렁이들이고, 귀주성으로 도망와서부터 훈 련시킨 병사들이래야 이제 갓 20살이 넘은 애송이들이었다 그 래서 마을의 군사들을 통솔할 수 있는 노련한 지휘관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80이 넘은 나라가 그때까지 군사들을 지휘하고 있 었다. 고구려 마을의 문젯거리는 항상 주강 남쪽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3 40대의 중년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읍산에 봉 화가 올랐다는 말을 듣자 벌써부터 겁먹은 표정으로 나라의 얼 굴을 살폈다 그 가운데 짧은 턱수염을 한 중년 사내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나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라님, 아무래도 더 늦기 전에,,,... " 마을에서 인자한 할머니로 통했던 나라는 평소 때의 모습파는 달랐다 그녀의 눈빛은 매섭게 번뜩였다. 사내는 나라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는 제풀에 무안했던지 뒷말을 어물거렸다. "아니올시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 ." "도망 가자는 것이오? 그런 당신이나 어서 짐을 꾸려 이 마을 을 떠나시오." 사실 고구려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입밖으로 표현은 안 했지 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싸움이 될 수가 없었다. 나 라는 마을을 책임지고 있는 이상 단호하게 대처해야만 했다. 그 래서 집 마당에 모여 서성거리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간결 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지금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오. 결정은 사태의 윤곽이 어느 정도 파악된 다음에 내리겠소." 마을 사람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라의 입을 향했다. "만약 도망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지금 가시오. 오직 나를 따르는 자만이 이 자리에 남으시오." 군중심리란 참 묘한 데가 있었다. 나라가 딱 부러지게 말을 내 뱉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던 마을 사람들 의 분위기가 차츰 가라앉았다. 그들은 문득 주강 남쪽 마을에서 나라를 따라왔기 때문에 목숨을 건진 사실을 떠올렸다. 그때 마읍산에 나가 있던 파수병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그들 은 숨 돌릴 사이도 없이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나라님, 크 크 큰일났어요." "???" "와요 !" "무엇이 온단 말이냐? "군대들이 마구 이쪽으로 몰려와요." 불안으로 떨던 일이 막상 현실로 나타나자 마을 사람들의 표 정이 다시 한 번 새파랗게 질렸다. 그도 그럴 것이 파수병이 설 명하는 상황은 자못 심각했다 엄청난 규모의 군대가 마을을 향 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행군 속도는 상당 히 느렸다. 대군이 행군하자면 새 길을 내고, 또 군량과 공성 장 비 같은 것도 운반하자니 행군 속도가 느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그런 속도라면 당군의 공격은 내일 아침쯤 될 것 같았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도망갈 채비를 서둘러야 했다. 가산을 정 리해 짐을 꾸리고, 어린애들도 먼 길 떠날 준비를 시켜야 했다 이제 마을을 떠나면 당장 자기네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 수 가 없었다. 공터에 모인 사람들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불안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런데도 정작 마을의 최고 지도자인 나라의 입에서는 아무런 명령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나라님이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야." "이제 우리는 꼼짝없이 앉아서 죽게 생겼구나." "차라리 우리끼리 도망 갑시다 " "글쎄 ." 마을 사람들이 안절부절못하는데, 공터에서 나라의 카랑카랑 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러분의 조국 고구려는 동방에서 제일가는 강국으로 900년 이나 이어 오다가,,,,,, 마지막에 가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사람이 적어져 나라가 망했소. 그래서 그들의 후손 인 우리들이 남의 나라 땅에서 정처없이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 소." 공터에 모인 병사들은 침묵을 하며 나라의 열에 들뜬 목소리 를 듣고 있었다. "여러분들은 또다시 여러분들의 자식들이 남의 나라 종살이 를 하도록 버려 두겠습니까? 마을의 병사들은 젊었다. 나라의 외침을 듣고 있는 젊은이들 의 가슴속에서는 피가 끓어올랐다 나라는 일단 말을 멈추고는 병사들을 쏘아보았다. 나라의 표정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 었다. "여러분들은 고구려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중국 사람의 종 이 되어 살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차라리 고구려 사람으로 죽기 를 원합니까? "고구려 사람으로 죽겠습니다." 민족혼이 불타는 나라의 말에 감동을 받은 젊은 병사들은 울 먹이며 대답했다. 3 40대의 중년층은 이처럼 나라가 병사들과 함께 싸움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그들 나름대로 의견이 분분했다. 문제는 분위기 가 나라와 반대 방향으로 기우는 데 있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면 그 중에는 군중 심리를 부추기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었다. "아무래도 여자는 안 되겠어 ." 누군가 혼잣말하듯 내뱉었다.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말 을 받아 말했다 "더군다나 이젠 폭삭 늙었지 않아? "이러다가는 우리 자식들까지 다 죽이고 말겠어 " 마을 사람들의 동요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뻗 어 나갔다. 끝내는 마을에서 건달짓을 하는 오사명수라는 자를 자기네들 지도자로 올려 놓았다. 오사명수라는 자는 40대 초반 으로 논밭 일은 않고 패거리를 모아 술이나 마시고 사냥질이나 다녀 평소에도 나라의 속을 썩이던 자였다. 나라가 공터에서 돌아왔을 때는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오사명수는 나라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자기가 마치 마을 사람들의 대표라도 되는 듯 나라 앞에 떡 버티고 섰 다. 치켜세운 어깨에도 벌써 건방기가 잔뜩 들어 있었다. 그자는 나라의 얼굴을 노려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망 가는 겁니까? 안 가는 겁니까? 순간 나라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대신 단 호하게 말했다 "도망은 안 간다? "뭣 안 간다구? 그때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그럼 , 나라님은 마술이라도 부려서 우리를 모두 무사하게 할수 있습니까? 오사명수의 말은 다분히 나라를 깎아내리고, 마을 사람들의 흥분을 부추기고 있었다. "없소." 오사명수는 그것 보라는 듯이 교활한 얼굴로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는 또 나라를 다그쳤다. "왜 없지요? 나라님의 남편 자모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끌고 가서 아직까지 소식이 없소." "그리고 나라님은 또 주강 남쪽 마을에서 수많은 우리 고구려 유민들을 죽게 했소, 그건 그렇다치고 왜 도망갈 수 없지요? 우 리마저 또 죽이려구요? 어느덧 좌중은 나라를 단죄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 다. 이런 것을 적전분열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나라는 침착했다. 오히려 그녀의 대답 속에는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강한 의지가 깔려 있었다. "어차피 도망가도 죽소, 아니 그때는 모두 다 죽소. 중국 사람 들이 우리를 내버려둘 리가 없소." "도망가지 않으면 살 수가 있다는 말인가요?" "아니오. 그래도 우리는 죽을 것이오. 하지만 우리는 당군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 것이오." "그럼 ,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그냥 마을에 남아서 싸우겠소." 오사명수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 는 나라의 존재를 아주 깡그리 뭉개 버리듯 비아냥거렸다. "거룩하신 나라님, 마을의 최고 지도자가 고작 죽을 죄를 내 셨소? 어찌 보면 맞는 말이었다. 당나라의 원정군은 적어도 수만 명 은 될 텐데 고작 1천 명의 군사로 대항을 해서 어떻게 하자는 건 가. 그런데도 나라는 여전히 동요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어차피 희생할 사람도 있어 야 하오." "좌우지간 우리는 죽기 싫소." 그쯤 해서 마을 사람들과 나라 사이에 대화는 끝났다. 마을 사 람들 가운데 목숨을 내놓을 위험을 무릅쓰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오사명수와 그에게 동조하는 패거리들이 나라 집 안마당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도 덩달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 리고 그날로 마을 사람들 절반 정토가 짐을 챙겨 도망길에 올랐 다. 그래도 반수가량 남아준 것이 나라로서는 눈물겹도록 고마 웠다. 거기다가 천 명 남짓밖에 안 되는 마을 병사들 가운데는 도망가는 자기 부모의 말을 거역하고 남아 있는 병사가 많아 병 력 손실이 적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날 밤 마을 사람들 절반이 빠져 나간 고구려 마을은 한구석 이 텅 빈 가운데도 폭풍 전야와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직 나라의 집에서만 관솔불이 타고, 사람들이 모여 두런거 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긴장으로 두 눈을 부릅뜬 채 침묵하고 있는 젊은이들 의 얼굴을 둘러보며 차근차근 설명을 해나갔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당군에 비해서 턱없이 불리하다. 첫째 너 희들을 지휘할 대장이 없다. 나는 너무 늙어서 너희들과 함께 행 동할 수가 없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불리한 점이다." 관솔불에 비친 마을 젊은이들의 눈빛이 적개심으로 타올라 번 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각자 맡은 바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에게도 승산 은 있다. 싸움은 꼭 군대의 머릿수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가한서한이 나라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모두 독립부대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당군과 맞서 싸우면 절대 안 된다." "싸우면 안 된다구요?" "그렇다 낮에는 이산 저산으로 부지런히 옮겨 다녀라 만약 당군이 너희들을 쫓아 산으로 기어오르면 다른 부대가 쏜살같이 달려가 뒤를 물어뜯어라 그리고 즉시 빠져라 " 마을의 젊은 병사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그때까지도 치열 한 접전만을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 형편으로는 오직 이 길밖에 없다." "그럼, 언제 한번 싸워 봅니까? 젊은이들은 나라의 작전 지시가 약간 불만스러웠다. "그것은, 밤이다." "밤? 나라의 설명은 다시 계속되었다 "물론 밤에 싸운다 밤이 되면 모든 부대가 일시에 산을 내려 와 달려든다 그러고는 곧 산 위로 빠져라. 또 덤비고 또 빠진 다" "그럼 잠은 언제 잡니까?" "낮에 적당한 곳을 골라 한잠씩 자는 거다. 그것은 그때그때 너희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리고 또 있습니까? "있다." 나라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차근차근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병사들과 함께 행동할 수 없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작전 지시였다. -- 당군의 장막 안에서도 장수들이 모여 작전 회의를 하 고 있었다. 그들은 그날 해거름에 정탐대로부터 정보를 입수했 다. 정탐대의 보고에 의하면 거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골짜기를 뒤로 하고 제법 큰 마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마을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사는 듯하다고 했다. .. "고구려 사람들이 라고?" 당장 이밀은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가만히 옛날 일을 더 듬어 보았다 몇 해 전 당장예약수가주강 남쪽에서 고구려 사 람들의 씨를 말려 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모조리 죽었다는 고구 려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 남아 있단 말인가. 당장 이밀은 정탐대 장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장족을 잘못 본 것 아니냐?" "아닙니다. 가옥 구조나 마을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들이 모 두 고구려 것이었습니다 " "하, 그럼 어떡한다?" 만약 그들이 고구려 사람들이 분명하다면 자기네들에게 대항 해 올 것이 틀림없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싸움에 용맹스럽다는 것은 그도 수나라 양제나 당태종이 참패한 고사를 들어서 잘 알 고 있는 터였다. 더욱이나 당군의 이번 출병은 대리국의 백족들 을 정벌하는 것이 목적인데 뜻하지 않게 도중에서 거북살스런 일이 생겨 버린 것이다. "누구 좋은 계책이 없소? 당장 이밀은 예하 장수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백전백승의 장수로 알려진 허소의라는 자가 불쑥 나섰 다 그자는 검은 얼굴에 노랑수염이 듬성듬성 돋아 있어 생김새 가 볼썽사나웠다 "까짓것, 고구려놈들쯤이야, 일시에 덮쳐 깡그리 뭉개 버리면 될 일을 가지고 무슨 걱정을 그리도 하십니까? 허소의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이에 질세라 또 한 사람의 장수가 팔을 걷어붙이며 일어났다. 눈알이 부리부리하여 장수다 운 풍모가 있는 부장 사마광이었다. "저에게 일지군만 주십시오. 한시각 안으로 고구려놈들 모가 지를 베어 바치겠습니다. 아예 군령장을 써놓겠소 옛날부터 중국 사람들의 허풍은 대단했다. 허풍이 아니라고 해도 고구려 마을 하나쯤은 그들의 눈에는 대수롭지 않았다. 그 때 난데없이 벼락을 치는 듯한 호통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들 놀 라서 쳐다보니 대장 이밀의 얼굴이 노기로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대들은 아직껏 손오병법토 못 읽어 보았소? "???" "예로부터 작은 적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고 했소." 좌중의 장수들이 모두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당장 이밀을 주시했다. "다시는 예약수 장군과 같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겠소, 불 씨를 살려 두면 나중에 큰 불이 되어 제어할 수 없는 법." "그럼 ? "당장 내일 새벽에 부대를 나누어 팔방으로 출동시키시오, 도 망가는 놈들부터 모조리 죽여야만 고구려놈들 씨를 말릴 수가 있소." "그럼 마을은 그 다음에 덮칠 작정입니까?"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던 부대장 사마공의 조심스런 물음이 었다 "아니오, 이런 산악 지대에서는 지형이 첫째요. 무모하게 마 을로 들어갔다가 고구려놈들이 불이라도 지르면 그때 가서 어찌 하겠소?" 장수들은 모두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더 이상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오직 당장 이밀만이 호기롭게 제장들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내일 점심때 진격하오. 우선 전군이 마을을 둘러싼 다음 이상이 없으면 그때 가서 중군과 후군이 마을로 진입할 것 이 오." 역시 당군의 총대장쯤 되면 전쟁의 달인이었다 당장 이밀의 작전도 고구려 마을 못지않게 치밀했다 다음날 새벽 당군은 예 정대로 전군을 풀어 마을을 멀리 우회해서 뒤지기 시작했다. 우 선 도망가는 놈부터 더 멀리 가기 전에 몰살시킨다는 소름끼치 도록 빈틈없는 작전이었다. 그날 아침 예상대로 당군은 고구려 마을에서 남쪽으로 30리쯤 떨어진 산중턱에서 도망가는 오사명수의 무리들과 부딪쳤다. 상 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가족을 이끌고 남부여대해서 도망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멀리 달아날 수 있었겠는가. 도망가는 마을 사람들은 산 아래에서 개미떼처럼 기어올라오 는 당군을 내려다보고는 그만 발이 얼어붙어 버렸다. 대신 절망 의 탄식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아, 이것이 마지막이로구나! 또 몇 사람은 갑자기 허공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나라님 , 나라님 ." 그러나 어디에서고 나라의 대답은 들려 오지 않았다 그런데 인간이란 막판에 몰리면 삶의 본능이 극한으로 치닫는 가 보다. 한동안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못 잡던 마을 사람들의 눈 알이 갑자기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먹이를 발견한 짐승떼처럼 한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뒤이어 누군가 숨 넘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으윽, 끄르르륵." 오사명수가 절명하면서 마지막 토해 내는 숨소리였다. 마을 사람들이 일시에 오사명수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따서는 그때 까지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목을 장대에 꽃았다. 그러고는 다시 떼를 지어 산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즉 지도자의 목을 당군에게 바쳐 항복을 하자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무모한 행동이었다. 당군들은 쫓기던 고구려 마을 사람들이 제발로 걸 어 들어오자 남김없이 주살해 버렸다. 갓난애까지 메어쳐 죽이 는 데 불과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애당초 당군의 출병 목적은 항복을 받자는 것이 아니었다. 변 방에 사는 이민족을 모조리 죽여 자기네들 자손만대에까지 그 후환을 남기지 않겠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이렇게 당장 이밀의 첫 작전은 성공리에 끝났다. 다음은 고구 려 마을을 쑥밭으로 만들 차례였다. 당군의 전위대 5천여 명은 이른 점심을 끝내자 함성을 지르며 마을로 짓쳐 내려갔다. 흡사 일시에 논밭을 덮치는 메뚜기떼들 같았다. 그러나 마을로 돌입 한 당군들은 그만 제자리에 서서 멀뚱거리며 서로의 얼굴만 쳐 다보았다. 예상했던 저항이 없었다. 공격이 너무나 싱겁게 끝나 버린 것이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중늙은이들 아니면 아녀자나 조무래기 아이들뿐이었다. '허허허 , 공연한 걱정을 하다니 .' 매사에 조심스러운 부대장 사마광은 하늘에다 대고 앙천대소 를 했다 서산명동서일필이 바로 이런 것인가? 그러나 중군으로 뒤쫓아온 당장 이밀은 달랐다. 그는 여전히 의심이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주위를 번뜩거렸다. 그리고 혼잣 말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안 되 겠는걸 ." -"지세가 마음에 안 들어 ." 고구려 마을이 있는 곳은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선 분지였 다. 그래서 마을이 마치 우물 속 같은 곳에 깊숙이 들어앉은 형 상이라 이밀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또,,,,,,." "젊은 남자들이 안 보여 ." 역시 이밀의 눈은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모두들 도망치다 죽은 것은 아닐까요? 곁에 있던 장수 허소의가 겨우 천여 호밖에 안 되는 마을 하나 를 상대로 무엇이 그리도 겁나느냐는 투로 물었다. 그제서야 당 장 이밀도 장수의 체통을 생각했던지 껄껄 웃었다. "내 그대들을 한번 시험해 보려고 한 말이었소." "이제부터 마을을 뒤져 고구려놈들을 몰살시켜야겠지요? 부대장 사마광의 물음이었다. 그것이 당군의 예정된 순서이기 도 했다, 그러나 당장 이밀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저런 아녀자들을 지금 죽여 무얼 하나. 밥이나 시켜 먹고 내 일 아침에 처치해도 늦지 않다." 그날 저녁, 마을은 3만 명이나 되는 당군들로 법석을 떨었다. 한쪽에서 밥을 짓는가 하면, 마을의 소와 돼지를 끌어다 잡아 먹 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데 정작 큰일은 그날 밤에 벌어졌다. 마을 여자들에게 저녁을 짓게 하여 모처럼 포식한 당군들은 이집 저집 빈집을 찾아들어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개 중에는 여러 날의 행군에 지쳐 초저녁부터 잠에 곯아떨어진 병 사들도 있었다. 밤이 삼경에 이르고, 마을이 조용해질 무렵이었 다. 느닷없이 마을이 소란해졌다. 뒤이어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 의 비명 소리와 신음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들려 왔다. 어둠을 뚫 고 당군의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고구려군이닷? "불, 불을 밝혀라? 사람들이 급히 뛰어다니는 발자국 소리, 비명 소리, 신음 소리 가 일시에 마을 주변의 정적을 깨뜨렸다. 이어서 또 난데없는 뱅 과리와 징소리가 천지를 뒤흔들며 요란하게 울렸다 엄청난 굉 음은 어둠을 찢으며 온 사방에 들려 왔다. 마을의 북쪽에서 나타 하는가 하면 어느새 남쪽에서도 들려 왔다. 마을은 급기야 아수 라장으로 변해 갔다. 꾕과리와 징소리 사이로 사람들이 죽어 가 면서 지르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어두운 밤을 갈기갈기 찢었 다. 나라의 작전 지시에 따라 낮시간 내내 산속에 숨어 있던 마 을 병사들이 밤이 깊어지자 산을 내려와 당군을 덮친 것이다. 온 마을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우왕좌왕하는 것은 대부분 당 군들이었다. 당장 이밀도 불시에 당한 일이라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얼 빠진 얼굴로 어둠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침 나절에 도망가는 고 구려 사람들 2천여 명을 목벤 후, 또 고구려 마을의 규모가 별것 아니라고 판단해 방심한 것이 그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그때 곁 에 있던 부대장 사마광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밀 장군, 이 일을 어떻게 하지요? "어떻게..., 어떻게 하다니? "빨리 수습해야지요 "그래 , 당군을 모두 공터로 집합시켜 라." 아! 나라님 "빨리 병사들을 불러 외쳐라. 당군은 모두 공터로,,,,,,." 역시 이밀의 판단이 한걸음 빨랐다 전쟁터에서 밤중에 뜻하 지 않은 변고가 발생했을 때는 병사들을 한곳에 집결시키는 것 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래야 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가 있 었다. 다음날 날이 밝고 점호를 했을 때 당장 이밀은 다시 한 번 신 음을 토해 냈다. 어젯밤 고구려 병사들의 기습을 받아 죽거나 부상당한 병사가 자그마치 5천 명이 넘었다. 그리고 죽은 병사 들의 대부분은 마을 병사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피아가 식별되 지 않은 밤이라 난장판 속에서 당군 저희들끼리 죽고 죽인 결과 였다. 이밀은 즉시 장수들을 소집했다. 장수들 가운데도 어젯밤의 난장판 속에서 몇 사람이 죽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밀은 불 시에 당한 참패로 밤새 잠을 못 자고 고뇌를 한 탓에 얼굴이 몰 라 보도록 초췌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살기가 돋 쳐 있었다. "지금부터 고구려놈들을 추격해서 깡그리 죽인다 " 어젯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장수들이라 모두들 침묵만 지켰 다 오직 부장 사마광이 이밀에게 간언을 했다. "이밀 장군, 차라리 일단 후퇴를 했다가 전군을 수습한 다음 따로 작전 계획을 세워 고구려군을 섬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그러나 감정이 격해 있는 이밀은 사마광의 말을 묵살했다 "그대는 날더러 도망가라는 말이오? 사마광은 더 이상 이밀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백해무익임을 깨닫고는 침묵을 지켜 버렸다. 뒤이어 이밀의 명령이 거침없이 떨어졌다. "지금부터 부대를 재편성해서 고구려군을 끝까지 추격한다. 그리고 한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인다." "그리고 또,, ,,,,." 이밀의 입에서는 어젯밤의 복수라도 하듯 계속 잔혹한 말이 떨어졌다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붙잡아 꽁꽁 묶거라." "아니 , 당장에 처치하는 게 아닙니까? 부장 허소의가 노란 수염이 돋은 검은 얼굴을 씰룩거리며 이 밀을 쳐다보았다. "아니 다." "예엣?" 그곳에 모인 장수들이 하나같이 의아스럽다는 눈초리로 이밀의 표정을 살폈다. "천천히 죽인다." "산 속에 틀어박힌 고구려 병사놈들을 한꺼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인질을 미리 죽여 버리면 큰 손해지. 흐흐흐." 이밀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자다. 보통 사람이 미처 생각 지 못하는 흉계를 썼다. 그는 군사를 동원해 고구려 병사들을 죽 이는 한편, 마을 사람들을 인질로 병사들을 마을로 유인해서 몰 살시켜 버리겠다는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당군은 즉시 이밀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사마광, 허소의, 왕 온, 주덕 등이 이끄는 1만여 명의 당군은 8대로 나뉘어 마을 주 변의 산 속을 포위하면서 올라갔다. 그리고 나머지 병사들은 마 을 사람들을 꽁꽁 묶었다. 마을은 또 한번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어젯밤의 당 군이 아니라 고구려 마을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온 마을을 뒤흔들었다. "어머니 , 날 살려요." "나시야! 나시야? 마을 사람들은 줄줄이 묶여 가면서도 서로 가족들을 부르면서 발버둥쳤다 그러나 끌고 가는 당군들은 인정사정 없었다. 발길 질과 욕설을 계속 퍼부어 대면서 공터로 내몰았다. 그곳에는 당장 이밀이 마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줄줄이 묶여 들어서자 그의 입가에는 어젯밤의 복수라 도 한 듯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렀다. 이윽고 마을 사람들이 공터 를 가득 메우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랏줄에 묶여 있는 마을 사람들을 휘둘러보았다 "나는 당장 이밀이다 너희 병사들이 산속에서 내려와 항복을 하면 너희들을 살려 주겠다 " 이밀은 계획한 대로 마을 사람들을 협박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오늘준으로 너희들을 모조리 죽일 테니 그리 알아라." 갑자기 소란스런 울부짖음이 뚝 그쳤다. 당장 이밀의 말에 마 을 사람들은 마치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때 였다. 머리가 허옇게 센 노파 한 명이 오랏줄에 두 손이 묶인 채 당 장 이밀 앞으로 걸어나가 버티고 섰다 이어서 카랑카랑한 목소 리가 공터를 울렸다 "당신이 당군 대장이오?" "그렇다 ." 이밀은 얼결에 대답을 해놓고도 시덥잖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조롱하는 눈초리로 나라를 노려보았다. "싸움에도 법도가 있는 법. 정정당당히 병사들끼리 싸울 일이 지, 연약한 아녀자들을 못살게 굴어도 되는 것이오? 이것이 당 나라 군사가 싸우는 방식이오?" 나라의 말은 당당하면서도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이밀은 나라 의 조리 있는 얘기에 말문이 막히자 벌컥 화를 냈다. "이 쌍년의 노파야. 주둥아리를 닥치지 못하느냐!" 그렇다고 쉽게 기가 꺾일 나라가 아니었다, "당장, 당신은 일국의 장수로 기본 예의도 모르는 인간이오? 나도 당신과 더불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오 ." "-대체 넌 뭐냐?" 이밀은 기가 막히는지 비아냥거리듯 물었다 "나는 이 고구려 마을의 대장이오." "뭣 ! 네가 대장이라자? 하하하." "하하하." 그때 옆에 있던 다른 장수들도 노파가 대장이라는 소리를 듣 고는 박장대소했다. 이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내뱉었다 "필시 미친 노파로구나. 이미 망해 버린 고구려가 어디 있으 며 또 대장은 무엇이냐?" 그러자 나라의 타는 듯한 눈빛이 이밀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고구려가 망하다니? 고구려 사람들이 사는 곳이면 그곳이 어 디든간에 영원한 고구려다." 당장 이밀과 장수들은 나라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나라 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그럼, 너희들은 한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중국이 아니며, 또 수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중국이 아주 없어진 것이냐? 이밀은 그제서야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노파를 찬찬히 훌어 보았다. 노파의 당당한 태도나 조리 있는 언변으로 보아 결코 미 친 여자가 아닌 성싶었다. 아니, 어쩌면 노파의 말대로 노파가 고구려 마을의 대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가 정말로 이 마을의 대장인가? "이미 신분을 밝혔는데 웬 잔말이 그리도 많은가? 이밀은 나라의 말에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았다. 불현듯 그의 머리 속에 한 가지 묘책이 떠올라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편, 아침부터 시작된 당군과 고구려 마을 병사들 사이에 기묘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와 같은 전투는 양편 모두 처 음 경험하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당군들이 고구려 병사들을 뒤 쫓아 산꼭대기로 오르면 고구려 병사들은 눈앞에서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떼의 고구려 병사가 당군의 뒤 를 치며 기습전을 펼쳤다 고구려 병사들은 이곳의 지리에 익숙한데다가 산에는 숲이 우 거져 이리저리 빠져 다니면서 당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사 이 당군의 사상자도 눈에 띄게 불어났다. 그러나 오후가 되어 싸움이 길어지자 정작 더 괴로운 것은 고 구려 병사쪽이었다 마을 병사들이 당군에게 쫓기는 과정에서 더러 붙잡히거나 죽임을 당하는 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군 은 마을 병사들이 상대하기에는 수효가 너무 많았다. 당군은 가 끔 쉴 수도 있었지만, 수가 적은 마을 병사들은 마치 몰이꾼들에 게 쫓기는 산짐승처럼 이산 저산으로 뒬 새 없이 뛰어다녀야만 했다. 이렇게 온종일을 싸우다 보니 마을 병사들은 완전히 녹초 가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어 .' 진종일 피하고 물어뜯기 전법으로 기진맥진한 가한서한이 제 풀에 주저앉으며 혼잣말을 뱉었다. '차라리,,,,,, 그는 산을 내려가고 싶었다. '이것이 우리들의 마지막인가.' 지칠 대로 지쳐 있는 귀실우오도 탄식을 토해 냈다. 그들은 벌 써 산중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다른 부대의 사정도 가한 서한이나 귀실우오의 부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산을 내려가지 않고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일단 산을 내려간다면 주어진 운명에 따를 도리밖에 없었다. 하루해가 어느덧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진종일 쫓고 쫓기며 싸웠던 당군들도 이미 마을로 철수했는지 온 산이 텅 빈 듯한 적막에 쉽싸였다. 그때였다,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던 연개수근이 소리를 질렀다. "저것 봐!" 모두의 시선이 연개수근의 손끝이 가리키는 쪽을 따라갔다. 이어서 놀라운 광경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이 꽉 들어찬 마을 공터 한가운데에 흡사 망루처 럼 높게 만들어 놓은 대가 보였다. 그리고 늙은 여인 하나가 대 위에 세워져 있었다. 먼 빛으로 보아도 분명 나라 할머니였다. 이어서 마을 사람들의 외침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빈 산 에 메아리쳤다 "고구려군은 어서 항복해라 " "그렇지 않으면 너희 대장을 태워 죽이겠다 " 당군의 위협에 못 이겨 외침 소리는 반복해서 들려 왔다, 대 위에 끌어올려진 나라는 비장한 각오를 했다. '이제 내 몸을 바칠 바로 그때가 이르렀구나 내가 죽어서 고 구려 유민들이 산다면, 주몽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산중턱에서 손에 땀을 쥐고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병사 들의 입에서도 저마다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 산을 내려가자.' '나라 할머니를 살려야 한다.' 그들이 몸을 추스려 마악 산을 내려가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헉 하고 숨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다시금 공터 쪽으로 눈길이 쏠렸다. 다음 순간 그들은 맥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 렸다. 마치 흰나비가 너풀거리는 것처럼 나라 할머니가 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그들은 똑똑히 보았다. 나라는 스스로 제 몸을 던 져 버린 것이다. 땅에 떨어진 나라는 절명해 버렸는지 더 이상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마을 병사들의 가슴속에는 저마다 뜨거운 격정이 솟구쳐 올랐다. '나라 할머니의 뒤를 따르자!' '그래, 우리도 함께 죽자? 그 순간 마을 병사들의 머리 속에 번쩍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젯밤 나라가 작전지시를 끝낸 다음 자기네들에게 건네준 종이 쪽지였다. 나라는 작전지시를 내린 다음 각 부대마다 종이쪽지 를 하나씩 나눠 주면서 혹시 마지막 순간이 오거든 펴보라고 당 부를 했었다. 이제야말로 바로 그때가 이른 것이다. 병사들은 랴부랴. 그 쪽지를 펴보았다 비로소 정신이 든 그들은 머리를 맞 대고 다음 행동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아 마을 주변 이곳 저곳에서 검은 연기 가 하늘로 치솟아올랐다. 연기와 더불어 불길이 일단 치솟아오 르자 순식간에 맹렬한 기세로 마을 주위로 번져 갔다. "아, 저건 또 뭐지?' 이밀 이하 장수들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공입 니 다." 기어드는 목소리로 부장 사마광이 대답했다. "화공? 그러나 당나라 장수들은 머뭇거리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불길과 함께 내지르는 함성이 가까이에서 들려 왔다. "당군 죽여라? "고구려 원수를 갚자? 마을 병사들은 이미 죽음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서운 기세로 마을로 돌진해 당군 속으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싸움 의 양상이 바뀌었다. 불길을 피해 우왕좌왕하던 당군들은 설상 가상으로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드는 마을 병사들을 더 이상 당 해 내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당군의 일각이 무너지자 그 여파가 순식간에 전군에 파급되어 도망가는 당군으로 산야가 뒤 덮였다. 앞서 도망가던 이밀이 마읍산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굉 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꽝 꽝 꽝. 나라가 생전에 비상시를 대비해서 마읍산 골짜기에 묻어둔 염 초와 유황이 폭발하는 소리였다. 당군은 또 한번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쨌든 이밀은 목숨만은 보존했다. 고구려 마을을 통과하게 된 것이 그로선 불운한 일이었다. 그는 대리국의 백족 정벌길에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군사의 태반을 잃고 장안으로 되돌아 갔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 당 시어사 이밀은 끝내 고구려 유 민들과의 운남성 전투에서 죽임을 당했으니 기구한 운명이랄 수 밖에 . 당군과 혈전을 치른 후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갑자기 고구려 마을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고 그 불길은 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온 마을을 순식간에 불태웠다. 한떼 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나라의 유 언에 따라 남쪽을 향해 정처없이 떠나가는 고구려 마을 사람들 이었다. 행렬이 산중턱에 이르자 모두들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마을을 내려다보며 끝없이 오열했다. "나라 할머니 , 저희들은 떠납니다. 편히 잠드소서 ." 훈테쿠시 산맥을 넘어 장안을 거쳐 서쪽을 향해 가고 있던 을지마사는 당나귀 대상 텁석부리 영감과 헤어져야 할 지점에 이르렀다 길을 곧장 가면 농우가 나오고, 왼쪽으로 꺾어들어 남쪽길로 접어들면 아 소미네와 함께 당인 웡을 따라왔던 사천성 길로 통한다. 사천성 쪽으로 계속해서 가면 큰 강이 나올 것이고 강을 건너 조금 더 가면 하마터면 생목숨을 잃을 뻔했던 와족 부락, 그리고 이어서 주강 마을이 나올 것이다. 어떻게 할까?' 고선지의 말에 의하면 주강 남쪽 마을은 당군에 의해 전멸당 했다고 했다. 그래도 찾아가서 폐허가 된 마을의 잔해를 붙들고 통곡이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을지마사는 주강 마을이 있는 사 천성 쪽의 산봉우리들을 바라다보았다. 파란 하늘 속으로 흰구 름이 산봉우리를 넘어가고 있었다. "아, 그립고 보고 싶다." 흰구름 속에 주강 마을과 정다웠던 얼굴들이 문득문득 보였다 가는 사라져 갔다 나라. 나데, 온수곤수, 자마우치, 그리고 함 께 놀던 고향 동무들 어느덧 을지마사의 뺨 위로 굵은 눈물 방 울이 흘러내렸다 을지마사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 지 않고 입술을 깨물며 독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렇다. 원수를 갚기 전에는 주강 마을에 돌아가서 죽은 자 를 위해 통곡할 수 없다' 을지마사는 다시 한 번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자꾸만 앞일이 막막해지며 밀려드는 허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혼자서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텁석부리 영감 일행이 목을 축이기 위해 주막으로 몰려가는 걸 보며 , 을지마사는 혼자 나무 밑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을지마사의 머리 속에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장안성에서 만났던 이정기 라고 하던 젊은이. 그는 평로절도부의 일개 비장이라는 보잘것 없는 직책에 있다고 했다. 비록 한밤중에, 그것도 고선지, 왕사 례와 함께한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정기의 호방한 풍모와 기개는 을지마사에게 오래도록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을지마사의 마음은 이정기의 됨됨이에 끌렸다. 그라면 적어도 조국 고구려를 위해서 큰 목숨을 걸 수도 있으리라는 인간적인 신뢰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을지마사가 이정기를 찾아간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그와는 잠간 스쳤을 뿐 그 가 을지마사를 기억하리란 것도 알 수 없었고, 또 평로절도부가 있는 곳은 옛 고구려 국경인 요녕성 북쪽 끝이라 지금 을지마사 가 와 있는 경서와는 반대쪽에 있었다 부지런히 걸어도 3 개월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다시 고선지를 찾아가는 거다.' 을지마사의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어쨌든 고선지와는 지난 1년 동안 친형제와 같은 우정이 있었 다. 을지마사는 아소미네가 죽은 이후로 이 세상에서 고선지가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고선지도 을지마사를 친아우처럼 아꼈 다. 그러나...... 고선지는 장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지 만 혈기에 차 있는 을지마사의 기대를 채워 주기에는 미흡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을지마사의 가슴 한구석이 항상 빈 듯 여백 이 남았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항상 뜻하지 않는 방향으로 굴러가 게 마련이다. 을지마사가 세 갈래의 갈림길에서 고난을 무릅쓰 고서라도 이정기를 찾아가지 않고, 인간적인 정에 끌려 고선지 를 찾아간 것이 훗날을 위해 잘한 일이었을까? 을지마사가 고선 지를 찾아가기로 마음을 굳힐 무렵, 대상 패거리들이 주막집을 나서는 것이 보였다. 텁석부리 영감이 취기가 올라 빨개진 코를 당나귀처럼 벌름거리며 다가왔다. 텁석부리 영감은 그때까지 제자리에 꼼짝 않고 있는 을지마사 를 보자 대뜸 큰 소리로 물었다. "을지 뭐라더라. 총각 어떻게 하-소?" '저 , 농우 쪽으로 가렵니다." "농우를 혼자서? 경험이 많은 그는 취중에도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그 먼 길을 혼자서는 어려워 " "그럼 ? "주막에서 며칠 묵으면 그쪽으로 가는 대상들이 나타날 거요. 함께 가시오." 을지마사는 텁석부리 영감의 당나귀 대상들과 헤어진 다음 일 단 삼거리 주막집에 묵기로 했다. 5일째 되는 날, 마침 기다리던 대상떼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당나귀가 아니고 낙타떼를 거느리고 있는 대상들이었다. 그들은 긴 장옷을 입고, 큰 코에 파란 눈을 한 서역 사람들이었다. 얼핏 헤아려 보니 일행이 10여 명 남짓 되었다. 을지마사는 반가운 나머지 체면불구하고 그들 을 찾아갔다 을지마사는 풍채가 건장하고 눈알이 부리부리한 40대 중년 사 내가 대상의 주인인 듯싶어 그 앞으로 가서 인사를 했다. "을지마사라고 합니다 농우까지 가는 길입니다." "나는 알칸이 라고 하오. 우리는 서역으로 가는 길이오." "괜찮으시다면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알칸이라고 하는 중년 사내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을지마사의 위아래를 훌텄다. 그러고 나서 일행들을 뒤돌아보고 난 다음 을 지마사를 다시 쳐다보았다. 을지마사는 혹시나 거절을 당하면 어떡하나 몹시 긴장이 되었다. "농우엔 무슨 일로 가시오? "농우병마절도사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곳 고선지 장군 밑 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당신은 고구려 사람?" "그렇 소 , " 을지마사의 이야기를 듣고 난 대상 알칸은 금세 낯빛이 부드 러워졌다 뒤이어 다른 일행들이 을지마사에게 옆자리를 권하며 친절하게 굴었다. 당시에는 대상길에 믿을 수 있는 남자들이 많 을수록 좋았다. 간혹 도중에 비적을 만나 물건과 돈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었는데, 젊은 남자가 많으면 비적과 맞서 서 싸우는 것이 그만큼 유리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상들은 을지 마사의 듬직한 체격에 마음이 놓이는지 싱글벙글거렸다. 그들의 얘기로는 석국(중앙아시아 타슈켄트)으로부터 허 텐으로 날라온 유리그릇, 구슬, 황금, 향료를 받아 싣고 장안에 다 팔고는 대신 비단을 사 가지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비단 은 천 냥의 값어치가 있어 일단 허텐이나 쿠차에 가져다 놓으면 석국의 장사치들이 기다렸다가 되받아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석국 사람들이 중국 비단을 입습니까? "아니지요. 그들도 장사꾼들입니다 " "그럼 , 어디다가 팔지요? "대식국(아라비아) 상인들이 석국에 와서 사갑니다." "대식국 상인들은요? "잘은 모릅니다만, 풍문에 의하면 대식국 상인들은 더 서쪽에 서 사는 라마(로마) 사람들에게로 가져가서 판다고 합디다." 을지마사는 대상들의 말을 들으며 놀랐다. 도대체 비단이 무 엇이길래 대상들이 지구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의 수십만 리 길을 목숨을 걸고 실어 나르는 것일까? 당시 허텐 대상이 을 지마사에게 이야기해 준 동서로 잇는 대상들의 통로가 바로 비 단길, 실크로드였던 것이다. 실크로드는 중국의 장안으로부터 시작해 이태리 로마에 이르 기까지 중앙아시아의 스텝지대를 동서로 관통하는 교역로였다. 실크로드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올라간다. 이 실크로드를 통해 무수한 상품들과 민족들이 이동하면서 희비와 애환의 역사를 만 들었다. 당나라는 현종대에 이르러 나라가 안정되자 국가에 막 대한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실크로드의 상권을 잡고 싶은 욕 심이 생겼다. 그래서 고선지로 하여금 실크로드를 위협하는 서 역의 주변 국가들을 정벌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도대체 비단이라는 물건이 얼마나 비싼 것입니까? 을지마사는 궁금해서 알칸에게 넌지시 물어 보았다. 그러나 알칸은 상거래를 모르는 을지마사에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기 가 난처한 모양이었다. "-라마에 비단을 가지고 가면 라마 사람들은 비단 무게만 큼의 황금을 주는가 봅디다." 알칸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시 사치가 극에 달했던 로마 귀족 들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우아하게 아름다운 비단옷에 눈이 멀 어 정복지에서 약탈해 온 그 많은 황금을 비단옷을 사는 데 탕진 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로마시대 이래로 유럽 사람들은 연금술 과 비단의 무게를 더 나가게 하는 중양제 ) 연구에 매달리 며 일확천금을 꿈꾸었다. 수세기에 걸친 이들 연구는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실험을 거 듭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과학이 발전했다 이로 인해 서양 의 과학이 동양보다 앞서가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으니 황당하기 짝이 없던 연금술과 비단의 중양제 연구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은 것이다. 아무튼 을지마사는 당나라 황제 현종으로부터 서역 정벌의 명 을 받은 고선지 장군을 찾아가기 위해 대상들과 일행이 되어 길 을 떠났다. 을지마사는 서역이 초행길이 아니었다 아소미네와 함께 갔었 고, 그 아소미네가 사막 한가운데서 모래 바람에 묻혀 죽는 비운 도 겪었다. 장안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농우에서 만난 고선지 장 군과 함께였다. 그러나 농우로 다시 돌아가는 길은 여전히 험하 기만 했다. 반사막지대의 황량한 들판을 지나면 풀 한 포기, 나 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바위산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 바위산을 넘으면 또 바위산. 이번에는 대상들과 함께 가는 길이라서 낙타 를 타고 가지만 그래도 가도가도 끝이 없는 반사막길은 지루하 고 고달팠다. 새벽별을 보고 낙타등에 올라타면 점심 무렵에야 잠시 쉬며 낙타젖으로 만든 치즈조각과 (큰 밀빵)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다시 해가 질 무렵까지 행군이 계속되었다 도중에 잠시 쉬어 가는 시간이라면 대상들이 모두 이슬람 교 인이기 때문에 하루에 다섯 번씩 해가 지는 서쪽을 향해(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해) 경배를 드리는 때였다 그럴 때면 물지 마사는 그들이 양탄자를 모래 위에 깔고 경배하는 모습을 혼자 서 우두커니 바라보곤 했다. 하루는 알칸이 을지마사에게 물어 왔다. "고구려 사람들은 무엇을 믿소? "우리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의 하느님? 알칸은 을지마사의 의외로운 대답에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렇소.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 으수(환웅)의 자손들이오, 그 래서 매년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하느님께 동맹이라고 부르는 제사를 지내고 있소." "역시 , 고구려 사람들은 다른 데가 있군요." "???" "잘났다고 시건방을 떠는 중국 사람들도 기껏해야 용이나 떠 받들고, 서역 사람들도 대개는 해나 불을 믿는데 고구려 사람들 이 지극히 높은 하느님을 섬겼다니 놀라운 일이오." 그 후부터 알칸은 고구려 후예인 을지마사를 다르게 보는 눈 치였다 행군은 계속되었다. 삼거리 주막을 출발해 농우까지는 도중에 인가 하나 눈에 띄지 않는 무인지경. 가도가도 보이는 것은 억겁 의 세월에 곰삭아 버린 민등산과 황량한 돌투성이 언덕들이었 다 때가 G월이라 태양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한복판에 떠서 왼종일 이글거리며 대지를 끓게 하다가 어느덧 황토색의 민등산 능선 위로 기을 때쯤 되면, 진빨강색으로 타올랐다 그 진빨강색 의 태양이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햇살을 길게 드리우면, 민 등산의 그림자도 모래 위로 길게 뻗었다. 대상들을 따라가는 을지마사의 고달픈 여정이 6일째 되던 날 이었다 을지마사의 머리 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을지마사는 왜 그 생각을 지금까지 하지 못했을까 하고 스스로 놀랐다. 뒤돌아보니 마침 하얀 터번을 머리에 쓴 알칸이 뒤따르 고 있었다. "알칸, 당신들이 허텐으로 간다고 했습니까? 을지마사가 큰 소리로 확인하듯 물었다 "그렇소. 허 텐으로 가오." 문득 을지마사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혹시 자숙이 란 분을 아시오?" "자숙? "허텐에서 장사를 크게 하는 자숙 대인 말이오," "아하! 자숙 대인이라면 알다뿐이오. 바로 우리 대상들의 물 주요 물주라면 대상들에게 돈을 대주고 장사를 시키는 거상을 말한 다 알칸이 자숙 대인을 안다는 말을 듣자 을지마사는 가슴이 설 레었다. 자숙 대인은 바로 무메의 아버지 . 을지마사의 머리 속에 참으로 오랜만에 무메의 얼굴이 떠오르자 아련한 그리움으로 말 문이 막혔다. 알칸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 을지마사에게 물었다 "을지마사, 당신이 어떻게 허텐의 자숙 대인을 아시오? 을지마사는 대답하기가 뭣해서 적당히 둘러댔다 "그분 밑에서 몇 달 동안 일을 했소." "아, 그래요? 알칸은 을지마사의 말을 듣고는 괴이쩍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 뚱거렸다. 그때쯤 을지마사는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무메는 어찌 되었을까? 무메에 대해 한번 물어 봐도 될까? "그럼, 저,,,,,, 자숙 대인의 딸을 아시는지요? 을지마사는 더듬거리며 말을 해놓고도 혼자서 얼굴을 붉혔다 "-그 아름다운 무메 아가씨를 말하는 거요? 을지마사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알칸 은 대답은 않고 낙타 위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세상에 지지리도 박복한 아가씨지...... " 을지마사의 귀가 번쩍 뜨였다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남의 집 가정사라 말할 수 없소." 그사이 무메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일까? 그러나 알칸은 그 만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럴수록 을지마사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다시 말을 걸었다. "여보시오, 알칸. 나는 그 집에서 한식구나 다름없이 지냈단 말이오. 나쁜 일이 있었거든 이야기를 해주시오," "그래도 귀한 집 아가씨 일을 어떻게 말한단 말이오? "나는 그 집 가족이나 진배없소. 어서 들어 봅시다 " 알칸이 잠시 머뭇거리다 을지마사의 성화에 못 이겨 입을 열 었다 "저, 오식닉국의 왕자 한 분으로부터 청혼을 받았는데, 마가 끼었던지 무메 아가씨가 갑자기 중병이 들어 버렸소," "중병 ? 을지마사가 화들짝 놀랐다. "대관절 무슨 병 이오?" "낸들 그것을 알겠소? 아무튼 허텐에서 아가씨 얼굴이 안 보 인 지가 거진 반 년은 지났소, 풍문에는 아가씨에게 귀신이 씌었 다고 합디다." 알칸은 마치 친딸이 불행을 당하기나 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 었다. 을지마사도 더 이상 물어 보기 민망해 입을 다물었지만 마 음이 개운치 않았다 무메는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 살아 있기는 한 것일까? 을지마사는 고선지 장군 을 따라 원정길에 오를 것이고 허텐을 지나갈 때 무메를 찾아보 기로 마음먹었다. 을지마사는 무메에게 청혼을 했다는 오식닉국( 왕자 에 대해 슬그머니 물어 보았다 "오식닉국이라는 나라가 그처럼 크고, 힘이 센 나라입니까? "아닙니다. 나라가 크다는 것보다는 그들은-까마득히 높은 산 꼭대기에서 살지요, 그래서 평지에서 사는 사람들이 당해 내지 를 못한답니 다." "왜 요?" ''그 사람들은 태어나서부터 그런 곳에 살아서 괜찮지만, 평지 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곳에 올라갔다 하면 숨이 차고 맥이 빠져 서 싸움은커녕 제몸 추스리기도 힘들지요. 그곳에 가면 설산 귀신들이 사람의 혼을 뺏어 간다고 모두들 겁을 낸답니다." 알칸은 또 설산은 매우 높아 공중을 나는 새들도 쉽사리 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을지마사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 흥미 진진했다. 을지마사와 대상들은 20일을 더 가서야 농우에 들어섰다. 대 상들과 헤어질 때 을지마사는 자숙 대인에게 안부를 전할까 생 각하다가 그만두어 버렸다. 외동딸 무메가 청혼을 받고, 거기다 가 중병까지 들었다는데 옛날 일을 끄집어내게 하는 건 차마 해 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농우에 도착한 을지마사는 고선지의 집을 찾아갔다. 안채에서 콜록콜록 기침 소리가 나더니 이어서 고사계 노인이 나타났다. 고사계 노인은 대뜸 을지마사를 알아보고는 주름살이 깊게 팬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젊어서 당나라 군대의 무관일을 했 던 고사계는 여전히 허우대가 장대했지만 80이 다 되어 가는 나 이는 숨길 수 없는지 을지마사를 붙잡은 손바닥이 버석거렸다. 고사계의 눈매가 무엇을 찾는지 연방 을지마사 주변을 두리번거 렸다. "혼자서 오느냐? 을지마사는 이내 고사계 노인이 손녀딸 여옥에 대해서 묻는다 는 것을 알았다. "저,,,,,, 예 ." 을지마사는 막상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을지마사가 고개를 떨 구자 영감도 뭔가 와닿는 감이 있었던지 형형하던 눈빛이 금세 흐려졌다. "음-알겠다. 차차 이 야기하도록 하자." "선지 형님은 계십니까?" "농우를 떠난 지 벌써 석 달이 되었다." "어디로 갔습니까? "군사들을 끌고 쿠차에 있는 안서도호부로 갔다. 네가 오거든 급히 찾아오라는 전갈을 두고 갔다." 고선지가 거느린 군사들은 모두 농우병마절도부 소속이었지 만 서역 정벌을 위해 안서도호부로 소속이 바꿔어 있었다. 안서 도호부는 고선지가 한때 유격장군, 진 수사로 근무했던 인연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을지마사는 고사계 영감으로부터 쿠차라는 말을 듣자 문득 실 망스러웠다. "쿠차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 맞다." 을지마사가 고사계 노인에게 다시 확인을 한 데는 이유가 있 었다. 장안에서 농우로 해서 옥문관을 지나면 실크로드는 타클 라마칸 사막을 가운데 두고 위아래 두 갈래 길로 나뉘어진다. 윗 길은 실크로드 북로, 아랫길은 실크로드 남로라고 불렀다. 을지 마사가 아소미네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대상들에게 구원이 되어 자숙 대인의 집에 얹혀 지냈던 허텐은 실크로드 남로에 위치해 있고, 지금 고선지 장군이 주둔해 있다는 쿠차라는 곳은 실크로 드 북로에 있어 애초부터 길이 달랐다, 을지마사는 맥이 풀렸다. 모처럼 허텐에 가서 은인 자숙 대인 을 찾아보려고 했던 것인데 일이 틀어지고 만 것이다. '무메와는 인연이 없는가 보구나. 살아 있으면 언젠가 한번은 만날 날이 있겠지,,,,,, 을지마사는 스스로 위로하며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을지마사는 고사계 노인에게 손녀딸 여옥과의 만남과 그간의 우여곡절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는 첫닭이 홰를 치며 울 때까지 계속되었다. 혈육을 모두 떠나보낸 고사계 노인은 손녀딸 여옥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노년의 외로움이 더하는지 연방 눈물을 닦아 냈다. 고사계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을지마사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맙다. 을지마사. 어쨌든 여옥이가 허망하게 삶을 버린 것 은 아니 었구나." 다음날 을지마사는 쿠차로 떠날 채비를 했다. 급히 오라는 고선지의 전언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농우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없었다. 오히려 고사계 노인이 자기를 보면서 상심하는 것이 거북살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고사계 노인이 며칠 푹 쉬면 서 여독이나 풀리면 떠나라고 완곡하게 붙잡는데도 을지마사는 서둘러 쿠차로 가는 길에 올랐다. 마침 농우절도부에서 쿠차로 가는 군량수송대가 있어서 을지마사는 그들 사이에 끼어서 출발 을 했다. 그런데 군량수송대장 참군 이서령은 속으로 고구려 출신인 을 지마사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고구려인들이 서역 정벌의 주역을 맡아 설치는 것이 눈꼴사나웠던 것이다. '먼 길에 군더더기 식구만 늘었구나.' 하지만 그는 직속상관인 고선지 장군의 위엄에 눌려 그런 말 을 함부로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농우를 출발한 을지마사에게는 또다시 사막을 지나가는 지루 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사막 속에는 오아시스가 있고, 그곳에는 사람과 짐승들이 마실 수 있는 맑은 물이 고여 있었다. 이 물은 설산에서 눈이 녹아 일단 지하로 스며들어 흐르다가, 다시 지상 으로 올라온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오아시스는 부지 런히 걸어서 하루가 걸리는 지점마다 한 군데씩 있어서 만약 도 중에 변고가 생겨 시간을 지체하면 당일로 오아시스에 닿을 수 가 없었다. 쿠차로 가는 군량수송대는 11일 동안 큰 탈 없이 앞으로 나아 갔다 그러나 12일째 되는 날 뜻밖의 사태를 만나 사막 한가운데 서 생사를 헤매게 되었다. 그날도 아침이 지나자 해가 중천에 떠 올라 사막을 지글지글 끓게 했다. 폭염 속에서 낙타도 사람도 더 위에 지쳐 버렸다. 더 이상의 행군이 무리였다 군량수송대가 잠시 모래산 그늘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마악 출발하려는데 전방에서 자욱한 먼지가 일었다 50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이쪽으로 몰아쳐 오고 있었다. "비적때다!" 군량수송단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듯 술렁거렸다 잠시 후 100여 명의 수송단 기병대가 창과 칼을 꼬나질고 달려드는 비적 떼들과 맞섰다. 당시 서역으로 통하는 광활한 사막 곳곳에는 수 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비적떼들이 대상들을 괴롭히고 있 었다. 비적떼는 대상들의 물건과 돈을 약탈했다 그들에게 특히 군량수송대는 호시탐탐 노리는 큰 먹잇감이었다. 낙타마다 많은 양의 곡식을 싣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없이 고요하기만 하던 사막이 일시에 싸움터로 변했다. 군 미를 뺏으려고 온 비 적떼와 호위대 사이에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곧이어 이곳 저곳에서 창칼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뒤섞였다. "아얏? "어쿠쿠쿠 " 을지마사가 비명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두목인 듯한 대춧 빛 얼굴의 비적 한 명이 호위병사들 사이를 종횡무진 내달렸다. 그의 말발굽이 이르는 곳마다 호위대 병사들이 장창에 찔려 낙 엽처럼 쓰러졌다. 을지마사는 칼을 잡은 손목에 힘을 주고 비적 두목에게 달려들었다 비적 두목도 갑자기 달려드는 을지마사를 보고 흠칫 자세를 바꾸더니 이내 장창을 내질러 왔다 동시에 을 지마사의 칼이 장창을 맞받았다 을지마사도 농우병마절도부에 있을 때 고선지로부터 전수받 은 무예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을지마사를 향해 내지른 장창이 비껴가자 비적 대장의 말이 옆으로 돌더니 재빨리 을지마사의 옆구리를 또 찔렀다. 쨍! 을지마사의 칼이 날쌔게 장창을 후려치고서 연달아 비적의 정 수리를 찔렀다. 비적이 잽싸게 고개를 숙여 피한 것과 거의 동시 였다. 이렇게 하기를 벌써 20여 차례 두 사람 중 누구 하나라도 겨냥을 잘못해서 헛손질을 하면 그 순간을 비집고 칼과 창 끝이 상대방의 몸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그것은 영원한 죽음을 의미 했다. 을지마사를 대적해서 싸우는 비적의 무예도 보통이 넘었 던 것이다. 쨍- 쨍쨍. 비적과 을지마사의 불꽃 튀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때쯤 군량수송대와 비적들은 싸울 생각은 않고, 손에 땀을 쥐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무렵 비적 두목은 속으로 '비적 생활 20년에 이렇게 강한 놈은 처음인걸' 하고는 슬며시 도망갈 궁리를 했다. 아니나다를까 두 사람은 몇 번인가 더 어우 러지더니 드디어 한 사람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쏜살같 이 앞만 보고 내달렸다 대춧빛 비적 대장이었다 "게 섰거라? 을지마사가 호통을 치며 급히 비적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을 지마사의 말타는 솜씨는 평생을 사막 속에서 말을 타고 비적질 을 해온 두목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비적은 자욱하게 먼지를 일 으키며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비적떼와 군량수송대가 어우러져 싸우는 틈을 타서 비적패들이 군량을 실은 여러 마리의 낙타를 몰고 사라진 다음이었다. 비적 두목은 군량을 탈취한 이상 무예 가 자기보다 한수 위인 을지마사를 상대해서 목숨까지 걸어 가 며 싸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군량수송대 책임자인 농우절도부 참군 이서령이 다가와' 을지마사를 얼싸안았다. "기적 같은 일이오. 을지 장군이 아니었더라면 떼죽음을 당할 뻔했구려 참군 이서령은 을지마사에게 진정으로 고마워했다. 싸움이 끝난 다음 수습을 해보니, 군량을 운반하는 낙타 500 여 마리 가운데서 36여 마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주변에는 죽어 넘어진 시체들이 널려 있고, 부상당한 수송대 병사와 비적들이 내지르는 신음소리가 폭풍이 쉽쓸고 지나간 뒤의 잔해처럼 애잔 하게 들려 왔다 그러나 군량수송대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일은 그 다음에 일 어났다 20여 명의 죽은 병사 이외에 부상당한 병사 30여 명을 사막의 허허벌판에다 버려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선 부 상병들을 응급치료하고는 낙타떼에 매달고 길을 가다 보니 행군 속도가 말이 아니었다. 벌써 3일을 갔는데도 다음 오아시스가 나타나지 않았다. 식수 가 떨어지고 갈증으로 목이 탔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이내 사막 이 후끈 달아오르고, 한낮으로는 대지 표면에서 아지랑이가 피 어오르면서 온 세상이 이글거렸다. 3일이 지나고 4일째가 되었다 낙타떼를 몰고 가는 수송대 병사들은 타는 갈증을 이기지 못 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 라 마치 제자리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꼴이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아시스다? 병사들 가운데서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모든 병사 들이 우르르 앞으로 달려나갔다. 을지마사가 눈을 들어 바라보 니 과연 멀지 않은 곳에 오아시스가 그림처럼 나타나 있었다. 맑 은 물이 고인 연못이 있고, 주위에는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야자나 무의 푸른 잎들이 너울거리고 있었다. '하, 이젠 살았구나.' 을지마사도 갑자기 생기가 돌아 마악 앞으로 달려가려는데 누 군가 을지마사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안 됩니다!" 등뒤에서 이서령이 악을 썼다. 을지마사도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안 되다니? "저것은, 저것은 허상이오." "허상? "허깨비 란 말이오." 말을 마치자마자 이서령은 말을 급히 몰아 앞으로 달려나갔 다. 이서령은 말을 달리면서 손에 든 긴 채찍으로 병사들의 등을 닥치는 대로 쳐서 쓰러뜨렸다. 이서령이 휘두르는 채찍을 맞은 병사들은 비실거리며 모래 위에 고꾸라져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서령이 숨을 헐떡이며 다시 돌아왔다 "저 허상을 한없이 따라가면 모두들 죽는단 말이오." 이서령이 말하는 허상이란 바로 신기루였다 이 신기루는 사 막 속에서 더위와 갈증에 지친 사람들에게 가끔씩 나타나는 집 단 최면현상이었다. 일생을 군량을 운반하며 사막 속에서 만고 풍상을 격근 참군 이서령은 역시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의 지친 얼굴에도 비장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을지 장군, 이제 우리의 행군은 끝났소." "사막 위에 앉아서 운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소," 군량수송대는 곧이어 모래산 기슭에 천막을 치고, 탈진해 있 는 병사들을 끌어다가 천막 안에 수용했다. 을지마사는 아마도 이것이 군량수송대의 마지막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 양 수송대는 인적이 없는 사막 한가운데서 모두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때 다시 참군 이서령의 목소 리가 들려 왔다. "이제 마지막 결심을 해야 할 시점에 왔소," 그럼 또 무엇이 더 남아 있단 말인가. 을지마사는 꼼짝 않고 이서령의 얼굴을 응시했다 "낙타를 죽입시다." 참군 이서령이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평생을 사 막에서 사는 낙타는 등 위에 있는 혹 속에 물주머니를 따로 가지 고 있어 물이 없어도 40일을 견딜 수가 있었다. 참군 이서령은 낙타를 죽여 낙타가 그 동안 사용하고 남은 물을 빼앗아 갈증을 면하자는 것이었다. 즉 낙타의 생명과 사람의 생명을 맞바꾸자 는 것이다 그러나 낙타는 군량미를 실어 나르는 유일한 운송 수단. 만약 낙타가 없으면 군량 수송이 불가능해지고, 이렇게 되면 참군 이 서령은 군법에 따라 목숨을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참군 이서령 의 처지로 보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막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자기는 책임자로서 군법에 회부되어 사형을 당 할 터지만 덕분에 죄없는 졸병들은 목숨을 건질 것이다. "낙타를 죽여 목숨을 연명합시다." 참군 이서령은 결심을 다지듯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날 저녁 10마리의 낙타가 떼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낙타 물 주머니에 남아 있는 물이 얼마 되지 않아 100여 명이 넘는 산 목 숨들이 겨우 타서 갈라진 입술을 축일 정도였다. 병사들은 갈증 이 계속되자 진노랑색으로 찔찔거리며 나오는 다른 병사의 오줌 을 받아 먹기도 했다. 곧이어 해가 모래산 능선 아래로 떨어졌다. 사막의 밤은, 낮 시간 내 이글거리며 끓던 모래가 식으면서 금 세 냉기가 뼛속을 파고들었다. 푸른기가 도는 조각달이 모래산 능선에 걸려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이렇게 또 이 틀이 지나갔다 낙타 20여 마리가 더 죽어 갔다. 그러나 수송대의 운명이 질겼던가. 아니면 을지마사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던가. 그 다음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날 정오때쯤 사막 저쪽 아지랑이 속에서 가물거리는 무언가 가 보였다 참군 이서령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연기를 피 워 올리도록 명령을 했다. 한참이 지난 연후에야 저쪽에서도 이 쪽의 존재를 알아챘는지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때는 몇 달 동안 사람이라곤 그림자 하나 얼씬거리지 않 는 사막 속에 한떼의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중국에서 서역으로 가는 대상들이었다. 죽어 가던 군량수송대는 대상들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다음 오아시스로 갈 수가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서 비적떼와 싸우고 갈증으로 죽기 직전에 기사 회생한 군량수송대는 열흘을 더 가서 목적지 쿠차에 당도했다. 사람과 동물들이 모두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고선지는 병영 안 에서 집무를 보고 있다가 군량수송대를 보고는 뛰어나왔다. 뒤 이어 그는 흡사 거지꼴을 하고 서 있는 을지마사의 모습을 발견 했다. "어 , 을지마사? "형님 , 아니 고선지 장군님 ." 을지마사와 고선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해후는 남들이 보면 이상하리만큼 정답 고 극적인 데가 있었다. 그날 밤 군량수송대를 위한 주안상이 베풀어지고, 참군 이서 령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고선지 장군은 다시 한 번 을지마 사를 쳐다보았다. "역시 을지 아우는 대단해 ." "월요. 모두들 잘 싸운 덕분이지요," 을지마사는 고선지에게 인정받는 것이 속으로 즐거웠지만 참 군 이서령의 입장을 생각해서 겉으로 대단치 않은 듯 얼른 얼버 무렸다. 고선지는 쿠차 병영에서 지난 4개월 동안 서역 원정군 1만 명 을 훈련시키는 데에 전념하고 있었다. 원정군의 편대도 벌써 짜 여 있었다. 행영절도사(총사령관) 부행영절도사 중군대장 후군대장 참군대장 고선지 조숭빈 가숭관 이사업 단수실 군사 감군 봉상청 변영성 원정군의 주요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고선지를 빼-고는 모두 중국인들이었다. 그 가운데서 군사 봉상청은 좀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 는 체구도 왜소한데다가, 애꾸눈이었으며 , 절름발이였다. 또 외 고집이어서 남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학식이 높고 지략이 뛰어나 고선지 장군이 늘 곁에 두고 자문을 받곤 했다. 또 감군 변영성은 조정에서 황제의 명을 받고 나와 원정 군을 감독하고 황제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은 자였다. 그러나 감군 변영성은 시기와 욕심이 많은 인물로 처음부터 끝까지 고 선지와는 악연이었다 훗날 그는 안녹산의 난 때 고선지와 다시 만나 고선지를 파멸의 구렁 속으로 빠뜨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고선지는 그때까지 선두에서 싸움을 맡아줄 유격대장을 구하 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던 참이었다 유격대장의 직책은 원정군 에게 가장 막중한 소임이었다. 싸움은 대개 먼저 기선을 잡는 쪽 에서 이기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이 유격대장이 원정군의 맨 선 두에서 혈로를 뚫고, 또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목숨을 걸고 돌 파해야 하는 특공대장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 격대장은 싸움에 능하고, 용감하고, 또 사령관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했다. 고선지 장군이 그토록 을지마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이유 중의 하나는 유격대장으로서 그의 자질을 아꼈던 데 있었다. "을지마사, 내일부터 네가 유격대장을 맡아라." "제가 과연 그런 중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을지마사는 내심 겁이 났지만 고선지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라 도 자신이 맡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유격대장 직책을 수 락했다. 다음날 아침 을지마사는 고선지를 따라 훈련장으로 갔다. 1만 명의 군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훈련하는 모습이 대견스러웠 다. 을지마사가 가만히 살펴보니 훈련하는 모양이 별스러웠다. 군사들은 바위벽 타기, 높은 곳에서 굴러 떨어지기, 줄에 매달려 절벽 건너기 등 유격훈련을 받고 있었다 유격훈련은 군사 봉상 청이 계획한 것이라고 했다. 봉상청은 역시 남다른 데가 있었다. 을지마사는 군사들 대부분이 농우에서 온 고구려 유민들의 자 식이라는 것을 알고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다 그들과 함께 원정 길에 오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했다. '저들과 함께 잃어버린 조국 고구려를 찾기 위해 싸우러 간다 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을지마사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고개를 흔들며 얼 른 지워 버렸다. "고선지 장군님, 원정 지역이 어디입니까? "조정에서 지시가 내릴 때까지는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네 ." "그래도 마음속으로 짚이는 데가 있을 것 아닙니까? 고선지 장군은 손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만년설을 인 텐산 산맥의 장엄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었다. "아마도 저곳이겠지, . " 을지마사는 기가 막혔다. 도대체 하늘과 맞닿아 있는 저 높은 산 속에 누가 산단 말인가? 그때 고선지의 다음 설명이 이어졌다. "지금 서쪽에서는 사라센이라는 나라가 힘이 강대해져서 동 쪽으로 세력을 뻗쳐 오고 있지 그런데 변경에 있는 토번 이 사라센과 힘을 합쳐 당나라에 대적할 낌새를 보이고 있거 든 "그렇게 되면? -모처럼 서돌궐에게 빼앗은 실크로드가 그들에게 포위당하는 날이면 당나라의 교역길은 끝장나는 걸세. 사라센과 토번이 손 을 못 잡게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오식닉국과 소발률국 을 정벌해서 교통로를 차단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지 ." 당나라는 서돌궐로부터 실크로드가 통하는 서쪽 변방 일대 타 림분지 (신장 위구르)를 장악했다. 그러나 뒤이어 일어난 강국 토 번과 또다시 대결을 해야 했다. -파미르 고원에 있다는 오식닉국과 힌두쿠시 산 속에 있다는 소발률국 말씀입니까? 을지마사는 농우까지 함께 왔던 대상 알칸의 말이 떠을라서 물었다. "그렇다네. 그런데 자네가 어떻게 오식닉국이며, 소발률국, 힌두쿠시를 아는가? 을지마사에게서 뜻밖의 말이 나오자 고선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을지마사는 고선지가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자기의 의견을 말해 나갔다. "그렇다면 ..,,,.' "여기서 이런 훈련 가지고는 안 되겠습니다 " "무어라고? 고선지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곳은 공중을 나는 새들도 넘지 못할 만큼 높은 설산입니 다 지금부터라도 병사들을 높은 곳으로 이동시켜서 그곳에서 몇 달 동안 뛰어놀게도 하고, 사냥도 하도록 놓아 두십시오." "그것도 훈련이란 말인가? ''그렇지요. 오식닉국과 소발률국을 정벌하는 데 반드시 필요 한 고지대 적응훈련입니다. 낮은 지대에서 제아무리 싸움을 잘 한다고 해도 막상 높은 지대에 가면 백전백패입니다." 고선지는 을지마사의 의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군사작전회의에 의견을 내놓았더니 모두들 펄쩍 뛰었다. 특히 중군 가숭관과 감군 변영성은 병사들을 산꼭대기에다 올려 놓고 다람쥐처럼 이산 저산 돌아다니게 하며 사냥질을 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절름발이 군사 봉상청의 의견은 달랐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을지 대장이 아니었더 라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을지 대장의 계획대로 하시되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고선지도 결심을 굳히고 다음날로 병사들을 이동시켰다. 병사들이 산꼭대기로 이동하고 나서야 을지마사가 걱정했던 사실이 현실로 드러났다 병사들은 조금만 움직여도 숨을 헐떡 거리며 두통을 호소했다. 일시에 해발 3천 미터나 올라왔으니 기압이 낮고 산소가 희박해져서 인체에 이상이 왔던 것이다. 이 상태로는 전쟁은커녕 제 한몸 건사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열 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병사들은 차츰 면역이 되어 가는지 몸놀림이 가뿐해졌다. 그리고 두어 달쯤 지나서는 이산 저산으 로 뛰어다니면서 사냥을 하기도 했다. , 드디어 조정으로부터 출정 명령이 떨어졌다. 때는 3월. 원정군 기마병 1만 명은 아직 겨울인 북극의 흩날리 는 눈보라를 맞으면서 쿠차를 출발했다. 동양이.서쪽 멀리 있는 서양을 정벌하러 가는 역사적인 거보를 내디딘 것이다, 원정군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텐산 산맥 사이로 40여 일을 행 군해 간 다음 당나라의 가장 서쪽 변경인 수러도독부에 도착했 다 수러도독부에서 군마를 잠시 쉬게 한 다음 다시 출발한 고선 지 장군의 원정군은 20여 일을 파미르 고원 남서쪽으로 진군해 가서 당나라 마지막 전초기지인 타사쿠르칸에 들어섰다. 고선지 의 서역 원정군이 기병이었는데도 쿠차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두 달 가까이 걸린 것은 이곳의 지형이 그만큼 험해서 군마들이 제대로 달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병력은 1만이었 지만 말은 3만 마리나 되었다. 산악전에서는 군량 보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병사 한 명에 군수물자를 실은 말 두 마리가 별도 로 따라갔다. 파미르 고원에 들어서부터는 넘어도 넘어도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가파른 고개뿐이었다. "고선지 장군님, 이런 데서 과연 싸움이 될까요? 을지마사는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선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냐. 우리의 앞길에는 오직 승리만이 있을 뿐이다." 누구를 위한 싸움이고, 승리인가. 그러나 고선지와 을지마사 의 가슴속에는 원대한 꿈과 희망이 있었다. 고선지가 다시 을지 마사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우리의 고구려 병사들을 보아라. 어 느땐가 우리들은 꼭 우리의 조국을 찾게 된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금 힘이 들더라도 참아야만 한다." 을지마사는 고선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나라 서 역원정군은 대장급 몇 명만 중국 사람들이었지 병사의 대부분은 농우에서 온 고구려 젊은이들이었다. 실질적으로는 고구려군단 인 셈이었다. 아직은 당나라 밑에서 싸우는 처지였지만 막강한 고구려군단이 있는 이상 희망의 싹이 있었다. 고선지의 서역 원정군은 다시 20일 동안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파미르 고원을 기어올랐다. 벼랑 밑 계곡 사이로 뚫린 길 이라 사람 하나가 겨우 비집고 다닐 만큼 비좁은 소로였다. 이런 길을 타고 급경사를 올랐다. 사람도 지치고 말도 지쳤다. 그래서 온종일 전진해도 하루에 30리 가기도 힘들었다. 도중에 바윗돌 이 떨어져 내리기도 하고, 사람과 말이 까마득한 절벽 밑으로 굴 러 떨어져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그래도 원정군은 죽기를 각오 하고 파미르 고원의 정상으로 기어올랐다. 정상에 가까이 다가 갈수록 나무들이 안짱다리를 하고 있더니 드디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곰삭은 바위산이 만년설을 뒤집어쓰고 나타났다. 무심한 흰구름만이 발 밑에 떠서 흘러갔다 파미르 고원 정상에 오른 원정군을 괴롭히는 것은 추위와 시 시때도 없이 불어오는 강풍이었다. 칼로 살을 에는 것 같은 강풍 은 가뜩이나 지친 병사들의 옷섭을 파고들어 병사들의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 원정군은 악전고투를 하며 파미르 고원 정상에서 서쪽을 향해 다시 20여 일을 내려가서 드디어 사람 사는 곳에 들어섰다. 바로 오식닉국에 도달한 것이다. 2천여 호가 산골짜기 이곳 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그런 조그만 나라였다. 애초에 오식닉국은 당나라의 조공국이었다 그러나 7세기에 들어와 토번의 영웅 송찬강보가 티베트를 통일하고, 주변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군사력이 당나라보다 강해지자 오 식닉국은 토번에 붙어 버렸다. 오식닉국 왕은 당나라 원정군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받고는 군사를 정렬했다. 오식닉국 군사는 약 2천 명가량 되었다. "당장에 밀어붙여 서전을 장식합시다." 오식닉국 전세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보고는 붉은 얼굴에 수 염이 긴 중군 가숭관 장군이 고리눈을 부릅뜨며 무장다운 제안 을 했다. "제가 가서 짓밟아 버 리겠습니다." 유격대장 을지마사도 가숭관 장군에게 질세라 고선지 장군 앞 으로 나왔다. 그러나 애꾸눈 군사 봉상청의 생각은 달랐다. "원정 목표지 소발률국에 이르기도 전에 초전에 군사를 잃으 면 아니 됩니다. 차라리 유인계를 써서 일거에 내려치도록 하지 요 고선지는 군사 봉상청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유인작전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에 덤빌 듯한 기 세를 보이던 오식닉국 군사들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지 절벽을 의지해서 만든 견고한 성안으로 들어가서 꼼짝도 안 했 다. 원정군이 매일같이 성 아래로 몰려가서 소리를 지르고 싸움 을 돋우건만 성 위에서 바윗돌과 화살이 무수하게 날아와 더 이 상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시에 성을 짓치자니 이쪽의 사상자도 적지 않게 날 것이 분명했다 오식닉국 성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국왕 술탄은 아들 다 섯을 두고 있었다. 무메에게 청혼을 했다는 핫산 왕자는 술탄왕 의 큰아들. 그는 결전을 주장했다. "당군은 산악전에 서투르니 단번에 요절을 내버릴 수가 있습 니다. 성문을 열고 나가서 싸워 모조리 죽여 버립시다." 그러나 그만큼 연륜이 많은 술탄왕은 신중했다. "우리가 성만 굳게 지키고 있으면 저들은 저절로 물러간다. 그때까지 기다리자." 성이 쉽게 함락될 기미가 없자 고선지의 원정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곤궁에 빠졌다 "어떡한다? 고선지가 궁리를 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봉상청이 다시 계교 를 내놓았다. 군사 봉상청의 설명을 듣고 난 고선지 장군은 무릎 을 쳤다. "옳지 . 그거 라면,,,,,, " 다음날 고선지군은 갑자기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한 통의 편지가 오식닉국 술탄왕에게 보내졌다. 술탄왕 당나라 군대가 출병을 한 것은 오로지 근년에 와서 조공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었소. 내 휘하의 1만 대병이 일시에 공격 을 하면 성을 깨치는 것은 쉬운 일이나 왕과 옛정을 생각해서 이만 물러가오. 어서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하시오. 항복을 하지 않으면 훗날 후회가 남으리다. 귀국길에 말 5천 마리를 그대에게 주고 가니 깊이 생각해 보 기를 바라오 행영절도사 고선지 편지를 읽어본 술탄왕은 희색이 만면해서 핫산 왕자를 건너다 보았다. "그것 봐라. 저들이 결국 못 견디고 도망을 가는구나." 핫산 왕자는 다시 아버지 술탄왕에게 간청을 했다. "아버지, 바로 이때입니다. 제가 나가서 고선지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매사에 조심스러운 술탄왕은 핫산 왕자를 말렸다. "안 된다. 절대로 성문을 열고 나가서는 안 된다." 다음날 원정군은 성문 앞에 말 5천 마리를 매어 두고 후퇴하 는 척했다. 그리고 몇 명의 정탐병을 숨겨 두고 성 주변의 동정 을 살피도록 했다. 오식닉국 군사들은 혹시나 계교가 아닌가 하여 한동안은 꼼짝 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정군이 철수한 것이 확실해지자 성문 을 열고 나와서 말 몇 마리를 끌어 갔다. 매사에 조심스런 술탄 왕도 욕심은 보통 사람들과 같았다. 술탄왕은 성문 앞에 가득 매 어 놓은 서역의 준마에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말 몇 마리를 끌 어와도 별 이상이 없자 술탄왕은 군사들을 시켜 말을 모두 성안 으로 끌어들이도록 했다. 갑자기 비좁은 성안이 말 5천 마리로 가득 찼다. 술탄왕은 눈앞의 말들을 보며 기뻐서 큰 입이 귀밑까 지 찢어질 지경이었다. '나도 이젠 큰 부자로구나.' 그러나 술탄왕이 기뻐한 것도 잠간, 가만 보니 성채 건너 산꼭 대기에서 검은 연기가 한가닥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어허, 저게 월까? 술탄왕은 그제서야 덜컥 의심이 났다 때를 같이하여 불시에 몰려든 병사들이 삽시간에 성을 포위해 버렸다. 연기 신호를 보고 되돌아온 고선지의 원정군이었다 성 을 포위한 원정군은 기름뭉치에 불을 붙인 화살을 성안으로 비 오듯이 쏘아 댔다. 난데없이 불덩이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자 놀란 말들이 이리저리 날뛰며 울부짖었다 힝힝히힝 히잉 히잉. 불을 무서워하는 것은 동물의 본능이었다 5천 마리의 말들이 비좁은 성안을 휘젓고 다니면서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자 아 무도 말들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성안은 금방 난장판으로 변해 버렸다 그 틈을 타서 원정군은 갈고리와 사다리를 걸치고 성을 타넘었다. 이렇게 해서 오식닉국은 순식간에 원정군에게 점령되 어 버렸다. 곧이어 키가 8척에다 몸집이 비대한 오식닉국 술탄왕이 왕자 핫산과 함께 포박당한 채 고선지 앞으로 끌려 나왔다. 고선지는 포박을 풀어 주도록 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추상같았다. "그대는 왜 당나라를 배반하고 토번에 붙었는가?" "토번이 시켜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목숨만 살려 주 시면 앞으로는 맹세코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부행영절도사 조숭빈 장군과 감군 변영성은 후환을 없애려면 술탄왕과 그의 아들 5형제를 모조리 죽여 버리자고 했지만 고선 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키지도 못할 변방에서 인심 을 잃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들을 마음속으로 복종시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옛정을 생각해서 특별히 너희들의 죄를 묻지 않고 살려 주겠 다. 다시는 배반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술탄왕과 다섯 왕자들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죽었던 목숨이 살아 돌아온 것을 천행으로 생각했다. 원정군의 다음 목표는 서역 정벌의 최대 전략 요충지 연운보. 연운보는 오식닉국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20여 일이 걸리는 거리였다. 동쪽의 토번과 서쪽의 사라센으로 통하는 모든 소로 들이 이곳에서 만났다가 다시 갈렸다. 따라서 연운보를 거치지 않고는 동서로 통할 수가 없으므로 이 연운보 점령 여부가 원정 군의 승패를 좌우했다. 오식닉국을 떠난 원정군은 3대로 나누었다. 제1대는 고선지 장군이 직접 지휘하여 호밀국을 거치기로 하고, 제2대는 조숭빈 장군이 지휘하여 북쪽의 절벽으로 난 북곡로, 그리고 제3대는 가숭관 장군의 지휘로 파득강 서쪽에 있는 적불당으로 진격을 해서 연운보에서 다시 만나 총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원정군 3부대가 20일 동안 악전고투를 해가며 주변에 있는 작 은 나라들을 모두 굴복시키고 연운보 근처에서 만나 보니 연운 보의 현지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워 보였다. 연운보는 토번의 생명길이나 다름없는 요새여서 1천여 명의 토번군들이 성채를 높게 쌓고 밤낮으로 지키고 있었다, 또 성채 로부터 25여 리 떨어진 지점에는 견고한 성을 쌓고 토번군 3천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정작 문제는 토번군들이 아니었다. 연운보를 공격하려고 해도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강물 때문에 전진할 수가 없었다. 강폭은 그 리 넓지 않았다. 그러나 때마침 우기가 되어 골짜기의 물들이 급 경사를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도무지 강을 건널 계책이 없었다. 고선지의 절망에 찬 탄식이 새어 나왔다. '나의 원대한 꿈이 여기서 꺾이는구나? 고선지는 착잡한 얼굴로 군사 봉상청을 바라보았다. 봉상청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지 어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고 장군님, 저 강물을 건너 전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단 돌아가서 우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겠습니다." 고선지의 측근인 이사업과 단수실 장군도 군사 봉상청과 같은 의견이었다. 그러나 총사령관 고선지의 입장에서 보면 지난 석 달 동안 죽을 고생을 해가며 텐산 산맥을 넘고 파미르 고원을 지 나 연운보에까지 왔는데 이곳에서 아무런 소득 없이 발길을 돌 린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고선지는 침통한 얼굴로 소 용돌이를 치며 넘쳐 흐르는 강물을 바라다보았다. 그때 고선지의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있었다. "고 장군님 !" 을지마사였다. 고선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을지마사를 건너 다보았다. "제가 건너 겠습니다." "네가 강을 건너-다구?" "그렇습니 다." 을지마사의 얼굴에는 결연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고 선지는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용솟음치며 흐르는 강물을 건 넌다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지만, 용케 강물을 건넌다 해도 강 건 너에서 기다리고 있는 토번군이 일시에 공격을 하면 전멸당할 것은 불을 보듯 확실했다. 강 건너 100여 보 떨어져 있는 성채에 서는 토번군들이 고개를 내밀고 강물에 막혀 옴짝달싹 못 하는 원정군을 비웃듯이 바라다보고 있었다 다시 을지마사가 외쳤다. "고 장군님 ! 강을 건너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고선지는 마음이 흔들렸다 친아우처럼 생각하는 을지마사를 자기 눈앞에서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안 되겠다 돌아가기로 하자 " "아닙니다. 제가 꼭 건너 보이겠습니다." 이번 서역 원정을 책임지고 있는 총사령관으로서 고선지의 고 민을 짐작하고 있는 터라 을지마사는 목숨을 바칠 결심이 서 있 었다 "생명 이 위험하다." "고 장군님을 따라 나선 이상 목숨은 하늘에 맡기고 있습니 다" 고선지의 콧날이 시큰해졌다. 을지마사의 결심을 더 이상 꺾 을 수 없음을 안 그는 마침내 허락을 내렸다. "그래 , 강물을 건너라. 무운을 빈다 " 다음날, 그러니까 747년 7월 13일 오전 8시. 하늘로 치솟은 파미르 고원의 영봉마다 아침 안개가 골짜기 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짙은 안개가 산중턱을 휘감아 지상 세계가 완전히 묻히고, 산봉우리들만 공중에 떠 있는 듯했다 그 신비한 선경 속에서 한 무리의 인간들이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고선지와 휘하 장수들은 먼저 물신심정)에게 제사를 올렸다 제사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산을 울리는 쩌렁한 목소리가 아침 공기를 찢었다. "돌격 ! 나를 따르라." 이어서 을지마사의 말이 거센 물살이 소용돌이치는 강물로 뛰 어들었다. 결사대 30명이 을지마사의 뒤를 따랐다. 강물은 금방 말의 뱃구리까지 차올랐다 말들이 강물에 쉽쓸리지 않으려고 발버둥대며 비틀거렸다 '과연 저 강물을 건널 수 있을까? 이쪽 언덕에서는 총사령관 고선지 이하 1만 명의 군사들이 손 에 땀을 쥐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강 건너 토번군의 성채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원정군이 강을 건너는데도 긴장 을 하기는커녕 마치 서커스 구경을 하듯 손가락질을 해가며 히 히덕거리고 있었다. 성채를 지키고 있는 토번군들은 신기한 구 경거리라도 만난 듯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토번군 대장 살살수리는 처음부터 원정군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걱정 이 된 부장들이 살살수리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나 원정군이 강을 건너면 어떡하지요? "강을 건널 수가 없다 " "그래도요? "염려할 것 없다 그렇다면 많이 건널수록 좋다." "옛? "평지에서 살아온 저놈들은 이렇게 높은 데서는 숨이 차서 싸 우지도 못한다 더 많이 강을 건너게 해서 단숨에 전멸시켜 버리 자." 부장들은 대장의 말을 듣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도 만약에,,,,,,." "하하하 너희들은 송찬강보 대왕이 우리 땅을 침략해 온 당 군을 전멸시켜 황금과 비단을 산더미처럼 뺏어 오고, 당태종의 딸을 첩으로 삼았다는 사실도 못 들었느냐?" 살살수리는 가소롭다는 듯 부장들의 말을 물리쳤다. 그사이에도 을지마사와 30명의 특공대는 거친 물살을 헤치며 결사적으로 강을 건너고 있었다 "앗? 그때 원정군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강을 건너던 특공대 2명이 급류에 휘말려 말과 함께 떠내려갔다. 급류 속에 서 고꾸라진 사람과 말이 몇 번씩이나 곤두박질을 치며 떠내려 가다가 시야에서 이내 사라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또 환호성이 터졌다. "만세 ? 특공대의 맨 선두에서 강을 건넌 을지마사가 드디어 건너편 언덕에 올라선 것이다. 고선지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하는 빛이 떠올랐다. '을지마사가 기어코 해냈구나.' 아무튼 그날 낮 10시까지 원정군 천여 명이 토번군의 저항 없 이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강을 건넌 천여 명의 원정군은 잠 시 대오를 정비한 다음 곧장 성책으로 달려들었다 원정군을 만 만 만히 여긴 토번군은 단숨에 숨통을 끊어 놓으려고 뛰어나왔다. 그러나 토번군 대장 살살수리는 크게 놀랐다. 을지마사의 제안 에 따라 석 달 동안 고지 적응 훈련을 거친 원정군은 살살수리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은 것이다 원정군이 지치기는커녕,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온 사나운 여세를 몰아 토번군의 성채를 여지없 이 짓밟아 버렸다. 그사이 강을 건너온 원정군의 숫자도 5천 명이 넘었다. "가자 쳐부수자? 기세가 오른 원정군은 산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함성을 지르 며 토번군 성으로 쳐들어갔다. 성안에 있던 9천 명의 토번군은 성책이 무너졌다는 비보를 듣고 벌써 기가 꺾여 있었다. 그들은 몇 년째 산꼭대기에서 놀고 먹는 일에 젖어 있었던 탓에 사납게 달려드는 원정군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날 해질 무렵 싸움 은 원정군의 대승리로 끝났다. 원정군은 토번군 5천 명을 죽이고 1천 명을 사로잡았다. 또 1 천여 마리의 말과 그 밖에 무수한 무기와 보화를 노획하는 전과 를 올렸다 원정군의 연운보 점령은 오로지 결사적으로 급류를 건넌 을지 마사의 용기와 기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동 서고금을 통해 그 짝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군사 통솔력과 작전 에 뛰어난 명장 고선지가 아니면, 그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었다 " 연운보를 점령한 고선지는 신속히 다음 작전을 계획했다. 목표는 파미르 고원을 지나 힌두쿠시 산맥 속에 있는 소발률 국. 고선지는 소발률국을 정벌해야만이 토번과 사라센의 동맹 관계를 완전히 끊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선지의 작전 구상을 들은 참모들은 안색이 싹 변했다. 담대한 성격의 조 숭빈 장군마저도 고선지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고, 고 장군님, 그 계획은 거두어 주십시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고선지의 결심은 확고부동했다. 고선지가 장수들을 돌 아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겁먹은 자는 돌아가시오! 저 힌두쿠시를 점령하지 못하면 내 배를 이곳에 묻겠소." 휘하의 대장들이 고선지의 위엄에 눌려 입을 열지 못하고 있 는데 조정에서 파견되어 나온 감군 변영성이 모든 사람을 대표 해서 간언을 했다. "절도사, 소발률국 원정은 불가능한 일이오. 연운보를 점 령한 것만으로도 고금에 없던 빛나는 전공입니다. 그만 돌아가는 것 이 좋을 것 같소. 험하기로 소문난 다르코트령을 넘다가 군사들 이 떼죽음이라도 당하면 그때는 모든 것이 끝장이오." 다르코트령은 인도, 중국, 아프카니스탄, 타지키스탄 4개국이 접경해 있는 곳이었다. 해발 4700미터나 되어 인간의 접근을 불 허할 만큼 높은 고개에는 만년설로 덮여 있었다. 뒤이어 술사 한이영이 감군 변영성의 말을 거들고 나섰 다. 술사라면 원정군을 따라다니며 사령관에게 천문, 일기 , 길흥 등을 예언해 주는 역할을 하는 직책. 전쟁 복술가인 셈이다. "장군님, 다르코트령에는 큰 용이 산다고 합니다. 그 용의 독 기를 쐬는 날이면 제아무리 장사라도 살아 남지 못합니다. 이제 원정군은 목표를 달성하고 승전을 했으니 개선하는 것이 마땅할 줄 압니다." 그러나 평소 불가능은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온 고선지는 휘하 참모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고선지가 결사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뜻을 굽히지 않자 그날 밤 을지마사가 고선지를 찾아 갔다. "고 장군님, 장수들의 말을 듣고 보니 소발률국 원정은 아무 래도 무리인 듯싶습니다." "을지마사? 고선지의 두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 너와 나는 고구려 사람이다 우리의 앞날에는 이보다 더 험 난한 역경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번 원정길에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꼭 있을까요? "있고말고. 나의 다음 목표는 산 속에 있는 소발률국이 아니 다. 그 너머에 있는 중앙아시아의 넓은 평원이다. 내 말을 알아 듣겠느냐? 고선지의 가슴속에는 중앙아시아의 대평원에다가 잃어버린 고구려를 건설하겠다는 야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이번 원정길에 그곳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 , 알겠습니다." 을지마사는 더 이상 대답할 말이 없었다. 원정군 고구려군단 7천 명은 연운보에서 며칠 휴식을 취한 다 음 소발률국을 향해 진군했다. 연운보에는 군사 3천 명과 말 그 리고 지레 겁을 먹은 가숭관과 조숭빈 장군, 감군 변영성, 술사 한이영 등을 남겨 놓았다. 원정군이 힌두쿠시 산맥의 다르코트령 가까이 이르자 지금까 지와는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과 맞닿은 바위산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날씨가 변덕 을 부려 금방 하늘이 어두워지고 강풍이 귀신소리를 내며 불고 눈발이 흩날렸다 제법 따스한 낮기온과는 달리 해가 지면 얼음 이 얼 정도였다. 병사들은 숨이 차고 두통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을지 마사, 이사업 , 단수실 등이 병사들을 독려해 가며 행군을 계속했 다 원정군은 어느덧 다르코트령 정상 바로 못 미처 매어 있는 구름다리에 이르렀다. 다행스럽게도 소발률국에서는 그때까지 도 원정군의 접근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다리가 온전했다. 구름 다리는 양쪽 수직 절벽 사이를 몇 가닥의 동아줄로 연결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병사들은 밧줄을 붙들고 천길 낭떠러지 위를 아 슬아슬하게 매달려 건넜다. 원정군은 구름다리를 건넌 다음 다 르코트령의 정상에 올랐다. 원정군은 다시 예기치 않은 사태를 만났다. 악전고투를 해가 며 다르코트령 정상을 넘어서자 갑자기 수백 척에 이르는 절벽 허리를 돌아가는 가느다란 외길이 나타난 것이다. 길이라기보다 는 절벽 모서리에 얼어붙은 얼음 틈새를 딛고 가야만 했다. 한 발짝만 잘못 디거나 하면 미끄러져 아스라한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할 판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본 병사들은 겁에 질려 뒷걸음 질을 쳤다 "우리는 더 이상 못 가겠습니다." "저 길로 내려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겠습니다." 병사들이 가지 않겠다고 버티자 고선지도 달리 도리가 없었 다 난감해진 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군사 봉상청이 한 꾀를 생각해 냈다. "고 장군님 ,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두 사람은 목소리를 낮춰 한참을 소곤거렸다. "음, 알겠소." 군사 봉상청의 의견을 고선지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날 밤 야영을 하고. 다음날 고선지 장군은 전군에 명령을 내 렸다. "이제 우리는 회군한다." "와하!" 병사들의 입에서 일시에 살았다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고 나서 병사들이 오던 길을 되짚어 한 20리쯤 갔을 때였 다. 항상 원정군 앞에서 길을 인도하며 가던 을지마사의 유격대 가 되돌아와서 다급하게 소리를 질러 댔다. "고, 고 장군님 . 큰일났습니다 구름다리가 끊겼습니다." "뭣 ! 구름다리가? 고선지를 따르던 병사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구름다리가 끊겼다면 이제 돌아갈 수도 없다 구름다리를 다 시 만들자고 해도 족히 1년은 걸릴 터였다 그때 고선지가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이제 왔던 길로는 되돌아가지 못한다 이곳에서 주저앉아 죽 을 것이냐? 아니면 나를 따라가서 살 것이냐? 병사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으나 다른 선택이 없었다 다시 소발률국을 향해 가는 원정군은 악마의 길이라고 부르는 야신 계곡으로 들어섰다 야신 계곡은 줄타기 광대들도 건너기 어려을 만큼 험로였다 병사들은 눈앞이 아찔한 천길 낭떠러지 사이로 난 급경사의 빙판 길을 미끄러지면서, 몸에 밧줄을 매고 대롱대롱 매달려 내려갔다. 어쩌다 발을 잘못 디며 낭떠러지로 떨어진 병사는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수직 절벽 밑 아스라 한 곳에 인더스 강물이 반짝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병사 들이 겁에 질려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우리는 이자리에서 죽을망정 더는 못 가겠소 " "차라리 우리를 죽여 주시오." 그때였다. 야신 계곡 반대편에서 한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소발률국 병사들이었다. "앗? 병사들은 기겁을 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제 몸도 추스리지 못 하는 험난한 지형에서 적군과 맞닥뜨렸으니 이제 그들은 꼼짝없 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소발률국 병사들은 고선지 앞에 이르자 엎드려 절을 하며 큰 소리로 고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소발률국 소실리왕은 고선지 장군의 환영 사절로 저희 들을 보냈습니다. 산해진미를 잔뜩 차려 놓고 어서 입성하시기 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선지의 얼굴에 기쁜 빛이 역력했다. "그래? 고마운 일이로고." 이 광경을 지켜본 병사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 시 전진을 계속했다 알고 보면, 구름다리가 끊겼다고 헛소문을 낸 것이나 소실리왕의 영접 사절은 모두 전날 군사 봉상청이 꾸 며낸 각본이었다.)그 후로도 원정군은 10여 일을 가서야 소발 률국 수도 아노월성 가까이에 이르렀다. 그때쯤 이미 소발률국 소실리왕도 당나라 원정군이 성 가까이 에 와 있음을 알았다 소실리왕은 아노월성 못 미치는 곳에다가 군사를 매복해 두었다 그런 줄도 모르는 원정군은 아노월성을 향해 서서히 접근해 갔다 원정군의 선두에 선 을지마사의 유격대가 아노월성이 바라다 보이는 마지막 협곡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갑자기 천지가 진동 하는 굉음이 들렸다. 우르르릉. 동시에 산 위에서 커다란 바윗돌이 굴러 내렸다 그사이로 을 지마사의 다급한 외침소리가 들렸다. "앗! 모두 물러서라." 을지마사는 유격대에게 급히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을지마사가 500보쯤 물러나서 산 위를 살펴보니 천여 명의 소발률국 군사들 이 산꼭대기에다 진을 치고 계속 바윗돌을 굴리고 화살을 날리 고 있었다. 원정군은 물러설 수도, 전진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 다 유격장군 을지마사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날 밤, 한떼의 원정군이 살금살금 기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동시 에 을지마사의 유격조는 숨을 죽여 가며 산을 기어올랐다 산 정 상에 이르자 유격조는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소발률국 병사들을 덮쳤다. 안심하고 잠을 자던 소발률국 병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원정군의 공격에 놀라 산 아래로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압질러 가서 길목을 지키고 있던 원정군에게 모조리 죽임을 당하거나 생포되어 버렸다. 다음날 날이 밝자 원정군은 생포한 200여 명의 소발률국 병사 들을 앞세워 아노월성문 앞으로 갔다 그리고 포로들로 하여금 외치도록 했다 "항복해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포로들의 외치는 소리가 미처 끝나기 전, 뜻밖에도 성문이 활 짝 열리면서 한떼의 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왔다. 백마 위에 올라탄 아노월성 대장은 황금색 투구 위에다 산양의 뿔을 꽃아 모습부터가 괴상했다. 더욱이나 회색빛 얼굴이 더욱 검푸르러 해지며 왕방울처럼 툭 튀어나온 두 눈이 독기를 품어 내는 듯했다. 그가 바로 서역 천지에서 누구도 상대할 자가 업다 는 아노월성의 맹장 가가맹추. 가가맹추는 100근이 넘는 무쇠 삼지창을 꼬나들고 원정대를 향해 돌진해 왔다. 고선지도 불시에 나타난 가가맹추의 위세에 움찔했다. "누가 저자와 대적하겠는가? 고선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원정군에서 한 대장이 달려 나갔다. 참군대장으로 있는 단수실. 고선지는 일단 안심이 되었 다. 단수실의 무예 솜씨는 안서도호부 관내에서도 평판이 나 있 었다. 단수실은 청룡도를 휘두르며 가가맹추에게 무섭게 달려들 었다. 쨍! 단수실이 청룡도를 들어 내려치자 가가맹추의 삼지창이 어느 새 단수실의 청룡도를 맞받았다. 삼지창과 청룡도에서 번쩍 불 꽃이 튀었다. 이번에는 가가맹추의 삼지창이 단수실의 정수리를 찔렀다 단수실이 삼지창을 피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땅바 닥에 떼구르르 떨어져 구르는 것이 있었다. 동시에 원정군 병사 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앗?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단수실의 머리가 아니고 투구였다. 두 사람의 싸움은 그 후로도 20여 합 계속되었지만 아무래도 단수 실의 실력이 한수 처졌다 초전에 사기가 꺾이면 패전하기 쉽다. 고선지는 마음이 급했다. "을지마사, 네가 나가 싸워라 " 을지마사는 대답을 마치기가 무섭게 큰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나갔다 가가맹추는 단수실이 물러가고 을지마사가 새로이 나타나자 기고만장해서 버럭 고함을 질러 댔다. "에이, 버러지 같은 중국놈들! 모두 다 덤벼 봐라" 을지마사는 쏜살같이 접근해서 가가맹추의 산양뿔 위로 칼을 날렸다. 칼에서 바람 끊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가가맹추도 흠 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가가맹추는 삼지창을 다시 꼬나잡더니 을지마사의 가슴을 향해 힘껏 내질렀다 을지마사가 창끝을 살 짝 피하면서 삼지창을 후려쳤다 삼지창에서 무쇠소리가 나며 불꽃이 튀었다. 쨍그렁 . 가가맹추는 자기의 삼지창이 빗나가 역공을 당하자 화가 났는 지 멧돼지처럼 씩씩거렸다. 그는 다시 무거운 삼지창을 젓가락 놀리듯 휘저으며 을지마사에게 달려들었다. 가가맹추의 힘은 과 연 괴력에 가까웠다. 을지마사는 가가맹추가 팔랑개비처럼 빠른 속도로 휘둘러 대는 삼지창에 밀려 한 발짝씩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을지마사가 공격을 하려고 해도 가가맹추에게는 허점 이 안 보였다. 병사들은 가가맹추의 절묘한 무예에 넋을 잃고 있 었다. 그때쯤 을지마사는 절벽 근처까지 몰리고 있었다 몇 발짝 만 더 물러서면 이제 을지마사의 목숨은 끝이었다 "허, 이를 어쩐다? 고선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러다가 을지마사를 잃겠는 걸 " 고선지는 손에 땀을 쥐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천하제일의 장 사 가가맹추를 당해낼 장수가 없었다. 그사이에도 을지마사는 벼랑 끝에서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하 지 않고 용케도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가가맹추 의 괴력 앞에서 고전을 하는 을지마사의 목숨은 위태롭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가가맹추의 괴력에도 차츰 한계가 왔다. 시간이 흐르 자 삼지창을 휘젓는 속도도 전과 같지 못했다. 을지마사는 침착 하게 버티면서 끝까지 빈틈을 노렸다. ""1얍? 그때 벽력 같은 소리가 산을 울렸다. 가가맹추가 마지막 용력 을 써서 을지마사의 정수리를 향해 삼지창을 내지른 것이다. 지 켜보던 병사들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때 또 산을 뒤흔드는 소리가 있었다 "이 얍!" 병사들이 놀라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을지마사가 지른 소리였다. 을지마사가 몸을 납작 엎드려 삼지창을 피하며 가가맹추에게 달려든 것은 거의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뒤이어 한 사람이 말에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기세가 당당하던 가가맹추였다. "와 -." "와 -." 병사들마다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질러 댔다 또 한번 산이 울 렸다. 말에서 떨어진 가가맹추는 을지마사의 팔에 붙들려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을지마사가 달려들면서 가가맹추의 허리띠 를 낚아챘던 것이다. 때를 놓칠세라 고선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공격 ! 앞으로 공격 ? "와하 -." 가가맹추를 생포해서 사기가 오른 원정군은 곧바로 아노월성 으로 쳐들어갔다. 성벽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소실리 왕은 일이 틀린 줄 알고 성문을 굳게 잠가 버렸다 원정군이 성 으로 접근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돌과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소실리왕은 아노월성의 유일한 맹장 가가맹추가 어이없게 생 포당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소발률국에 는 여섯 명의 대신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복을 하자는 소실리왕 을 꽁꽁 묶어 가두어 버린 다음 끝까지 버텄다. 그래서 원정군이 매일같이 공격을 하는데도 양쪽 절벽을 이용해 교묘하게 틀어박 혀 있는 아노월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고선지 장군도 마음이 급했다. 원정군도 며칠만 더 시간을 끌 면 식량이 떨어져 병사들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 난 국을 헤쳐 나가려면 비상수단을 써야만 했다. "성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찾아라.'' 고선지 장군의 명령이 떨어졌다. 원정군은 그날부터 아노월성 주변을 수색한 끝에 마침내 성의 북쪽 골짜기로부터 교묘하게 위장되어 성안으로 흘러드는 물줄 기를 찾아냈다. 유격대가 동원되어 물줄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 려 버렸다. '이제 너희들은 독 안에 든 쥐새끼들이다. 물 안 먹고 며칠이 나 버티는가 보자 ' 원정군은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고선지는 침착하게 전후사정을 살펴 머리를 굴렸다. "저들은 앞으로 열흘은 더 버틸 것이다. 우리의 군량은 닷새 도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급한 일이 있다." 병사들은 고선지 장군의 입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고선지의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들 주변을 철저히 수색해라 " 원정군 2천 명은 다음날부터 아노월성 주변에 흩어져 열심히 수색하며 돌아다녔다. 아니나다를까 이튿날 오후 고선지가 염려 하던 것을 찾아냈다. 아노월성에서 10리쯤 떨어져서 토번으로 통하는 외길에 절벽이 있었고, 절벽과 절벽을 잇는 구름다리가 매어져 있었다. 더욱이나 등골이 오싹한 것은 수색을 나선 원정 군의 특공대가 그곳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 소발률국의 구원 요 청을 받은 토번군 2만 명이 막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위기일 발의 순간이었다. "끊을까요? 도끼를 치켜든 병사가 특공대장 석원경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니 . 조금만, 조금만,,,,,,." 구름다리가 미어지도록 건너오고 있는 토번군을 바라다보며 긴장의 순간이 흘렀다 저쪽에서 건너오는 토번군은 드디어 50 보, 40보,,,,,,10보까지 왔다 그때 석원경의 입에서 벽력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끊어랏? 병사가 도끼를 쳐들어 다리 난간을 힘껏 내리쳤다 동시에 '우지끈' 소리가 나며 구름다리 한쪽이 무너져 내리면 서 토번군 수백 명이 까마득한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만약 석원 경의 특공대가 한발짝만 늦었더라도 원정군 7천 명은 소발률국 에서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아찔했던 순간이었다 그러고 나서 또 이틀이 지나갔다 식량이 떨어져 가는 원정군도 이렇다 할 공격이 없었고, 물이 떨어진 아노뭘성도 쥐죽은 듯 조용했다. 싸움터에서 불안한 정 적이 이틀씩이나 계속되는 것은 다음의 큰 사건을 잉태하고 있 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니나다를까 그날 밤 아노월성의 뒤쪽 에서 갑자기 불이 일어났다. 한밤중에 잠에서 깬 아노월성 사람들은 경황없이 이리저리 뛰 어다니며 소리를 질러 댔다. "불이야! 불이야? 유격대장 을지마사와 병사 10명이 몸에 밧줄을 감고 야밤을 이용해 아노월성 뒤 절벽을 타고 성안에 들어가 불을 질렀던 것 이다. 동시에 성을 포위한 원정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원정군 의 공격에 못 견딘 아노월성에서 드디어 성문이 열렸다. 뒤이어 열린 성문을 통해 한떼의 사람들이 도망을 쳤다. 항복하자는 소실리왕을 묶어서 가둔 5명의 대신들과 그의 부 하들이었다. 5명의 대신들은 토번으로 통하는 외길의 구름다리 가 끊어진 줄도 모르고 그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그들은 절벽 끝에 당도해서 절망해야만 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원정군에 붙잡혀 다시 아노월성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아노월성을 함락 시킨 원정군은 소실리왕의 결박을 풀어 주고,5 명의 대신들은 백성들에게 내주었다. 고선지가 아노월성 백성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자들을 죽이든 살리든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곧이어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분노한 백성들이 평소에 노략 질만 일삼던 5명의 대신들을 때려 죽이는 소리였다. 아노월성이 함락되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인근에 퍼져 나갔 다. 소발률국 주변의 72개 나라가 줄줄이 고선지에게 항복을 해 왔다. 고선지의 원정군은 이들에게 다짐을 받고 드디어 회군길 에 올랐다. 당시의 상황으로 동양의 군대가 서방의 아프가니스 탄 일대를 정벌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고선지가 소발률국을 정벌함으로써 토번과 사라센 양쪽에 치명타를 가한 것이다. 고선지의 원정군이 소실리왕 일족을 데리고 안서도호부가 있 는 쿠차로 개선한 것은 그해 8월달. 돌아오는 길은 줄곧 내리막 이고, 싸움이 없어서 한 달이 조금 더 걸렸다 고선지의 서역 원 정 기간은 모두 5개월 정도였다. 쿠차로 돌아온 고선지는 그의 큰 공로를 시기한 안서도호부 도호 부몽영찰과 마찰을 빚었다 이를 계기로 도호 부몽영찰이 물러나고 고선지가 대신 안서도호부 도호로 임명되었다. 드디어 서역을 다스리는 제1인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을지마사는 고선 지가 크게 출세하는 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도호가 된 고 선지는 세상에서 부러을 것이 없는 지위를 얻었지만 을지마사는 고선지가 혹시나 부귀영화에 안주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고선지의 행적을 보면 그때 을지마사의 생각 이 한낱 기우였음이 드러난다. 그로부터 3년 후 고선지와 을지 마사의 눈앞에 두 사람이 그토록 열망하던 중앙아시아의 대평원 이 들어왔던 것이다. 한편 허텐의 무메는 과연 그 동안 무슨 일을 격근 것일 까? 을지마사가 허텐의 자숙 대인 집을 떠나고 반 년쯤 지나서 오 식닉국 핫산 왕자가 교역차 허텐에 왔다. 핫산 왕자는 때마침 저 자에서 춤을 추는 무메의 미모에 홀딱 반해 청혼을 했다 그러자 온 허텐 시내가 떠들썩해졌다. 길거리에서 두 사람만 만나도 무 메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글쎄 , 그 잘생긴 핫산 왕자가 무메 아가씨를 데려간대 ." "결혼을 하면 무메는 왕비가 되겠지? 그러나 정작 기뻐해야 할 자숙 대인의 집에서는 별다른 동요 가 없었다. 어느 날 밤 자숙 대인은 부인과 단 둘이서 핫산 왕자 의 청혼에 대해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일을 어떡한다?" 자숙 부인은 이미 결심이 선 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안 돼요, 그리로는 시집 못 보냅니다." "허참, 만약 청혼을 거절하면 저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 - 그래도 이미 왕비가 3명씩이나 있는 남자에게 어떻게 내 외 동딸을 준단 말이에요? 핫산 왕자가 사는 오식닉국은 이슬람교를 믿고 있었다. 이슬 람교에서는 부인을 4명까지 얻어도 흥이 되기는커녕 지위가 높 고 부자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오히려 자랑거리였다. 아마도 마 호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할 당시에는 끊임없는 전쟁으로 과부 와 고아들이 많이 생겨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이를 해 결하는 방편으로 그와 같은 율법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율법은 그 이후에도 이슬람 사회에서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이 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당시 이슬람 사회에서는 부인이 3명이나 있기 때문에 딸을 시집 보내지 못하겠다고 하는 자숙 대인 부인 의 고집이 되레 이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자숙 부인이 이처럼 강경하게 나오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원래 자숙 부인은 서쪽 라마 근처에서 온 대상의 딸이었 다. 그녀는 부모에 이어 경교(당시에는 기독교를 이렇게 불 렀음)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자-대인과 결혼할 때도 일부일처 를 철저히 지킨다는 서약을 하고 결혼을 한 것이다. 자숙 대인 부부가 남들이 큰 경사가 났다고 부러워하는데도 말 못할 고민에 싸여 있을 때 무메는 또 다른 고통 속에 있었다. 무메는 그 동안 자기의 손목에서 놋쇠팔찌를 단 한 번도 빼낸 적 이 없었다. 무메한테는 자기의 팔목에 끼워져 있는 놋쇠팔찌의 무게만큼 벅차고 힘겨운 시간들이었다. 하루는 무메가 언제나 가냘픈 손목에 어울리지 않게 투박하고 큰 놋쇠팔찌를 덜그럭거리면서 달고 다니는 걸 보다 못한 자숙 부인이 무메를 불러 타일렀다. "예쁘고 값진 황금팔찌가 여러 개 있으면서 왜 하필이면 밤낮 없이 천한 놋쇠팔찌를 달고 다니느냐? "어머니, 저는 이것이 더 좋아요." "혹시 그 팔찌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더냐?" 무메는 차마 대답을 못하고 속눈썹을 아래로 깔았다 어머니 앞에서 매일같이 살구나무 밑에서 만났던 고구려 청년 을지마사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헤어지던 날 자기의 손목에 놋쇠팔찌 를 채워 주며 다시 찾아오겠다던 그의 말을 어머니 앞에서 사실 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메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어머니의 치맛자락 에 엎드렸다. 그때쯤 자숙 부인은 어머니의 육감으로 필시 딸의 놋쇠팔찌에는 말 못할 사연이 있고, 그로 인해 딸 무메가 괴로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핫산 왕자의 청혼이 들어오 고 무메가 시름에 젖는 것을 보고는, 자기가 나서서 딸의 괴로움 을 해결해 주기로 다짐을 하고 있던 터였다 그때 남편 자숙의 입에서 또다시 곤혹스러운 말이 떨어졌다 "여보. 생각해 보구려. 이것은 우리 집만의 문제가 아니오. 만 약 핫산 왕자를 노하게 만들면 오식닉국은 물론, 그 뒤를 돌봐 주고 있는 토번 군사들이 허텐을 가만 놔두리라는 보장이 없 소." "그럼 당신은 우리 딸 무메가 여러 명의 아내에게 시달리며 희생을 당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기품 있고 너그러워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자숙 부인도 딸 무메의 일인지라 목소리에 노여움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자 숙 대인으로서는 사면초가인 셈이었다 "만약에 무메를 핫산 왕자에게 보내지 않으면, ,, 자숙 대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훅 들이마셨다 "당나라 안서도호부에서도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소." 자숙 대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무메가 허텐의 상권을 쥐고 있 는 자숙 대인의 딸만 아니었다면 안서도호부에서는 오식닉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메를 벌써 강제로라도 오식닉국으로 보내 버렸을 터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안서도호부에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원래 타림분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중국의 한족이 아니고 위구르족이었다. 한족인 당나라가 위구르 족을 구슬리며 지배를 하고 있는데, 만약 자숙 대인 같은 위구르 족의 지도자가 반기를 들면 당나라의 서역 지배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었다. 자숙 부인도 주변 분위기를 잘 알고 있는 터라 막상 대답할 말 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여자가 어머니일 때는 누구보다도 강했 다. 그녀는 이 세상 천지에 무메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제가 경교 신자라는 것을 잊으셨나요? 자숙 부인은 남편에게 마지막 쐐기를 박고 있었다 "음 -." 자숙 대인의 입에서는 대답 대신 무거운 한숨 소리가 새어 나 왔다. 자숙 대인토 경교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옛날 옛적 라마에서는 경교 신자들이 자기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사자의 밥이 되어 떼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 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은 지독한 사람들 이라고 했다 그러면 자기의 아내는 딸이 핫산 왕자와 결혼하는 경우 경교의 계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이라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자숙 대인은 가장으로서 아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만은 없었다 그는 전에 없이 부인에게 역정을 냈다. "그럼, 당신은 무메가 평생 혼자 살게 되는 경우가 생겨도 상 관치 않겠다는 말이오? "그것도 하늘의 뜻이라면 하는 수 없지요," 자숙 부인은 남편의 말을 옹골차게 되받았다 그날 밤 이슥해서 한무리의 낙타떼가 자숙대인의 집을 몰래 빠져 나와 허텐 서쪽길로 가고 있었다 낙타떼들은 그리 멀리 가 지는 않았다. 허텐으로부터 10여 리 떨어져 있는 자숙 대인의 여 름별장이 거기에 있었다 서역의 집들은 토담이 서너 길씩이나 높았으므로 별장은 외부 세계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그 후 자숙 대인의 여름별장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대신 다음날부터 허텐 시내에는 해괴한 소 문이 나돌았다. 사람들이 둘만 모여도 귓속말을 했다. "자숙 대인 딸 무메 이야기 못 들었어? "무슨 일? 무메는 허텐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인지라 소문도 빨랐다. "갑자기 병이 나서 머리가 돌아 버렸대. -호사다마라더니 ! 그 예쁘고 마음씨 곱던 아가씨가------쯧쭌 쯧 허텐 사람들은 남의 집 규방 일이라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 었지만 모두들 동정을 금치 못했다. 한편 귀주성에서 살아 남은 고구려 유민에게는 또다시 내일 을 예측할 수 없는 고달픈 유랑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나데님 , 이제 출발하지요." 가한서한이 나데 곁으로 와서 슬며시 재촉을 했다 나데는 대답을 해놓고도 금방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어 가는 마을을 굽어 보면서 평생을 고구려 유 민들을 이끌어 오다가, 당군과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망루에 서 스스로 몸을 던져 자결해 버린 어머니 나라를 떠올리며 눈시 울을 적시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나데는 눈물을 찍어 내고는 일어섰다 "그래 , 떠나자 " 나데가 이끄는 고구려 유민들은 그날부터 서쪽을 향해 장도에 올랐다. 서쪽으로 갈수록 산세가 험해졌다. 넘어도 넘어도 앞을 가로막는 산과 산, 거기다가 지대가 점점 높아져서 조금만 걸어 도 숨이 찼다. 나데는 걸으면서 혼자서 생각해 보았다. '주강 남쪽 마을에서 온수곤수와 자마우치가 이끌고 도망간 사람들은 어찌 되었을까? 그들이 서쪽을 향해 도망을 쳤다면 필 시 산 속 어디선가 숨어 살고 있을 텐데.' 그러나 강을 건너고 수풀을 헤치고 가도가도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두 달쯤 전진했을 때 드디어 눈앞에 넓은 들판이 나타났다. 그러나 들판은 낮은 지대의 평야가 아니고, 2 천 미터나 높은 곳에 자리잡은 고원지대였다. 고구려 유민들은 마침내 운남 고원에 도달했던 것이다. 운남 고원의 풍경은 이전 에 살던 주강 마을과는 완연히 달랐다. 구름장들이 머리 위로 낮 게 떠다녔고, 고지대 특유의 스산함이 느껴졌다. 운남 고원에 이른 고구려 유민들이 산마루에서 바라보니 마침 기괴한 형상을 한 큰 바윗돌 수만 개가 죽순처럼 하늘을 향해 돋 아 있는 곳이 있었다. 그 바위들 사이로 저녁연기가 피어올랐다. 앞서 가고 있던 아소수미가 나데에게 뛰어왔다. "나데님 ,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 나데가 살펴보니 바위숲 사이로 멀리 마을이 보였다. 좨 큰 마 을이었다. 갑자기 나데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거쩌면,,,,,, 자마우치와 온수곤수 조가 먼저 와서 자리를 잡 고 사는 것이 아닐까? 나데의 고구려 유민들이 마을로 접근해 가자, 바위숲 속의 사 람들도 이쪽의 출현을 알아차렸는지 동구밖으로 나와서 자기네 들에게 접근해 오는 고구려 유민들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러 나 그들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거리에 왔을 때 나데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그들은 고구려 유민들이 아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나데가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우리들은 이족이라고 합니다 " 바위숲 사람들도 이쪽의 정체가 궁금했나 보다. 백발이 성성 한 노인 한 명이 나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 당신네들은 어디서 온 누구요? "우리는 저 동쪽에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온 고구려 사람들이 오 "고구려 ?" ''그렇 소 ." 나데의 설명을 듣고도 바위숲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두 눈만 을 멀뚱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데는 백발노인에게 한 가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긴장 탓인지 나데의 목소리가 자꾸만 떨렸다. "영감님, 혹시 고구려에서 왔다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 까? "고구려 요? "예, 한 몇천 명쯤 되었을 것입니다." 노인의 대답을 기다리는 고구려 유민들은 일순 숨을 멈추었다. "몇 해 전에 낮선 사람들을 본 적이 있소." "낮선 사람? "한 3년 전쯤엔가 1천 명가량 되는 젊은이들이 이 마을에 찾 아든 적이 있었소." "젊은이들이? 그럼 노인네들과 어린아이들은 없었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없었소. 당신네들과 똑같은 옷차림이었는데 북쪽 어딘가 큰 강 남쪽에서 살다가 당나라 군사들을 피해서 도망 왔다고 합디 다. 주강 마을에서 헤어진 고구려 유민들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젊은이들뿐이었을까? 나데의 머리 속에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당군에게 추격을 당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자마우치가 젊은이들만 피신시키고 자기네들은 모두 당군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나데가 알 까닭이 없었다. 아무튼 고구려 유민들은 주강 남쪽 마을에서 헤어진 마을 사람들 일부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 고 가슴이 뛰도록 반가웠다. "그 젊은이들이 지금 어디에 있소? "여기는 없소," "여기서 서쪽으로 1500리쯤 가면 이해라고 부르는 큰 호수가 있지요. 아마도 그쪽으로 갔을 겁니다." 이해라면 운남성 대리 지역을 말했다 다음날 나데는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었다 운 남 고원에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 젊은이들을 찾아갈 것인가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아니나다를까 줄곧 말썽만 부려 온 중년층들은 운남 고원에서 눌러 살자고 주장을 했다. "이곳까지도 모진 고생을 하며 왔는데 또 서쪽으로 간다면 길 바닥에서 죽으란 말이오? 그러나 젊은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주강 남쪽 마을이 당나라 군사들에게 짓밟히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 이후 귀주성 마을에서 살면서도 군사훈련 을 하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한시도 편안한 생활을 해본 적이 없 던 세대들이었다 지난번 귀주성 싸움에서 당군과 목숨을 걸고 싸웠던 가한서한, 아소수미 , 명림오묘, 귀실우오, 고인목, 연개 수근, 아불화도마 등이 나데 앞에 엎드려 울면서 간청했다. "나데님 , 우리는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동족을 찾아가겠 습니다 " "어서 떠나게 해주십시오." 나데도 그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4~50대 중년층만 빼놓고 는 노인네고, 젊은 아이들이고 모두들 섞게 울었다. 모질게 살아 온 설움이 마치 봇물 터진 듯했다. 나데는 4, 50대 중년층들이 몸을 사리고 꽁무니를 빼는 걸 더 이상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또 고구려 유민들의 장래를 생각하 면 그들을 용서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데는 남편 아소미 네가 을지마사와 함께 바깥 세상을 정탐하러 주강 남쪽 마을을 떠난 이후 소식이 없어 근심으로 늙어 가고 있었지만 평소에 어 머니 나라가 고구려 유민들을 다스리는 것을 보아온 터라 행동 거지에 빈 틈이 없고, 남자 못지않게 대가 찼다. 드디어 나데의 입에서 독한 명령이 떨어졌다 "내일 아침 우리는 이해를 향해 출발한다. 그러나. ,.. . 모두들 숨을 죽이며 나데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떼어 놓고 간다." 아무도 나데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고구려 유민들은 바위숲 마을을 나와 이해 를 향해 길을 떠났다. 개중에는 남편을, 그리고 아버지를 남겨 두고 가야 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고구려 유민들은 한마음이 되 어 동족을 찾아나서는 데 빠지고 싶지 않았다 고원의 아침 공기는 싸늘했다. 바위숲 마을에서 이틀을 쉰 덕 분에 웬만큼 원기를 되찾은 고구려 유민들은 앞만 보면서 걸었 다. 정오 무렵이 되어 고구려 유민들은 점심을 해 먹으려고 고갯 마루턱에서 잠시 행군을 멈추었다. 젊은이들 가운데 나이가 어 려 귀염등이 노릇을 하는 아불화도마가 나데 곁으로 달려왔다. "나데님 , 아까부터 누군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어요." "그래? 누군지 잘 살펴봤니? "예, 그런데 우리가 뒤돌아보면 얼른 숨어 버려요." 나데는 그들이 누군지를 짐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함께 이해로 가는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 여러 명의 중년 여자 들이 나데 앞에 와서 엎드리며 울먹였다. "나데님 , 못난 지아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은 바로 운남 고원에 떨구어 두고 온 4~ 50대를 남편으로 둔 불쌍한 아낙네들이었다. 그래도 남편인지라 혼자서 떠나는 것이 가슴 아팠던 것이다 어느덧 젊은이들도 하나둘씩 자기네 아버지를 위해 무릎을 꿇었다. 나데는 하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가서 데리고 오시오." 곧이어 중년 남자들이 아내와 자식들에게 이끌려 왔다. 그간 참고 참아 왔던 나데의 호통소리가 그들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당신들은 왜 조국 고구려가 망하고 우리들이 남의 나라 땅, 낯선 산하를 헤매고 다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소? 오금을 못 펴고 있는 그들을 향해 나데의 말이 이어졌다. "고구려 말기에 당신들과 같이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안일만을 추구한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었소." 중년 남자들은 나데 앞에서 고개를 떨군 채 묵묵히 서 있었다 나데는 그쯤해서 아주 쐐기를 박았다 "앞으로 당신들은 일체 의사결정에 참여시키지 않겠소, 대신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을 때는 가차없이 추방하겠소. 그래도 좋 소?" 그들은 그래도 남자라는 체면 때문이었는지 침묵만 지키고 있 다가 나데가 시퍼렇게 다그치자 그제서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 로 대답했다 고구려 유민들은 점심을 먹은 후 다시 출발했다 그러나 고구 려 유민들 가운데는 70이 넘은 노인네는 물론 갓난아이까지 끼 어 있어 행보는 여전히 느렸다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것은 길가 는 도중에 드문드문 이족 마을이 있어서 그들에게서 도움을 받 을 수가 있었다. 나데가 이끄는 고구려 유민들이 이해에 도착한 것은 바위숲 마을을 출발한 지 한 달 만이었다. 남화현 아흔아홉 굽 이의 큰 고개를 넘자 갑자기 시야가 툭 트이면서 그림같이 아름 다운 풍경이 들어왔다. 바다만큼 넓은 호수에 푸른 물결이 넘실 거리고, 건너편 호숫가에는 마을들이 조는 듯 엎드려 있었다. 바 로 이해에 도착한 것이다. 나데의 고구려 유민들은 그곳에서 감 격적으로 자마우치를 따라갔던 젊은이 1천여 명을 만날 수가 있 었다. 그들은 원주민인 백족들 사이에 끼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뜻밖에 나타난 나데 일행을 보자 우르르 달려와서 아무나 붙들 고 통곡을 했다. "나데님 ? 나데도 기가 막혔다. "너희들이 정녕 살아 있었구나." 그날 밤 나데는 그들로부터 자마우치 조의 슬픈 종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간에 지냈던 이야기를 하면서 앞으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서로를 꼬옥 부등켜안고 다시 한 번 울먹였다. 그러나 그 시각에도 고구려 유민들을 잊지 않는 무리들이 있 었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 유민 토벌에 대한 논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시어사 이밀이 귀주성에서 고구려 유민들 에게 참패를하고목숨만살아서 돌아온지 꼭 반년 만의 일이 었다, 정사를 좌지우지하고 있던 재상 이임보가 조카인 패장 이 밀의 위신을 세워 주기 위함이었다. 고구려 유민들이 마악 이해에 도착해서 숨 돌릴 겨를도 없는 차에 당나라의 토벌이 개시되었다. 당장 이밀이 거느린 병사는 3만 명의 대군, 고구려 유민들 중에서 싸울 수 있는 젊은이들이 라야 겨우 2천 명. 그들에게 또다시 새로운 위험이 시시각각으 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유민의 기구한 운명에도 단 한번의 예외가 있 었던지 고구려 유민들은 당군의 제2차 토벌작전을 용케 피할 수 가 있었다 이밀의 당군 3만 명이 귀주성에 이르러 보니 그사이 고구려 마을은 불타고 사람들은 간 곳이 없었다. 그들은 다시 고구려 유 민들이 도망갔으리라고 생각되는 서쪽을 향해 진군을 했다 그 리고 당군은 운남 고원에서 뜻밖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당 군의 표적인 고구려 사람들이 아니고 이족들이었다 이족들은 무인지대에서 자기네들끼리만 수십 대를 평화스럽게 살아왔으 므로 전쟁이라는 것을 몰랐다 이밀은 그들로부터 고구려 유민들이 1500리 밖에서 살고 있다 는 얘기를 들었지만, 높은 지대에서 두통이 나고 어지렁증을 호 소하는 군사들을 이끌고 더 이상 싸우러 간다는 것이 엄두가 나 지 않았다 "이번에는 돌아가자 " 이밀은 조정에 자기의 체면을 세워야 했기 때문에 죄없는 이 족 3천 명을 포로로 잡아 끌고 장안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밀은 현종 앞으로 나가 부복했다 먼저 현종이 이밀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말썽많은 고구려 유민들을 모두 죽였소? 당현종이 묻는 말에 이밀은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했다 "예, 그들은 우리 당나라가 무서워 운남 고원으로부터 1500자 나 떨어진 첩첩산중으로 도망가 있었습니다. 하오나 이번에는 군량이 넉넉지 못해 이족만을 정벌하고 돌아왔습니다 " "이족이라고? 당현종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예, 고구려 유민들을 뒤쫓아 운남 고원이라는 곳으로 진군했 더니 그곳에 수만 명의 이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훗날 화근이 될 성싶어 이번 기회에 요절을 내고 왔습니다." "수고했소." 그쪽 실정을 전혀 몰랐던 조정에서는 생전에 듣도 보지도 못 했던 이족을 정복하고 3천 명이나 되는 포로와 그곳 토산품을 싣고 온 것만으로도 장한 일이라고 칭찬을 했다 그리고 그때로 부터 장안과 운남 고원 사이에 길이 뚫리고 사람들이 오고갔다 그러니까 을지마사가 여옥을 장사지내고 장안에서 농우로 고선 지를 찾아가는 길에 운남 고원으로 가는 대상 텁석부리 영감과 만난 것은 당군이 운남 고원을 침략한 이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를 적대하는 이상 당나라는 고 구려 유민들을 가만 놔둘 까닭이 없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이밀은 다시 5만 명의 병사를 끌고 이해까지 쳐들어가 고구 려 유민과 생사를 가름하는 일대 혈전을 벌이게 된다. 당식 당나라 조정에는 고구려 사람으로 왕사례가 출세해 있 었다. 그 무렵 왕사례는 농우절도사로 있던 의형 가서한을 따라 가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그래서 그는 당나라 조정으 로부터 우의장군과 관서병마사라는 높은 직위에 올라 있었다. 어느 날 장안에 있는 왕사례의 저택에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 아 들었다 손님은 의복이 남루하고 몰골이 추레했지만 살펴보 면 기골이 장대하고 양쪽으로 찢어진 눈이 부리부리해서 섣불리 범접하지 못할 위엄이 있었다. 그는 언젠가 장안성의 객사에서 고선지와 함께 만났던 이정기. 당시 우의장군 왕사례와 평로절 도부의 일개 비장 이정기의 신분 차이는 엄청났다 그러나 이정 기의 기개는 신분의 차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쨌든 같은 고구려 사람이라는 동족의 정리를 생각해서 왕사례를 찾아간 것 이다 "왕 장군님, 듣자하니 귀주의 고구려 유민들이 다 죽어 간다 고 합니다 어떻게든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정벌을 막아 주십시 오 이정기는 오로지 동족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혼자서 밤을 낮 삼아 먼 평로절도부에서 장안까지 달려온 터였다 이정기의 말 에는 어떻게든지 동족의 비극을 막아 보려는 진정이 담겨 있었 다 왕사례가 대뜸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이정기는 하던 말을 계 속했다. "왕 장군님, 이러다가는 조국이 망한 후 뿔뿔이 흩어진 동족 들이 모두 다 죽고 맙니다." 그때 왕사례의 입에서 역정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 왔다. "왜 그렇게들 옛날에만 집착해서 말썽을 일으키는 것이오? 일 단 중국에 붙잡혀 왔으면 중국 사람이 된 것이오. 중국 사람이 되는 것이 싫다는 사람은 죽어 마땅하오," 순간 이정기의 눈에서 불똥이 확 튀었다. 당장 왕사례의 모가 지를 비틀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참아야만 했다 대신 왕사례 의 면전에서 한마디를 씹어 뱉었다. "당신은 고구려 사람이오, 아니면 중국 사람이오?" 그러나 자기의 성마저도 중국 사람의 것으로 바꾼 왕사례의 의지도 확고했다. "나는 중국 사람이다. 다시는 내 앞에 얼씬거리지 마라." 이정기는 방문을 소리가 나도록 꽝 닫고는 밖으로 나와 버렸 다 밖에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이정기는 분풀이라도 하듯 침 을 탁 뱉은 다음 이를 부드득 갈았다 '어떻게든 힘을 길러야 한다 이 한 목숨 죽는다고 해도 민족 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 운명의 달라스 전투 오식닉국. 연운보, 소발률국을 한꺼번에 잃은 토번은 다시 사라센과 손을 잡으려고 힌두쿠시 산맥 남쪽에 있는 갈사 -장사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어서 갈사국의 북쪽 아 무다리야 강 상류에 있는 토하라국을 침략하려고 했다. 토번의 위협을 느낀 토하라국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750년 그해 초봄은 눈발이 없는데도 유달리 추웠다. 황토색 허허벌판 중앙아시아의 대평원이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매운 바람에 꽁꽁 얼어붙었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질풍같이 내달리는 고선지의 제2차 서역 원정군의 기 마병단이었다. 고선지는 이사업 단수실, 을지마사 장군과 7만 명의 안서도 호부군을 이끌고 다시 텐산 산맥을 넘어 토하라국으로 진군했던 것이다. 그러나 싸움은 싱겁게 끝나 버렸다- 한참 성을 공격하고 있던 토번군은 고선지의 원정군이 도착하자 안팎에서 협공을 당할 것 을 두려워한 나머지 도망을 쳤다 고선지의 원정군과 성문을 열 고 나온 토하라군은 도망가는 토번군을 뒤쫓았다. 마침내 토번 군 3천 명을 죽이고 천여 명을 생포했다 싸움이 끝난 다음날 고선지는 토하라의 힌두쿠시 산속에서 북 쪽으로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는 중앙아시아의 대평원을 바라다 보면서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바로 저 곳이다." 고선지가 혼잣말을 하다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흠칫 놀랐다, 다행히도 을지마사였다 고선지는 손을 들어 대평원을 가리켰다 "을지마사, 내일 우리는 저곳으로 간다 " "네? 쿠차로 회군하지 않구요? "그렇다. 우리가 기다리던 바로 그때가 온 것이다." 그날 밤 고선지의 작전 계획을 들은 이사업과 단수실 장군도 놀랐다 이사업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선지에게 물었다. "고선지 장군님 , 진정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애당초 이번 원정 계획에는 석국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는데 요 -- 다음 말은 단수실이 이었다 "석국은 한 번도 우리 당나라를 배반한 적이 없었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중앙아시아 대평원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석국은 생각보다는 작은 나라였다. 그리고 석국왕 나구차비시는 당나라에 협조적이어서 당나라를 배반한 적이 없었다. 고선지는 대답이 궁했다. 이사업 , 단수실 장군이 모두 중국인 이라서 함부로 자기의 포부를 발설할 수가 없었다. "장군들도 아다시피 최근 사라센이 강대해져서.. .. ." 좌중의 모든 사람들이 고선지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벌써 석국 근처에까지 세력을 뻗쳐와 있소. 이왕 이곳까지 온 김에 석국 사정을 둘러보고 가는 것이 좋을 것이오." 고선지는 짐짓 사라센을 들먹여 명분을 내세웠다. 이사업과 단수실은 모두 무장 출신이라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고선지의 말 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오직 한 사람 을지마사만은 고선 지의 마음속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날 밤 을지마사는 흥분이 되어 좀처럼 잠을 이를 수가 없었 다. '중앙아시아의 대평원에 고구려를 건설한다.' 얼마나 오랫 동안 꿈꾸어 왔던 일인가. 을지마사의 눈앞에 갑자기 주강 남쪽 마을이 어른거렸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틈틈이 조국 이야기를 들려주던 나라 할머니 . 조국 고구려는 동쪽에 있었던 큰 나라였다고 했다. 영토가 넓고 백성들이 부지런해서 주위에서 함부로 넘볼 수 없 을 만큼 강한 나라였다고 했다. 언젠가 중국의 수나라가 두 번이 나 침략을 해왔지만 그때마다 격퇴시켰고, 마지막으로 수양제가 113만이라는 대병을 이끌고 침략해 왔지만 을지문덕이라고 하 는 위대한 장군의 손에 몰살을 당하는 바람에 결국 수나라가 망 해 버렸다고 했다. 수나라가 망하자 대신해서 일어난 당나라는 중국 사람들의 원 수를 갚겠다고 여섯 번이나 침략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번번이 참패를 당하고 되돌아가야만 했다. 당나라는 자기네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물리칠 수가 없어 고구려 남쪽에 있던 신라를 꼬드겨 함께 고구려를 무너뜨렸다고 했다. 이야기가 이 대목에 이르면 나라 할머니는 으레 말소리에 힘 주어 아이들을 타일렀다. '너희들은 남의 나라에 빌붙어 살 못난 사람들이 아니다. 부 지런히 힘을 길러 조국 고구려를 되찾아야 한다.' 주강 남쪽 고구려 어린이들은 철부지 개구쟁이 시절부터 나라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아이들은 나라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그리고 해가 가고 세월이 지나면서 아이들의 가슴속에 쌓여 가는 것이 있었다. '이담에, 이담에 우리들이 크면 잃어버린 조국 고구려를 꼭 되찾아야 한다.' 을지마사는 주강 남쪽 마을을 떠올리며 몸을 뒤척이다가 혼자 서 다짐하듯 뇌까렸다. '그래 , 내일이다. 내일부터 새로운 고구려가 시작된다 ' 토하라국에서 열흘을 쉰 고선지의 서역 정벌군은 드디어 힌두 쿠시 산맥을 내려갔다. 병사들의 눈앞에 대평원이 나타나고, 까 마득히 먼 곳에 지평선만이 가물거렸다. 토하라에서 석국으로 가는 허허벌판에도 드문드문 마을이 있었고, 힌두쿠시 산맥의 눈 녹은 물을 끌어다가 밭을 갈고, 밀과 포도를 재배하며 사람들 이 살고 있었다. 어느새 마을마다 연분홍의 살구꽃이 흐드러지 게 피어 있어 봄의 정취를 돋우었다. '아, 벌써 봄이구나.' 을지마사의 가슴속이 한껏 부풀어 저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 다 바로 이곳에 우리 고구려를 세운다면, 천하를 호령하는 대제 국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고선지의 기마군단 7만 명은 중앙아시아의 황토 벌판 위에 말 발굽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석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몇 년 동안 텐산 산맥과 힌두쿠시 산맥의 험한 산속에서 기를 펴지 못 하고 있던 말들이 이제야 제세상을 만났다는 듯이 끝없는 벌판 을 질풍같이 내달렸다 그 가운데서도 갈기털에 기름기가 좌르 르 흐른 고선지 장군의 흑토마가 단연 돋보여 말만 보아도 고선 지의 위풍이 드러났다. 당시 고선지가 타고 다니던 이집트산 준 마는 주인의 명성만큼 알려져, 당대의 시인 두보까지도 고선지 장군의 말을 보고는 찬양하는 시를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공이 고선지였다면, 마땅히 석국에서도 그 에 상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뜻하지 않은 고선지의 움직임이 석국에 알려졌을 때, 온 성안 이 들끓었다 그러지 않아도 석국의 나구차비시왕은 고선지의 서역 원정 활동을 낱낱이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국들이 하나씩 고선지의 원정군 말발굽 아래 짓밟혀 가는 것을 보면서 은근히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설마하 는 생각도 있었다. 석국은 지난 5년 이래 당나라를 배반하거나 조공 바치는 것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를 가상히 여긴 당 나라에서는 석국왕을 회화왕으로 봉하기까지 했다 그 런데 첩자들이 숨가쁘게 달려와 보고하는 말에 의하면 고선지가 대부대를 이끌고 석국을 향해 진군을 해오고 있다는 불길한 것 이 었다. 석국에서는 즉시 중신회의가 열렸다 "이를 어떡한다? 나구차비시왕은 젊어서는 중앙아시아의 대평원을 주름잡던 용감무쌍한 왕자였지만, 이제 60이 넘어 당당하던 기개도 한풀 꺾여 있었다. 많은 세월을 그와 함께 해온 조정의 대신들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 만큼 늙어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생각해 보 아도 고선지가 대군을 이끌고 석국을 침범할 까닭이 없었다. "우리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 우리를 해치기야 하겠습니까? 늙은 대신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성문을 열고, 예를 갖추어 저들을 맞아들입시다." 드디어 나구차비시왕의 결정이 내렸다.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조정의 공론이 정해지자 곧바로 고선지 장군의 접대준비가 진 행되었다. 수백 마리의 소와 양을 잡고, 갖가지의 음식과 과일들 을 모으느라 성안의 저잣거리가 떠들썩했다. 그러나 역사의 수 레바퀴는 언제나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뒤바뀌고 있었다. 며칠 동안 매사냥을 하기 위해서 성밖에 나가 있던 압둘 왕자 는 성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사람들이 허둥대는 것을 보고는 두 눈을 치켜떴다. 그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성안이 온통 불난 집처럼 떠들썩할까? 압둘 왕자는 즉시 아버지 나구차비시 왕에게로 달려갔다. "아버지 , 도대체 무슨 일이옵니까? "음, 당나라 고 도호가 찾아온단다." 압둘 왕자는 왠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버지 나 구차비시왕이 젊었을 때 못지않게 우람한 체격에 용맹과 총명을 지닌 무장이었다 "혼자서...... 아니면 병사들을 이끌고 온답니까? "첩자의 보고에 의하면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구나. 잘못한 일 이 없는데 설마 저들이 우리를 해치기야 하겠느냐?" "아버님, -큰일났습니다" "뭣이 라고? "저들이 토하라국 원정에 지쳐 있을 텐데, --, 곧바로 되돌아 가지 않고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 오는 것은------ 나구차비시왕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아들 압둘 왕자의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우리를 몰아내고. 저들의 영토를 넓히려는 야욕이 분명합니 다" 영리한 압둘 왕자는 고선지의 흉중을 례뚫어보고 있었다. 나 구차비시왕의 얼굴은 거의 사색이 되었다. 석국에서는 다시 한 번 난리가 났다. 고선지 장군의 당군 환영 행사 준비가 즉시 전쟁 준비로 뒤바뀌었다. 고선지와의 결전의 장이 먹구름처럼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토하라를 출발한 지 3일째 되는 날 정오가 조금 지나서 고선 지의 원정군은 석국의 성문 앞에 당도했다. 예상했던 대로 석국 에서는 성문을 꼭꼭 닫아 걸고, 성루에는 오색 기가 무수히 나부 끼고 있었다 주위에 정적만이 감돌았지만, 그 부자연스런 정적 속에는 앞일을 예고하는 은은한 살기가 감추어져 있었다. 그때 고선지의 흑토마가 성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나는 당나라 안서도호 고선지다. 성문을 열어라." 그러나 성루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고선지 가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만약 성문을 열지 않으면 즉시 쳐들어가 너희들을 까부수겠 다." 그때 성안에서 응답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 고, 팽팽히 고조되어 가던 침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였다. 획 -. 고선지가 얼른 말 위에 엎드렸다. 빠른 화살 한 개가 날아와 고선지의 금색 투구에 맞고 퉁겨 나 갔다. 고선지는 운좋게 목숨을 건졌지만, 석국이 고선지와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가 분명해졌다. 뒤이어 군중에서 달려나온 이사 업 , 단수실이 고선지를 호위해서 진중으로 들어갔다. "고 장군님 , 성을 단숨에 짓밟아 버립시다." 성미 급한 이사업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고선지의 입에 서는 의외의 명령이 떨어졌다. "안 된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수성을 한다." 제장들의 눈이 휘등그레졌다. "우리쪽에서 수성을 한다구요? "그렇다. 저들이 못 견디고 먼저 성문을 열고 나올 것이다." 실제로 싸움에서 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력도 수성군의 3배 이상이 있어야 하고, 많은 사상자를 각오 해야만 했다. 그러나 석국과 같은 중앙아시아의 평야지대에 있 는 성은 달랐다. 산꼭대기나 벼랑을 긴 천혜의 요새도 아니고, 거기다가 물도 귀했다. 300여 척이나 땅을 파서 얻은 지하수로 는 병사들 목 축이기에도 모자랐다. 더욱이나 탈라스 강 지류의 냇물을 길어다 식수로 쓰고 있는 일반 백성들은 갈증으로 열흘을 넘기기 어려웠다. 애당초 수성 전으로 나간 것은 석국측의 실수였다. 물론 압둘 왕자에게는 그 럴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만, 그래도 싸울 의사가 있었다면 급한 대로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와 탈라스 강을 끼고 대결을 했 어야 했다 이윽고 고선지의 다음 명령이 떨어졌다. "먼저 성을 완전히 포위한다. 이사업 장군은 북문, 단수실 장 군은 서문, 을지마사 장군은 남문을 지킨다. 나는 봉상청 군사와 함께 저들의 예상 공격 목표인 동문을 맡겠다 " 고선지의 작전 명령이 신속하게 이어졌다 "석국군이 어느 문을 열고 공격해 오든지 현위치에서 움직이 지 말고 자기 구역만을 철저히 사수한다 고선지군이 성을 포위한 후 이렇다 할 싸움 없이 며칠이 지나 갔다. 그러나 고선지의 예측은 적중했다. 성을 포위한 지 7일째 되는 날 오전, 드디어 고선지가 담당하고 있는 동문이 열리고 만여 명의 석국군이 쏟아져 나왔다. 일시에 양군의 접전이 벌어젓다 쌍방은 기마전으로 맞섰기 때문에 말 울음소리가 들려 오는 곳에는 피가 튀었다. 그때 또 한번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와아 -. " 이번에는 2만여 명의 석국 군대가 금색투구를 쓴 압둘 왕자의 지휘하에 남문을 열고 쏟아져 나왔다. 을지마사의 담당구역이었 다. 역시 고선지의 판단이 옳았다. 저들은 먼저 동문을 공격하는 척하고, 원정군이 그쪽으로 모이면 남문을 열고 나와서 배후를 들이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남문 쪽에서는 을지마사 휘하 만여 명의 당군이 기다 렸다가 압둘 왕자의 석국군을 일시에 덮쳤다. 쌍방간에 금방 혈 전이 벌어졌다. 군사들과 말이 한덩어리가 되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통에 성 주위에는 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그러나 석국 군은 텐산 산맥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나들며 단련된 고선지군단 의 적수가 못 되었다. 석국군은 성밖으로 기세 좋게 나왔으나 얼 마 지나지 않아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도 날카롭 게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압둘! 압둘은 어딨는가? 을지마사가 금색투구를 쓴 압둘을 목표로 달려들며 외치는 소 리였다. 압둘은 상대편 대장으로 보이는 젊은 미남 장군이 두 눈 을 부릅뜨고 장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자기편 군사들 속으로 얼른 몸을 숨겼다. 그도 소발률국 싸움에서 중앙아시아 최고의 맹장 가가맹추를 사로잡은 을지마사를 익히 알고 있었다. 석국 군사들이 순식간에 왕자 압둘을 겹겹이 에워싸 버려 을지마사가 달려들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을지마사군의 기세에 눌려 석국군 은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대로 가면 석국군의 참패 는 시간 문제였다. 그때 난데없이 고각소리가 진중을 뒤흔들었다. 뚜뚜 쁘-, 뚜뚜 쁘-. 싸움이 진행되는 양상을 성루에서 내려다본 나구차비시왕이 안 되겠다 싶었던지 철수 신호를 보낸 것이다. 악전고투하던 석 국군이 다투어 성안으로 퇴각했지만 싸움에서 죽고 또 추격군 을 따돌리기 위해 성문을 서둘러 닫는 바람에 성안으로 들어가 지 못한 병사들 2만 명이 고선지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석국 군으로서는 처절한 참패였다 그렇다고 허허벌판에 있는 고립무 원한 성에 갇힌 석국군에게는 이렇다 할 대책이 있을 리도 만무 했다. 다음날 아침 고선지는 석국왕 나구차비시로부터 항복을 통보 하는 편지를 받았다. 당 안서도호 고선지 장군 우리는 귀군을 당해 내지 못하고 철수하려고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구차한 목숨만은 살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날 오후 고선지도 나구차비시왕에게 답서를 보냈다. 고선지 는 싸울 때에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지만 항복한 적군에게는 언 제나 인간적인 예우를 해주었다 무장을 하지 않고 성을 빠져 나간다면 귀하의 생명을 보장 하겠소. 그러나 의외로 고선지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자가 있었다. 감 군 변영성이었다. 감군은 오직 황제를 대리해서 군사의 동향을 감시하고 보고하 는 직책일 뿐, 고선지의 작전권을 간섭할 권리는 없었다. 그러나 변영성은 고선지가 승승장구하자 은근히 자기도 공로를 세워 보 겠다는 욕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고선지 장군의 전술은 과연 천하 제일이오." "???" 고선지가 변영성이 말하는 뜻을 얼핏 알아듣지 못하자 변영성 은 늙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음흥하게 웃어 댔다. "하하, 내가 황제께 말씀드려 그대를 삼공의 지위에 오르도록 하겠소." 감군 변영성의 말은 더욱더 아리송한 데가 있었다. 자기가 어 떻게 고선지를 황제 다음가는 최고의 영예인 삼공의 지위에 오 를 수 있게 한단 말인가. 그러나 변영성의 다음 말을 들었을 때 고선지는 그제서야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맨 몸으로 도망가는 놈들, 한 칼에 쳐죽이면 석국은 이제 영 원히 당나라의 땅이 아니되겠소? 그럼, 변영성은 자기더러 약속을 어기고 무장도 않고 도망가 는 석국왕 나구차비시를 쫓아가서 죽이란 말인가. 변영성의 추 한 모습에 역겨움이 치밀었다. "감군, 나는 나구차비시왕을 절대로 죽이지 않겠소." 고선지가 딱 잘라 말하자 변영성의 낯빛이 변했다. 변영성은 겉으로는 고선지를 추켜세우며 얼러 댔지만 실은 변영성 자신이 이번 기회에 석국을 병합하는 큰 공로를 내세워 삼공의 지위에 봉해지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고 장군은 왜 그들더러 무장해제를 하도록 했소? 그 들을 대항하지 못하도록 해놓고 한꺼번에 죽일 생각이 아니었단 말이오? "아니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한번 맺은 약속은 지키는 사 람이 오." 평소에 고선지의 정의롭고 대쪽 같은 성격을 잘 아는지라, 변 영성은 그날 밤 이사업, 단수실 등 중국인 장군을 찾아가 은근슬 쩍 나구차비시왕을 죽이자는 뜻을 비쳤다. 그러나 그들도 지난 몇 년 동안 고선지와 동고동락하면서 산전수전을 함께 겪은 처 지였다. 그들도 일언지하에 변영성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가끔 예상하지 못했던 일로 방향을 바꾼다 고선지의 휘하에는 오소룡이란 자가 부장으로 있었는데 변영성과 동향인이어서 평소에 두 사람이 가깜게 지냈 다 변영성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기가 애석했던지 몰래 오 소룡을 꾀었다 황제에게 특청을 넣어 장군을 시켜 주겠다는 조 건이었다 다음날 아침 ,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도 해가 떠올랐다. 그 리고 정오가 지나서 성의 서문이 열렸다. 나구차비시왕을 비롯 해서 왕족과 대신들의 행렬이 성을 빠져 나와 서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모두 갑옷을 벗고, 창과 칼을 버린 비무장이었다 그러나 예고없는 사단은 그날 밤에 일어났다. 변영성의 꾐에 넘어간 오소룡이 자기 휘하의 300여 기를 데리고 몰래 추격을 한 것이다 그들은 서방으로 가는 길목에서 나구차비시왕족 일 행이 잠들어 있는 천막을 습격해 그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버렸 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도살극의 와중에서 압둘 왕자가 목숨 을 건져 도망쳐 버린 것을...... 다음날 아침에야 고선지는 이같은 사실을 알았다. 고선지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토해 냈다. '변영성이 그만 대사를 그르쳤구나? 고선지는 장탄식을 했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다. 고선지는 자신의 휘하가 아닌 감군 변영성을 어찌할 수가 없 었다. 그러나 오소룡은 군법을 어긴 죄를 다스려 참수하고, 군문 에 효수했다. 변영성은 자기의 잘못이 드러나자 전전긍긍하느라 고 하수인이었던 오소룡이 자기로 인해 죽는데도 남의 일 보듯 했다. 변영성은 자신의 출세에만 집착했을 뿐 천하에 의리 없는 자였다. 3일째 되는 날 아침, 고선지와 군사들은 위풍당당하게 석국에 입성했다. 이렇게 해서 고선지는 드디어 광활한 중앙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성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고 화려했다. 그 러나 자기 나라를 망하게 한 고선지를 맞는 석국 백성들의 눈초 리는 차갑고 적의에 차 있었다. 그날 밤 삼경쯤, 고선지의 침소 앞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있 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궁리하느라 잠을 설치고 있던 고선지는 심상찮은 인기척을 느끼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냐?" 상대는 방 안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듯 침묵했다. 고선지의 목 소리가 다시 한 번 새어 나왔다. "거기 있는 것이 누구냐? "접 니 다." "저 라니 ?" "을지 마사입니다." 을지마사라니 우선 마음이 놓였다. 뒤이어 을지마사가 방 안 으로 들어왔다. "을지 아우, 한밤중에 웬일인가? "쉿,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 을지마사가 고선지 곁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재빠르게 말했다. '형님, 이제 저 중국 사람들을 처치해 버릴 그때가 이르렀소," 을지마사의 말뜻을 알아차린 고선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 다. 즉 중국인인 이사업, 봉상청. 단수실, 변영성을 죽여 없애자 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조국 고구 려를 세우는 꿈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대평원에 고구려를 세우는 것은 고선지와 을지마사가 농우절도부에서 처 음 만났을 때부터 두 사람의 가슴속에 은밀하게 키워 오던 원대 한 꿈이 아니었던가? 그 때문에 두 사람은 온갖 역경을 참아 가 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바야흐로 그 때가 온 것이다. 을지마사가 밤중에 고선지 를 몰래 찾아와 의논한 내용은 이제부터 당연히 발아야 할 수순 이었다 그러나 을지마사의 결연한 의지와는 달리 고선지의 입에서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로서도 인간적인 연민이 있었다. 감군 변영성과 그의 졸개 몇 명은 단박에 요절을 내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기를 따라준 이사업, 봉상청, 단수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 들이 이민족이라고 해도 의리를 생각하면 죽일 수는 없었다. 고 선지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을 "음-." 을지마사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고선지의 인간적인 고민 눈치 챘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중국인들을 돌려보내시지요. 군사들 중 에는 고구려 사람들 말고도 중국인도 있으니까 그들과 함께 돌 려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제서야 고선지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렇게 하기로 하자 그러나 가까운 시일 내에는 안 된다." "왜요? 이제는 을지마사 쪽에서 의혹에 찬 물음을 던졌다. "저들이 돌아가면, 당나라가 가만 있지 않을 거다. 당나라 대 군과 맞서 또 싸워야 하는데 석국 백성들이 과연 우리편을 들어 줄까?" 고선지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얼마 동안 석국의 백성들을 달래고, 또 농우에서 고구려 백 성들을 이주시켜 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역시 인생의 경륜이 있는 고선지의 말에는 장래를 내다보는 치밀함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고선지는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첫 포고령을 내렸다. 1. 석국 백성을 상하게 하거나 물건을 강탈하거나 부녀자를 강간한 자는 즉각 사형에 처한다. 2. 석국 백성들의 농사일을 도와 주고 정당하게 받은 곡식으 로 군량미를 대신한다. 3. 노인들을 친부모처럼 공경하고, 아이들을 친동생처럼 사 랑한다. 다음은 석국 백성들에게 고하는 방을 붙였다. 1. 어떤 경우에도 세금을 일체 걷지 않고. 부역을 시키지 않 는다. 2. 도움이 필요할 때 요청하기만 하면 언제나 도와 준다. 점령군 사령관인 고선지 장군의 포고령과 방은 역사 이래 그 예가 없었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에는 적지를 점령하면 재 산이나 여자들은 모두 점령군의 노획물이었다 목숨을 바쳐 싸 운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전리품으로 나누어 주었 던 것이다. 그와 같은 시대 상황이고 보니 처음에는 병사들도 석 국 백성들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조그만 사건이 발생했다 여자에 굼주렸 던 중국인 병사 몇 명이 작당을 하고 석국 여인을 강간한 사건이 었다. 고선지는 즉시 성안 백성들을 공터에 모이게 하고는 그들 이 보는 앞에서 강간범들의 목을 베었다. 그제서야 석국 백성들 이 고선지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좀처럼 농사일은 함께 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선지는 을지마사에게 1만 명을 주어 들녁으로 나가 스스로 돕게 했다. 파종도 하고. 밀도 베고, 포도나무도 가꾸었다 그 과정에서 함께 일을 하고, 점심 도 먹다 보니 차츰 석국 백성들과 군사들 간에 격이 없어졌다. 백성들은 어느 땅에서 살든지 그들의 지배자가 자신들을 괴롭 히지 않으면 마음이 편했다. 석국의 백성들도 처음에는 점령군 이 공포스러웠지만 날이 갈수록 친밀감이 생겼고, 또 모처럼 해 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나구차비시왕이 통치했을 때보다 훨씬 평화롭고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는 데 길들여져 가고 있었 던 것이다 오죽하면 점령군 병사들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싶다 는 백성들이 나타나기까지 했다 그 가운데서도 잘생기고, 친절한 을지마사의 인기가 단연 높 았다 을지마사가 길거리를 지날 때면 이곳 저곳에서 이목구비 가 서늘하도록 잘생긴 석국 아가씨들이 추파를 던져 왔다. 그럴 때마다 을지마사는 허텐에 있는 무메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쯤 무메는 어찌 되었을까?' 무메와 헤어진 지도 벌써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무메 가 병이 나았다면 남의 아내가 되고 아이들을 낳았겠지,,,,,,. 이 런 생각을 할 때마다 을지마사는 애써 무메의 생각을 지워 버리 고, 주강 남쪽 마을의 고구려 유민들을 생각해 보았다. 나라 할 머니와 나데는 정말 죽었을까. 만약, 만약에 어느 하늘 밑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한들 배를 몰고 고구려로 떠난 자모 일행 이 폭풍우를 만나 이미 오래 전에 저세상 사람이 된 줄을 알기나 할까? 그리고 나데의 남편 아소미네가 모래 폭풍 속에서 비명에 죽은 줄을 꿈에나 짐작할는지,,,,,,. 아마도 나데는 어머니 나라 가 그렇게 했듯 망부석이 되어 남편 아소미네가 돌아올 날만 애 타게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을지마사는 마음 이 착잡했다. , 석국성을 점령한 지도 어느덧 4개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석국은 바다가 먼 내륙 지방의 대륙성 기후탓으로 한낮 으로는 후끈 더웠다. 입성을 했을 때 성안 도처에 살구나무들이 연분홍색 꽃들을 흐드러지게 피웠더니 어느 틈에 어린애 주먹만 큼씩이나 큰 노오란 살구들을 탐스럽게 매달고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석국에는 예전에 없던 평화가 지 속되고 있었지만, 석국을 에워싸고 있는 주변 정세는 시시각각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변영성과 오소룡의 학살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져 달아났던 압 둘 왕자는 같은 이슬람 형제국인 압바시드 칼리프국, 사라센 그 리고 당나라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토번으로 돌아다니며 원수를 갚아줄 것을 호소했다 그들은 드디어 동맹군을 결성하고, 고선지 원정군에게 대적할 준비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슬람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안국을 정벌한 사라센의 명장 지아드 이븐 살리 이슬람 연합군들은 몸에 철갑을 두르고 머리에 세모뿔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어 마치 옛 로마의 기마병단 차림과 흡사했다 아무튼 중 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 한점 섬처럼 고립무원한 석국성 가까이 에 폭풍을 예고하는 먹구름장이 시시각각으로 모여들고 있는데 도 성안은 태평스럽기만 했다. 하루는 을지마사가 일지군을 거느리고 마악 성밖으로 나가려 는데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서쪽 지평선 끝에서 때 아닌 먼지가 이는 것이었다.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남쪽에도 뿌옇게 먼지가 일고 있었다. 그날따라 바람도 없는 날이어서 을 지마사는 속으로 의아스런 생각이 들었다. "저게 뭘까? 혹시 메뚜기떼들?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대평원에서는 메뚜기떼들이 하늘을 새 까맣게 덮으며 날아와 순식간에 농작물을 갉아먹어 흉년이 드는 일이 종종 있었다. 메뚜기떼들이 날아오는 모습 또한 처음에는 꼭 먼지가 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이어 그것은 메뚜기떼가 아님이 분명해졌다. 전방에 나가 파수를 보던 병사들이 허겁지겁 말을 달려왔다. "을지 장군님 ! 큰일났습니다요." "뭣이라고? "군사들이 막 이쪽으로 쳐들어옵니다.' "혹시 당군이 아니더냐? "아닙 니 다." "그럼 , 군사들이 몇 명이나 되더냐? "굉장히 많아요. 만 명, 아니 10만 명, 100만 명도 더 넘어요." 을지마사는 급히 고선지에게 달려가 보고를 했다. 고선지의 얼굴에도 아연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했다 항 상 군대의 총사령관은 시간을 다투는 촉박한 결정을 혼자서 내 려야 했다 만약 결정이 잘못되었거나 시간을 지체하면 전군이 몰살을 당하기 일쑤였다. 뒤이어 이사업, 봉상청. 단수실, 변영성이 모여들었다. 역시 고선지는 명장답게 순간의 결심도 단호했다 "지금부터 급히 성을 빠져 나갑시다. 철수 지점은 탈라스 강 방-어물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수십만의 적군과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또 수성을 하면 이젠 거꾸로 고선지의 원정군이 나구차 비시왕의 전철을 밟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래서 석국 성에서 100여 리 떨어져 있는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강인 탈라 스 강을 사이에 두고 맞서 싸우는 것이 가장 유리한 전술로 판단 되었던 것이다. 고선지의 7만 군이 탈라스 강에 도착한 것은 그날 오후 3시쯤 이었다. 서둘러 강을 건너 동쪽 언덕에 방어진을 구축했다. 창검 과 기치가 강안을 뒤덮었다. 지아드 이븐 살리의 이슬람 연합군 20만 명이 탈라스 강에 도 착한 것은, 그보다 2시간쯤 뒤였다. 마침 서쪽 하늘에는 중앙아 시아 특유의 연분홍색 저녁 노을이 곱게 타고 있었다. 유난히 고 운 노을빛이 곧이어 벌어질 수많은 죽음을 예고하듯 처연함을 띠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이슬람 연합군은 잠시의 휴식도 없이 우레 같은 함성을 지르며 곧바로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함성 속 에는 상대방을 제압하는 살기가 뻗혀 있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자? 이슬람 형제들의 원수를 갚자! 분노의 불길에 타오른 연합군 병사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강물을 건넜다. 만약 고선지의 고구려 군단이 아니었더라면 아 마도 원수를 갚자고 살기등등해서 덤벼드는 연합군의 기세에 눌 려 벌써 진이 흩어지고 퇴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선지 휘하 의 군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텐산 산맥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나 들며 싸움을 익힌 세계 최고의 강병들이었다 고선지군은 이슬람 연합군이 강을 거진 건너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고선지의 신호에 따라 일시에 강물 속으로 짓쳐들어갔 다. 그리고 허둥대며 강을 건너는 연합군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일시에 말과 말이, 사람과 사람이 뒤엉켰다. 창검과 기치가 지는 노을빛을 받아 번뜩거렸다 탈라스 강은 일시에 아비규환이 벌 어지고 강물은 핏빛으로 변했다 그날의 싸움은 고선지 원정군 의 대승리였다. 다음날과 그 다음날은 온종일 싸움이 없었다, 폭풍을 예고하 는 전야의 고요만이 감돌았다. 오직 탈라스 강만이 7월의 따가 운 햇살을 받아 유난히도 반짝거리며 고요히 흘러내렸다 4일째 되는 날 아침, 강 서쪽에 진을 치고 있는 이슬람 연합군 의 조용한 움직임이 있었다 절반가량의 기마병들이 후퇴를 하 는 것이었다. 고선지는 재빨리 명령했다 "을지마사! 너도 2만 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서둘러 후퇴해 라." 고선지의 추측은 적중했다. 이슬람 연합군의 일부가 슬그머니 강 상류 쪽으로 돌아가서 강을 건넜다. 그로부터 한 시각쯤 지났 을까. 갑자기 북소리 , 호각소리가 요란하게 나며 연합군들이 정 면으로 쳐들어왔다. 동시에 강 상류를 건너 우회한 연합군의 다 른 부대가 고선지군의 배후에서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 왔다. 고선지의 부대는 순시간에 이슬람 연합군에 의해 앞뒤로 에 워싸여 버리고 말았다 앞에는 강을 건넌 이슬람 연합군, 뒤에 는 강 상류를 건너 우회해 온 이슬람 연합군으로 고선지의 고구 려군단은 전멸의 위기에 빠졌다. 이윽고 양군 사이에 싸움이 붙 었다. 고선지 부대는 에워싸고 있는 이슬람 연합군을 상대로 좌 충우돌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고선지군의 일각이 무너지기 시작 했다. 그때 어디선가 홀연히 고각소리가 울리면서 일지군이 내달았 다 키가 7척인 미남장수가 선두에서 짓쳐들면서 벽력같이 소리 를 질렀다. "을지마사가 여기 있다." 고선지의 명을 받아 멀찍이 물러서 있던 을지마사군은 기다리 고 있다가 이슬람 연합군이 예상대로 고선지군의 배후를 들이치 자 곧바로 이슬람 연합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연합군 의 포위를 고선지군이 다시 역포위해 버린 것이다. 전황이 금세 뒤바뀌었다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슬람군은 대패하고 그 가운데서 목숨을 겨우 건진 일부만이 강을 건너 도망쳐 버렸다. 이렇게 해서 고선지의 원정군은 두 번 싸워서 모두 승리를 했다. 이슬람 연합군의 병력이 20만 명이라고 해도 두 차례의 싸움 에서 10만 명 이상을 잃어버린 그들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거 기다가 싸움에 패하면 으레 그러하듯, 패전한 책임을 가지고 서 로 다툼이 일어났다. 그들은 더욱이나 연합군이었기 때문에 한 번 와해가 되면 걷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당연히 고선지 의 원정군측에서 강을 건너 공격할 차례였다. 패잔병이나 다름 이 없는 그들을 일거에 소탕하고 석국으로 다시 개선하는 일만 이 남았다. 다음날, 그러니까 전투가 시작된 날로부터 5일째가 되던 날 아침이었다. 고선지의 부대는 최후 공격을 하기 위해 탈라스 강 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바로 다음 순간, 예기치 않은 사태가 벌어지고 그만 세계의 역사가 뒤바뀌 는 엄청난 운명을 맞은 것이다 고선지와 참모들이 마악 작전회의를 끝낼 무렵, 갑자기 바깥 이 시끌짝하더니 이곳 저곳에서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놀란 말 들이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이리저리 날뛰었다. 급히 천막 밖으로 나온 고선지와 다른 장수들은 눈앞에 벌어 진 광경에 놀라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눈을 씻고 보 아도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수 만 마리의 소떼들이 꼬리에 불을 달고 고선지의 원정군 진지로 돌진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불을 보자 놀란 말들이 앞발을 하늘로 치켜들며 길길이 날뛰고, 병사들도 공포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쪽에서 함성 소 리가 진동했다. "와아 -. " "와아 -." 강 건너에서 철수 준비를 하고 있던 이슬람 연합군들은 뜻밖 에도 고선지군의 진지가 소떼들에 의해 갑자기 아수라장이 되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바로 이때다 싶어 강을 건너 달려든 것이다. 고선지의 눈앞이 노오래졌다. '아! 이것이 정녕 나의 마지막인가.' 고선지는 너무나도 엄청난 충격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지만 그의 입에서는 다급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수 어딨느냐? 북을, 북을 쳐라!" 이어서 고수가 전군의 후퇴를 알리는 북을 난타했다. 고선지 도 얼른 말잔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동쪽을 향해 질풍같이 내달 았다. 뒤에 따르는 자는 을지마사 등 불과 수백 기. 고선지는 전 속력으로 말을 달려 도망가면서도 의혹을 풀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 이슬람 연합군이 쳐들어오게 되었을까? 그는 그때까지도 압둘 왕자가 변영성의 참살을 모면하고 구사일생으로 도망친 사 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치고, 다 이긴 싸움을 망친 소떼들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에 대한 해답이 저절 로 풀렸다, 고선지와 을지마사가 한식경쯤 달렸을 때 그들의 앞을 가로막 는 또 다른 낯선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이슬 람 연합군이 아니었다. 텐산 산맥 북쪽 기슭에서 유목생활을 하 는 카를루크족들이었다. 그들은 미개한 종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에 소속되어 있었고, 한번도 반란을 일으킨 적이 없어 설 마 그들이 모반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튼 무 슨 동기가 있었던지 그들이 바로 소떼를 고선지의 원정군 진지 로 몰아붙인 장본인들이었다. 알록달록하게 몸치장을 한 카를루크족 추장 통가와 전사들이 도망가는 고선지의 길을 막고 덤벼들었다. 고선지는 몸도 지치 고 말도 지쳤다. 통가가 창을 내지르자 고선지는 슬쩍 몸을 비 켰다. "에잇 ! 천하에 몹쓸 야만인들 같으니 라고." 뒤따르던 을지마사가 대뜸 통가에게 덤벼들었다 통가의 무술 은 을지마사의 적수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통가의 창이 을지마사의 칼을 맞받는가 싶었으나 뒤이어 창대가 부러져 나가 고, 을지마사의 칼이 통가의 옆구리를 깊숙이 베어 버렸다. 이 광경을 지켜본 다른 카를루크 전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을 쳤다. 고선지는 또 한번의 위기를 넘기며 동쪽으로 말을 몰았다. 고 선지의 뒤에는 이슬람 연합군의 추격이 급하게 따라붙었다. 고 선지가 쉬지 않고 달리건만 추격군도 그만큼 끈질기게 뒤쫓았 다. 도망을 가면서도 고선지는 마음속이 허허로웠다. '잃는 자가 있으면 얻는 자가 있고, 얻는 자도 어느 땐가는 잃 어버리게 되는 것을, 3권에 계속